153. 그녀는 나의 유일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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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그녀는 나의 유일한 세상
2022.12.17.
‘독 안에 든 쥐.’
카셀의 말에 따르면 그러했다.
샬로네즈는 이제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라고.
그 말에 로렐라는 누구보다도 깊게 공감했다.
아델리움으로 보낸 해적들이 자수하자마자 왕녀는 예상대로 무척이나 당황한 듯싶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해적들을 제거하려 들 거라는 예상 또한 맞아떨어졌다.
‘누나 말대로…… 꽤나 거친 데다가, 실력도 만만치 않은 놈들이었어.’
해적들을 암살하러 온 왕녀의 수하들을 떠올린 카셀의 눈빛이, 일순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실 로렐라는 이미 샬로네즈에 대해 그녀가 아는 한 최대한 자세히 알려 주었다.
카셀과 그의 동료들이 다치거나 하는 일을 가능한 한 막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래야만 길드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까.
모두에게 사랑받는 유능한 왕녀 행세를 하면서도 뒤로는 극악무도하고 잔인한 짓을 아무렇지 않게 벌이는 여자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 아닌가.
비밀로 한 것이 있다면 오로지 그녀가 주인공 후보라는 점뿐이었다.
그리고 카셀은, 그런 로렐라의 이야기를 조금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습격에 대비해 감옥 주변을 지키던 길드원의 숫자가 매우 많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덕분에 길드원들의 피해는 적었지만, 샬로네즈의 수하들은 대부분 불귀의 객이 되었다.
물론 수하들이 전부 죽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상당한 실력자들을 잃게 된 셈이니 제법 뼈아플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샬로네즈에게 닥친 불행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마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습격을 당해 큰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각지의 실력 있는 의사들이 좋은 약을 들고 일제히 아델리움으로 향했다는 소식도 함께 들려왔다.
안 그래도 능력 있는 수족들을 상당수 잃어 예전처럼 일을 꾸미기가 어려워진 샬로네즈로서는, 부상으로 인해 더욱더 행동에 제약이 걸린 셈이다.
‘그녀를 습격한 사람이 누굴까?’
정황상 샬로네즈에게 원한을 품은 자가 분명했다. 게다가 왕녀의 동선을 미리 파악해 마차를 폭파시키는 대담함과 지금까지 아무런 꼬리도 잡히지 않은 치밀함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을 벌일 만한 사람들은 정해져 있었다.
바로 다른 후보들 말이다.
하지만 각각의 후보들에게 영상석을 보낸 건 얼마 전의 일이었다. 설령 편지를 받자마자 즉각 폭발 사건을 계획했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빨랐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역시 그녀가 틀림없어.’
‘무엇보다 복수는 제 특기니까요’라고 말하며 싸늘하게 웃던 세이블이 뇌리에 스쳐 지나간 순간, 로렐라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질렀다.
……평생 사이좋게 지내야지, 라는 생각을 하며.
하지만 그도 잠시.
로렐라의 미간에 얼핏 옅은 주름이 생겨났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소식을 하나 접한 탓이었다.
‘데우스 에번에 관한 걸 조사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야. 대체 이제 와서 왜 그러는 걸까? 이미 예전에 끝난 일인데.’
카셀은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로렐라 또한 적지 않게 놀랐음은 물론이었다.
카셀은 ‘아무리 조사한들 길드의 정체가 탄로 나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라’고 했지만, 그녀는 마음속에 자라난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데우스 에번에 관해 아는 사람은 당사자인 위너드를 제외하면 카셀과 자신, 그리고 딱 한 사람뿐이니까.
바로 레어넌 베르하르트.
그 때문에 고원에 가서도 위너드의 얼굴을 필사적으로 가리지 않았나.
만약 그날 바다에서 살아남은 게, 길드에 갇혀 있던 해적들뿐만이 아니라면? 게다가 레어넌은 따로 조사를 벌이고 있었으니 로렐라는 알지 못하는 새로운 정보를 입수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만약 그날 배에 탔던 누군가가 위너드에 대해 진술이라도 한다면…….’
순간 사그랑 별궁에서 느꼈던, 태황제 부부를 바라보던 레어넌의 심상치 않은 눈빛이 떠올랐다. 로렐라의 눈동자에 불안이 차올랐다.
