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1화. 반격 (151/173)


151화. 반격
2022.12.10.


세이블이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살짝 쌉쌀하면서도 달콤한 차 맛이 혀끝에 맴돌았다. 뒤늦게 올라오는 알싸한 계피 향이 복잡한 머릿속을 말끔히 씻어 주는 듯했다.

아무래도 이제 로렐라가 저보다 제 입맛을 더 잘 아는 듯하다. 세이블은 손수 빈 잔을 다시 채워 주는 로렐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샬로네즈 왕녀라.

잔잔하게 가라앉았던 세이블의 눈에 서늘한 빛이 감돌았다.

결코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무려 일국의 왕녀인 데다가, 아델리움에서 무척이나 사랑받는 존재니까.


‘하지만 다른 주인공 후보들도 결코 만만치 않을 거란 게 문제지.’

특히 지금까지 남은 사람들은 모두 ‘소멸’이라는, 룰이 바뀌는 바람에 주어진 그 잔인한 페널티를 피해 살아남은 자들 아닌가.

만약 그런 후보들이 모두, 샬로네즈가 자신의 이름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격분해 그녀에게 칼끝을 겨눈다면…….


‘틀림없이 곱게는 못 죽겠지.’

자신만 해도 아까 영상석에 나타난 화면을 본 순간 저 왕녀를 가만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직접 나서지 않아도 날고 기는 후보들이 알아서 대신 처리할 테니, 로렐라에게 이보다 더 좋은 상황은 없었다.

그녀는 눈을 들어 맞은편에 앉아 있는 로렐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길게 늘어뜨린 붉은 머리를 손으로 살짝 갈무리하던 그녀가, 시선이 마주치자 생긋 웃어 보였다.

단아하면서도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모습이었으나, 세이블의 눈에는 마치 발톱을 숨긴 채 앉아 있는 맹수 같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로렐라 님과 친구…… 같은 관계가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요.”

세이블은 드물게 속마음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그러자 로렐라가 재미있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친구면 친구지, 친구 같은 관계는 또 뭐야.”

하지만 그것도 잠시.

로렐라는 웃음기를 싹 지우고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세이블. 그래서 너는 이제 어떻게 하고 싶어?”

그 말에 세이블은 잠시 생각하다 나직하게 말했다.


“솔직히 저는 주식 경쟁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원래부터 복수가 목적이었고, 이젠 그걸 이루었죠.”

무감하리만치 담백한 어투였다.


“하지만 그런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 여자는 저를 적으로 간주하겠죠. 아주 성가셔요. 귀찮기도 하고요. 게다가 위험하기까지. 저는 그런 요소를 굳이 남겨 두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세이블의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섬뜩하게 날이 서 있었다.


“게다가 바이올렛 영애에게는 예전에 가문의 일로 신세를 진 적이 있어요. 물론 그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원수를 대신 갚아 주겠다는 거창한 약속까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녀가 알면 기뻐할 작은 복수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죠.”

세이블은 입술을 천천히 끌어 올렸다.

변함없이 아름답고 부드러운 미소였지만, 어쩐지 칼날처럼 서늘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복수는 제 특기니까요.”

눈보라 같은 목소리에 귀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 * *

카셀이 보내 준 호위들은, 그저 ‘유능하다’는 말로는 모든 걸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눈빛은 잘 벼린 칼이라도 품은 듯 날카로웠고, 행동은 마치 유령처럼 은밀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체 어디까지 퍼져 있는지 한계를 가늠할 수 없는 연락망은 나조차도 다시 한번 놀랄 정도였다.

길드에 관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런 내게 그들은 오히려 태연하게 세실리카뿐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의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고 했다.

원하는 건 뭐든지 알아봐 줄 수 있으니 명령만 내리라면서.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샬로네즈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가 왕국의 불안한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머나먼 신전을 향해 길을 떠난 것도.

푹신한 길드의 소파에 앉아 길드원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열심히 읽어 내려가던 나는, 순간 놀라서 손을 멈췄다.


“……그 영험하다는 신전이랑 사그랑 별궁이랑 엄청 가깝잖아?”

그러자 카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폭발 사고가 났던 지점과도 멀지 않아. 아, 폭발물로 어떤 마도구를 썼는지도 나와 있어.”

카셀이 평소 누누이 말하던, ‘대륙에서 검은 뱀 길드가 모르는 정보는 없다’라는 말이 뭔지 비로소 실감이 났다.

