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균열
(152/173)
152. 균열
(152/173)
152. 균열
2022.12.14.
“지금…… 뭐라고?”
집무실에 앉아 있던 샬로네즈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했지?”
높낮이가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음성이 자신을 다시 한번 채근하자, 라트리아 백작 부인이 고개를 더욱 깊게 숙였다.
“레이디 로렐라 메이레드를 습격했던 일당이 자수했다고 합니다. 현재 기사단 본부에 구금된 상태며…….”
뒤쪽의 커다란 창을 통해 따스한 햇살이 한가득 스며들고 있었지만, 라트리아 백작 부인은 한기를 느꼈다.
부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왕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곁으로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믿기 힘든. 아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레이나 아벤도트가 그동안 일어났던 실종 사건과 관련이 있으며, 그 소식을 들은 피해 가문들이 모조리 들고일어났다는 것, 레이나는 실행범이고 진범이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는 것까지.
“해당 사항이 워낙 엄중한 데다가 피해자가 세실리카의 귀족인 관계로, 세실리카 측에서도 합동 조사단을 파견……하고 싶다는 뜻을 보내왔습니다.”
라트리아 백작 부인이 간신히 말을 마쳤다.
왕녀는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는 엄청난 압박감이 그녀를 짓누르는 듯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샬로네즈의 눈빛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왕녀를 곁에서 모셨건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라트리아 백작 부인뿐만 아니라 함께 있던 시녀들도 똑같이 생각하는 듯했다. 그들은 입을 꾹 다물고 몸을 사렸다.
혹시 내가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게 있거나, 말을 잘못한 게 아닐까?
라트비아 백작 부인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짚이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
“그래, 그렇구나.”
그때, 평소와 같이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그래도 세실리카의 사절단에게 줄곧 면목이 없었는데, 이 일로 어서 사건이 해결되었으면 좋겠어.”
라트비아 백작 부인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따듯하면서도 상냥한 미소가 왕녀의 입가에 서려 있었다. 그녀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미소였다.
“왕녀님의 사려 깊은 마음은 이 나라에 모르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조사관들도 모두 왕실을 위해 최선을 다할 거라고 약조하였습니다.”
백작 부인도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그래. 그 일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자세히 보고해 주렴. 그 사항을 토대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지원하마. 왕실 측에서도 협조를 아끼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어야 할 테니. 실제로도 그리하여야 할 것이고.”
“물론입니다, 왕녀님.”
라트비아 백작 부인은 믿음직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샬로네즈는 그대로 시녀들을 모두 물렸다.
환한 공간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최고급 실크로 만든 휘장이 바람에 고요히 흔들렸다.
이윽고 왕녀의 손안에서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손바닥 안에 금세 뜨끈하고 질척이는 느낌이 차올랐다.
천천히 손을 펴자 외국의 어느 사절단이 선물로 주고 간, 유리로 만든 펜대가 두 동강이 나 있었다.
날카로운 절단면을 타고 새빨간 선혈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설마 그…… 계집이……?”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샬로네즈가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책상 위에 놓인 고급 편지지가 흘러내린 피로 새빨갛게 젖었지만, 샬로네즈는 찢긴 손바닥을 감싸긴커녕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감히 내게 그런 별 볼 일 없는 후보 따위의 안내자가 되어 달라고?’
제게 치욕을 남긴 위너드 황태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생각날 때마다 짓씹어서 피딱지가 앉은 입술 위로 또다시 핏기가 서렸다.
그날 이후, 로렐라 메이레드는 반드시 제 손으로 고통스럽게 죽이리라 마음먹었다. 그래야만 그 남자도 씻을 수 없는 후회를 하게 될 테니까.
“……한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다니. 제법이야.”
담담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의 얼굴은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불타는 것처럼 빨개져 있었다.
샬로네즈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의 새장에서 얌전히 졸고 있던 새 한 마리를 꺼냈다.
그것을 밖으로 날려 보낸 지 얼마나 되었을까.
마치 그림자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일색인 남자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해적들이 갇혀 있다는 기사단 본부의 감옥으로 가거라.”
복면 사이로 드러난 눈빛이 일순 어둡게 가라앉았다.
“일전에 명령하신 로렐라 메이레드는 어떻게 할까요?”
“해적들 먼저 처리해.”
그래, 지금은 복수심에 불타오를 때가 아니었다.