당연한 말이지만 로렐라는 위너드에 대한 걸 포함해 자신의 비밀을 레어넌에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자신을 그토록 믿어 주는 레어넌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가 의문을 품고, 지금껏 드러나지 않은 모든 일의 진상을 파헤치겠다고 마음먹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몇 번이고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여자가, 계속해서 무언가를 감추는 게 불쾌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온 나라를 뒤집어서라도 사실을 밝히려 들 수도 있다. 그는 그럴 만한 힘이 있으니까.
하지만…….
‘두 분은 무사하십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동시에 사고로 인해 고립된 태황제 부부를 구조하던 레어넌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지나치게 힘을 소모한 탓에 피를 토하면서도, 자신의 몸을 돌보긴커녕 인명 구조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당시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패닉에 빠졌던 자신의 마음 또한 구해 준 사람이 바로 그였다.
이는 다른 사람도 아닌, 오로지 레어넌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 제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하더라도, 로렐라는 레어넌만큼은 믿을 수 있었다.
그걸 되새기니, 불안감으로 술렁이던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그때였다.
“아가씨.”
밖에서 노크와 함께 조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어넌 단장님이 오셨어요. 약속은 하지 않으셨지만, 급히 뵐 일이 있다고 하시는데요.”
얼른 표정을 고치고 조이를 안으로 들였다. 재빨리 곁으로 다가온 그녀는 로렐라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무슨 일이신지는 몰라도 굉장히 다급해 보이셨어요. 옷매무새도 무척이나 흐트러지셨고요. 어쩐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에요.”
그 순간 로렐라는 저도 모르게 힘주어 주먹을 꽉 쥐었다.
* * *
‘내가 지금…….’
커다랗고 푹신한 소파에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던 레어넌이 문득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데없이 그녀의 저택에 쳐들어오다시피 한 자신을 인지한 것도 그 순간이었다.
‘……무얼 하고 있는 거지.’
그는 손을 들어 풀어 헤친 셔츠 깃을 매만졌다.
평소처럼 단정한 정복이 아니라, 셔츠 차림으로 이렇게 대뜸 쳐들어오다니. 심지어 소매는 팔뚝이 드러나도록 모두 걷어붙였다.
설마 이렇게까지 이성을 잃을 줄이야.
그는 메마른 손으로 당혹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문질렀다. 하지만 가슴속을 활활 지피던 불길은 사그라들긴커녕 그 부피를 점점 키워만 갔다.
여느 때와 같이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가득한, 그래서 언제나 그를 미소 짓게 했던 편하고 아늑한 공간도 지금은 어쩐지 낯설기만 했다.
한심하고 음습하게 뒷조사를 한 것도 모자라, 결국 끓어오르는 질투를 이기지 못해 불쑥 찾아오기까지 하다니……. 도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건 생애 처음으로 겪는 일이었다.
하지만 미처 마음의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응접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단장님……?”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붉은 머리카락이 먼저 보였다. 뒤이어 조금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로렐라가 나타났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레어넌은 다소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재빨리 일어났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놀랍게도, 스스로에 대한 환멸이나 당혹감 같은 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 대신, 알 수 없는 불같은 감정만이 뜨겁게 타오를 뿐이었다.
* * *
차를 들고 온 조이가 염려스러운 눈빛을 보낼 정도로 어색한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이내 응접실에서 나와 정원을 산책하기로 했다.
찬 바람이 부는 쌀쌀한 날씨였지만, 갑갑한 실내에 있는 것보다 백배는 더 나았다.
두 사람 모두에게.
“잘…… 지내시는지 궁금해서 찾아왔습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레어넌이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낮고, 굳어 있다는 걸 깨달은 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한 뒤 얼른 덧붙였다.
“해적들이 자수했다는 소식에 아무래도 놀라셨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러셨군요.”
로렐라는 그런 레어넌을 향해 입술을 끌어 올렸다.
“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괜찮아요. 오히려 범인들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더 안심이 되는걸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레어넌도 로렐라를 향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
하지만 곧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두 사람이 만난 이래로 이렇게 어색한 시간은 처음이었다.
입술이 자꾸만 메말랐다. 묻고 싶은 말은 산더미 같은데,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눈동자 안에 오롯이 자신만이 비친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아직도 그녀의 마음을 조금도 알 수 없다는 현실이 괴로웠다.