그저 내 신변을 지켜 주는 호위가 필요하다고만 말했을 뿐인데, 카셀이 이렇게 발 벗고 나서 주는 이유는 아마도 ‘나를 해치려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겠지.


“걱정하지 마, 누나.”

아니나 다를까.

두 눈이 마주치자마자, 카셀이 밝게 웃었다.


“누나한테는 그 누구도 손끝 하나 댈 수 없을 테니까.”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고마워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보고서를 다시 마저 읽어 내려갔다.


“흐음, 아델리움에서는 요동치던 민심이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고…….”

“일단 더 이상 실종자가 발생하지 않고 있으니까. 아델리움 왕실에서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이게 다 왕녀의 기도가 효험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대대적으로 알리려나 봐.”

실종자가 늘지 않았던 건 샬로네즈가 잠깐 위너드에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 분명했다.

하지만 실패했으니 다시 시작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더 이상 실종자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녀의 칼끝은 나를 향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어떡할까.’

나는 잠시 보고서를 내려놓고 생각에 빠졌다.

다른 후보들에게 영상석을 보낸 건, 당연히 샬로네즈의 숨통을 조이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다른 주인공 후보들의 귀에 자신이 저지른 악행이 흘러들어 갔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다른 주인공 후보들이, 자신이 나중에 죽이려 했던 후보들이 역으로 공격해 온다면?

당연히 혼란에 빠지겠지.

물론 아델리움 왕실은 보안에 철저하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물리적인 방법으로 샬로네즈에게 접근하는 게 쉽진 않겠지만……. 후보들 역시 갖은 수를 써서 샬로네즈를 없애려 할 것이다.

특히 한두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 공격을 한다면 제아무리 샬로네즈라도 힘겨울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까지 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아델리움 왕국은 바로 코앞에 있는 공원 같은 곳이 아니니까.

엄청난 실력자들로 구성된 호위까지 도처에 깔아 놓았으니, 설령 후보들이 움직이기 전에 샬로네즈가 칼을 들이밀더라도 충분히 대비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샬로네즈에게 조금이라도 시간을 줘서는 안 돼.’

샬로네즈는 아주 간교한 사람이다. 약간의 틈이라도 보이면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른다.

결심을 마친 나는 다시금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마침 내 눈이 닿은 곳에는 ‘아델리움의 요동치던 민심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함’이라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그렇다면 이걸 조금 이용해 볼까?

내가 만난 샬로네즈는, 주인공 후보를 죽이는 것만큼이나 완벽한 왕녀로서의 모습을 몹시 중요하게 여기는 여자였으니까.


“저기, 카셀.”

“응, 누나.”

“시드라는 사람 좀 불러 줄래?”

나는 아까 그가 ‘밥버러지들이 죽었나 살았나 확인하러 간다’며 툴툴대고는 방을 나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그 밥버러지들이 누군지도 이미 당연히 알고 있다.

바로 나를 습격했던 해적들이었다.

카셀은 내 말에 바로 고갯짓을 해 보였다. 그러자 길드원 한 명이 밖으로 잽싸게 달려 나갔다.

잠시 후.

나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 채 울부짖는 몇몇 사람들을 만나 볼 수 있었다.


“자, 잘못했습니다.”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그동안 다들 어떤 고생을 했는지,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눈도 퀭하고 안색도 창백한 게, 내일 곧 죽을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다라……. 정말이에요?”

“정말입니다! 여기서 눈이라도 뽑아 증명하라 하면 바로 그렇게 해 보이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욱 격렬한 반응이었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장 아델리움으로 돌아가세요. 그리고 바로 자수하세요.”

“……네?”

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그들은 멍청하게 눈만 끔뻑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곳 사람들을 붙여 감시할 거니까 허튼수작을 할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예요.”

“허, 허튼수작이라니요! 자수할 겁니다. 하고말고요!”

“맞습니다! 이 지옥에서 탈출해 안락한 아델리움의 감옥에서 일평생을 보낼 수만 있다면……!”

동료를 따라 두 손을 싹싹 빌던 해적이 말을 하다 말고 찔끔 놀라 입을 다물었다.

시드가 그를 향해 방긋 웃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그, 그보다…….”

그 둘과는 달리, 아까부터 줄곧 아무 말도 없던 마지막 남자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어떻게 자수하면…… 될까요?”