기껏 가라앉힌 귀족들의 반발이 자칫하면 다시 거세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 더 이상 헛소리를 지껄이기 전에, 해치워 버리는 게 우선이었다.
레이나 아벤도트는 아무래도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멍청한 여자였던 듯하다. 벌레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도 모자라, 성가시게 후환을 남기다니.
이제는 너무 간단하게 죽인 게 아쉬울 정도였다.
“가서 그것들이 더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기 전에 죽여. 언제나 그렇듯, 너희들이 잠입하기 쉽도록 이쪽에서 손을 써 주마.”
왕녀와 잠시 시선을 교환한 수하는 그대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사라졌다.
이윽고 방에는 또다시 그녀 혼자 남았다.
혼자 남아 상처를 살피던 샬로네즈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겨우 멎었던 피가 다시금 터졌으나, 고통이 오히려 증오를 부추겼다. 이를 부드득 간 샬로네즈의 눈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 * *
어찌 된 일인지, 수하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루나 이틀이면 될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아무 소식 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왕녀님, 안색이 좋지 못하십니다. 괜찮으세요?”
외교 문제로 왕국을 찾은 귀빈을 항구까지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
함께 마차에 동승한 라트비아 백작 부인이 파리한 얼굴의 왕녀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 피로가 쌓인 모양이야.”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이루 말할 수 없이 초조하기만 했다.
생각보다 늦어지는 수하들의 결과 보고를 기다리다 못해, 직접 움직이기까지 했다. 기사단 본부까지 찾아가 분위기를 살폈으나, 그들은 평소와 같았다.
그리고 해적들도 여전히…… 살아 있었고 말이다.
설마 실패한 건가?
지금껏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어째서?
무언가…… 이상하다.
본능적인 위기감이 쉴 새 없이 경고를 보냈다. 샬로네즈가 입술을 질끈 깨문 그때.
콰아앙!
“아악!”
온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마차의 유리창이 일제히 산산조각이 났다. 샬로네즈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급히 감쌌다.
창문 쪽으로 향해 있던 왼쪽 뺨이 불에 타는 듯 아파 왔다.
“와, 왕녀님……! 흐윽……!”
매캐한 연기 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백작 부인이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왕녀님이 무사하신지 확인해라, 어서!”
“경계를 늦추지 마!”
사방에서 호위 병사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엉금엉금 바닥을 기어 문 쪽으로 손을 뻗은 찰나, 반쯤 부서진 마차 문이 힘껏 열렸다.
순식간에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었다.
“윽…….”
마차의 발판 아래로 쓰러지듯 나뒹구는 그녀를, 호위 대장이 급히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이게, 대체…… 무슨…….”
“습격이 있었습니다! 여기는 위험하니,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시지요. 어서요!”
습격?
설마…… 나를?
샬로네즈는 계속해서 뜨거운 것이 흘러내리는 얼굴을 번쩍 치켜들었다. 피에 젖어 흐릿한 눈에 익은 풍경이 보였다. 수도로 향하는 숲길의 초입이었다.
축축하게 젖은 속눈썹을 비비자, 새하얀 장갑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엉망으로 부서지고 쓰러진 나무들로 인해 사방이 쑥대밭이었다. 아까의 폭발음이 남아 있는 듯 여전히 귀가 먹먹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샬로네즈의 시선이 순간 저 멀리 커다란 바위 쪽에 머문 그때였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 동시에 누군가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왕녀님.”
기사는 샬로네즈를 들어 올려 말에 태웠다. 그러고는 용케 폭발을 피해 다치지 않은 병사들을 향해 재빠르게 지시했다.
“거기 너희들은 급히 가서 추가 병력을 요청해라. 그리고 나머지는 나와 왕녀님을 호위하도록!”
말을 마친 기사가 망토 자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꾸욱 누르듯 감쌌다. 또다시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샬로네즈를 태운 말은 어두운 길을 필사적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말발굽 소리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샬로네즈의 머리 또한 깨질 듯 울렸다.
그렇게 얼마를 달렸을까.
어느새 주위가 밝아지고 넓은 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곧 의원이 있는 마을에 도착할 겁니다.”
그녀를 살핀 호위 대장의 눈빛에 참담한 기색이 가득했다.
하지만 샬로네즈는 그런 그를 그저 멍하니 응시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픔은커녕,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아까 얼핏 보았던 낯선 사람에 대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분명…… 여자의 인영이었다.