레어넌은 입술을 꽉 물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단장님?”
그는 대답 대신 손을 그러모아 깍지를 꼈다. 그러고는 그대로 입술로 천천히 가져갔다.
손등에 입을 맞춘 순간, 언제나 바르고 선했던 푸른 눈동자가 불이 붙은 것처럼 고요히 타올랐다.
로렐라가 놀란 듯 살짝 어깨를 움찔했지만, 레어넌은 매달리듯 얽은 손가락을 놔 주지 않았다.
당신 곁에 있는 그 남자는 대체 누구입니까.
입가에는 차마 소리 내어 꺼내지 못한 말이 맴돌았다.
내게는 감추기만 했던 비밀을 그자와는 공유하고 있습니까?
“…….”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하는 로렐라는 그저 두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조금 당황한 듯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레어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단장님, 왜…… 그러시는지…….”
침묵을 견디기가 힘든지 로렐라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가슴이 타는 듯했다. 묵묵히 그녀의 손을 꾹 잡고 서 있던 레어넌의 입술 사이로 어느새 뜨거운 숨결이 흘렀다.
만약 지금 누군가가 나와 똑같은 행동을 한다면, 틀림없이 나무라며 말렸을 테지.
그러나 지금은 그조차 중요하지 않았다.
로렐라에게서 풍기는 옅은 장미 향기가 마음을 들끓게 했다.
“로렐라.”
레어넌은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안고 그녀를 가볍게 끌어당겼다.
허리를 당겨 안은 손에 힘을 주자, 당황한 로렐라가 레어넌을 올려다보았다.
레어넌은 그대로 그녀의 턱을 가볍게 잡았다.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이대로 가질 수만 있다면.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은 달콤한 꾐에 마음이 사납게 요동쳤다.
“……단장님?”
“…….”
대답 대신 뜨거운 숨결이 점차 가까워졌다.
평생 지켜 온 신념을 뒤로하고 분홍빛 보드라운 살갗을 거침없이 그대로 삼키려던 그때였다.
“…….”
문득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보였다.
비록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었지만, 한없이 무구하고 순수했다.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굳은 믿음이 담긴 눈동자.
“…….”
그 순간 차가운 얼음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빌어먹을.
레어넌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욕설을 읊조렸다.
신뢰와 믿음, 그리고 기대와 경의.
일견 좋게만 들리는 감정들을 품은 아름다운 눈동자가, 일종의 저주처럼 느껴졌다.
레어넌이 낮은 숨을 토해 냈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잡고는 뒤로 급히 물러났다.
로렐라가 무어라 말을 건네려 입술을 달싹였지만, 재빨리 고개를 저은 레어넌이 그녀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로렐라.”
그러고는, 아마 앞으로는 하지 못하게 될 그 말을 마지막으로 꺼냈다.
“사랑합니다.”
당신이 누구든.
또 어떤 비밀을 지니고 있든 간에.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습니다. 평생 변치 않을 마음으로 아껴 드리고 싶습니다.”
“…….”
커다랗게 뛰는 심장 소리로도 감출 수 없는 서글픈 침묵이 맴돌았다.
“죄송……해요.”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 채 힘겹게 말을 이었다.
“단장님이 정말 좋은 분이라는 건 알지만……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단장님의 마음에 응할 수 없어요.”
작지만 결코 나약하지 않은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매섭게 때렸다.
로렐라는 그와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새빨개진 얼굴로 울먹이며 연신 사과를 건넸다.
“정말…… 죄송해요.”
아니, 오히려 사과해야 할 건 저였다.
마음이 산산조각 나는 듯 부서져 내렸지만, 레어넌은 그녀의 눈동자를 촉촉하게 적신 눈물을 바라보는 것이 더 아팠다.
“괜찮습니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억지로 입술 끝을 끌어 올렸다.
“그대의 마음엔……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걸.”
너무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나를 봐주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바로, 오로지 그녀만을 향한 신실하고 정직한 마음이었다.
“어차피 내 마음에는 그대 외에 다른 것을 넣을 공간 따윈 없으니까.”
레어넌 베르하르트는 로렐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힘주어 맹세했다.
찬란한 햇살이 눈부신 금발 위로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