“있는 그대로 하시면 돼요. 레이나 아벤도트라는 여자가 시키는 대로 로렐라 메이레드를 공격했다고.”

나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상냥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또 이렇게 덧붙여 주세요. 레이나 아벤도트는, 아무래도 그동안 일어났던 모든 실종 사건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고 말이에요. 그리고 마지막엔…….”

남자는 멍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두 눈을 끔뻑였다.


“그런 레이나 아벤도트도 더 높은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 같다는 말로 끝내죠.”

“…….”

“어렵지는 않죠? 이게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 같은데, 어때요? 해 보시겠어요?”

나는 그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무, 물론입니다. 반드시……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해적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두려움에 굳어진 얼굴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길드에서 돌아오는 길.


“로렐라.”

나 홀로 타고 있던 마차에 조용히 한 남자가 나타났다. 오늘도 역시 너무 멋있고, 아름답고, 근사하게 차려입은 위너드였다.

그의 얼굴을 보니 또다시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내 강렬한 시선을 느꼈는지, 위너드의 눈 밑이 살짝 붉어지는 게 보였다.

나를 마주 보며 매력적인 미소를 머금은 것도 잠시, 낮게 헛기침을 한 그가 입술을 열었다.


“아까 해적들한테 자수하라고 했잖아. 레이나 아벤도트의 사주를 받아 널 공격했다고.”

“응.”

“그런데 그녀가 모든 실종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든지,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하라고 한 건 어째서지?”

어느새 살그머니 내 손을 잡은 위너드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해적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라 그다지 신빙성은 없을 텐데. 기껏해야 소문이 퍼지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을까.”

“그래서야.”

나도 그 손을 맞잡으며 대답했다.


“그래서라니?”

“바이올렛 영애의 부모님들은 물론, 다른 실종자들의 가족들까지 다들 작은 단서라도 잡아 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잖아. 그런 상태에서 레이나 아벤도트의 이름이 거론되면 어떻게 되겠어?”

그 말에 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위너드의 눈빛이 곧바로 바뀌었다.


“바로 샬로네즈의 이름을 흘리는 것과는 상황이 다르겠군.”

“맞아. 처음부터 샬로네즈의 이름이 나오면 정말 뜬소문에 그치고 말 거야. 어차피 해적들 입에서 나온 근거 없는 소리라고 일축해 버리면 그만인 데다가, 어쨌거나 왕실은 마지막까지 건드릴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거든. 하지만 아벤도트 가문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위너드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종자들 또한 죄다 쟁쟁한 가문 출신이니, 그들이 힘을 합하면 아벤도트 가문을 탈탈 터는 건 일도 아닐 거야. 난데없이 벼락을 맞은 아벤도트 가문도 협력할 수밖에 없겠지. 아니면, 억울한 누명이라고 생각해 오히려 적극적으로 조사를 돕기 위해 나서거나.”

나는 무심코 잡은 손을 깍지꼈다. 맞닿은 손바닥이 점차 따끈해지는 게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물론 샬로네즈는 모든 증거를 완벽하게 은폐하라고 지시했을 거야. 하지만 레이나는 이미 이 세상에 없고, 샬로네즈는 정말로 레이나가 그렇게 했는지 점점 의심스럽고, 불안해하겠지. 샬로네즈 같은 사람들은 보통 자기 외에는 다 못 믿잖아.”

“……그렇군.”

“사람들은 레이나를 사주한 높은 사람이 누구일까에 대해 멋대로 떠들어 댈 테고, 온 나라가 또다시 벌집 쑤신 듯 시끄러워지겠지. 빨리 로렐라 메이레드를 어떻게 해 버려야 하는데, 움직이기가 녹록지 않으니 짜증 나서 견딜 수 없을걸.”

그 왕녀가 씩씩거리는 모습을 떠올렸더니 그만 웃음이 흘러나왔다.


“여하튼 샬로네즈는 당분간 시끄러운 나랏일에 정신이 팔려 있을 테니, 시간 벌기엔 그야말로 제격이지 않아?”

“…….”

위너드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쩐지 이상해서 그를 향해 고개를 든 순간.

아까보다 확연히 붉어진 얼굴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두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는 다시금 헛기침을 하더니,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왜?”

나를 봐주지 않는 게 불만스러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나 왜 안 보는데, 응?”

“…….”

하지만 위너드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대답 대신, 얼굴만 점점 더 새빨갛게 변할 뿐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