로렐라 메이레드?
저도 모르게 그 이름을 떠올려 보았지만, 그녀는 곧바로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찰나였지만 똑똑히 보았다.
휘날리는 검은 머리카락과 새까만 드레스, 그리고 서늘하게 올라간 입매를!
아직도 눈앞에 생생한 그 모습을 떠올리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설마…… 유령에 홀리기라도 한 것일까?
머리가 복잡한 와중에도 단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샬로네즈가 격한 숨을 가라앉히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나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좀처럼 흔들리지 않던 마음속에 처음으로 커다란 균열이 생겨났다. 막아 볼 새도 없이 깊게 갈라진 틈 사이로 두려움과 공포가 차올랐다.
* * *
에크레투스 성기사단 관저는 늘 바쁘지만, 요즘은 더욱 분주했다.
아델리움에서 돌아오던 날 사절단을 공격한 해적들이 자수를 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세실리카의 황제는 이 소식을 직접 듣자마자 급히 레어넌을 불러들였다. 황제는 절대 아델리움에게만 조사를 맡기지 말고, 끝까지 함께 조사를 해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델리움을 압박할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황제의 의지가 느껴졌다. 물론 황제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레어넌 역시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황제의 명을 받기 전부터 이미 자체적으로 조사단을 꾸린 덕분에 일은 수월했다. 그중 몇몇 사람들이 증인들을 직접 심문하기 위해 이미 아델리움으로 길을 떠난 상태였다.
레어넌도 직접 그곳으로 가 곧 그들과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피치 못하게 승선을 미뤘다. 오늘 새벽, 그를 찾아온 수하 때문이었다.
‘그때 별도로 지시하셨던 ‘데우스 에번’이란 외출 시종에 대한 조사를 마쳤습니다. 또한 그 외에도……. 해적 습격 사건의 용의자가 추가로 발견된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그는 레어넌의 심복답게 참으로 유능한 부하였다.
‘참고로 용의자가 쓰러져 있던 바닷가는 주민들이 채 백 명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입니다. 최초로 발견한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그 해적은 내내 바다 위를 표류한 탓에 이미 기력이 많이 상해 있었다고 합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숨을 거두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정황상, 분명 그날 사고가 일어났던 배에 타고 있던 해적이 틀림없습니다.’
레어넌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계속해서 수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자가 눈을 감기 전 이렇게 말했답니다. 빨간 머리 여자가 허공을 바라보며 ‘쿠키’라는 단어를 외치자마자 갑자기 무거운 조각상이 떨어지고, 배의 핸들이 날아오는 등 마법과도 같은 일이 펼쳐졌다고요. 게다가 당시 빨간 머리 여자의 곁에는…….’
레어넌은 이윽고 천천히 감았던 두 눈을 떴다.
책상 위에 네모반듯하게 놓인 서류 뭉치가 보였다.
첫 번째 장에는, 후작의 시계 도난 사건 때 로렐라의 외출 시종이었던 데우스 에번에 관한 내용이 쓰여 있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뒤를 캤음에도 불구하고, 서류에는 단 몇 줄만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데우스 에번이라는 인간은 실존하지 않음. 주소도, 이름도, 신분도 모두 가짜로 추정됨.’
레어넌의 눈썹이 일순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는 곧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와 뒷장을 넘겼다.
그곳에는 방금 전 수하가 말한 내용이 세세히 적혀 있었다.
바로, 부서진 배에서 떨어져 바다를 표류하다 결국 어느 마을의 해변에서 목숨을 잃은 해적이 자신을 발견한 주민을 붙들고 마지막으로 증언한 내용이었다.
빨간 머리 여자를 어떻게 납치했는지, 그녀를 납치하자마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해적들이 어떻게 공격받았는지가 빼곡히 나와 있었다.
‘갈색 머리에 초록색 눈동자를 지닌 미남자가 내내 여자의 곁을 지켰다.’
‘검술 자체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붉은 오라까지 발현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해적 수십 명이 그를 당해 낼 수 없을 정도로 괴물 같은 실력의 소유자였다.’
레어넌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보고서가 그대로 펼쳐진 책상 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의 눈에 일순 새파란 불길이 일었다.
그 시선이 머문 곳은, 맨 아래쪽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둘 다 마치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닌 듯했다. 특히 남자는 여자를 지키는 수호 기사 같았다. 심지어 두 사람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듯 손발이 척척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