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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화. 적어도 게임의 규칙은 공평해야지 (150/173)


150화. 적어도 게임의 규칙은 공평해야지
2022.12.07.



 
길드에 ‘그녀’가 찾아왔단 이야기에, 카셀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거의 나는 듯이 응접실을 향해 달려갔다.


“누나!”

벌컥 문을 열어젖힌 그의 얼굴 위로, 반가운 미소가 한가득 떠오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몹시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었으니까.


“카셀, 안녕.”

로렐라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언제 보아도 심장을 떨리게 만드는 예쁜 미소였다.


“잘 있었어?”

“응!”

카셀은 만면에 웃음을 가득 머금으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 모습이 마치 애교를 부리는 커다란 짐승 같았다. 아주 예쁘고 위험한 은빛 털을 가진 짐승 말이다.


“이걸 돌려주려고.”

로렐라가 가지고 온 핸드백에서 붉은 공단 자루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위너드가 빌렸던 마도구가 들어 있었다.


“덕분에 큰 도움이 됐어. 고마워.”

그것을 말없이 받아 든 카셀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투명한 붉은 구슬 같은 눈동자를 마주 쳐다본 것도 잠시. 로렐라의 얼굴에 적잖은 당황이 서리기 시작했다.


“왜, 왜 그렇게 보는 거야?”

“왜 이걸 누나가 돌려주러 온 건가 해서.”

카셀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태도였지만, 눈빛만큼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그, 그냥 직접 얼굴을 보며 인사하고 싶어서…….”

로렐라는 마치 잘못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카셀은 위너드를 수상쩍게 여기는지라 둘을 자꾸 만나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온 건데, 왜 이렇게 죄인 같은 기분이 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로 잘 마무리된 거 맞아? 감히 누나를 해치려는 사람이 있었다며.”

“뭐?”

로렐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위너드가 마도구를 빌리는 게 쉬웠을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았지만, 설마 이런 말까지 했을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두루뭉술하게 얼버무리는 것으로는 카셀을 납득시키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절대로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이야기까지 오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왜 나한테는 말 안 해 줬어? 설마 그 자식한테는 말할 수 있고……. 나한테는 말 못 할 일이야?”

날카로운 추궁과는 달리, 카셀의 얼굴에는 서운한 기색이 가득했다.


“아,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로렐라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그의 소매를 잡아 얼른 자신의 옆에 끌어 앉혔다.


“너무 급한 일이라 그랬어.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네 도움이 필요해.”

“도움……?”

“응.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호위 인력을 좀 구해줄 수 있을까.”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24시간 빈틈없이 돌아가며 호위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로.”

그 말에 장식장 근처에 기대어 서 있던 남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아무에게도 보이진 않지만, 사실은 로렐라가 여기서 홀로 차를 홀짝일 때부터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던 위너드였다.

자신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으니, 샬로네즈도 분명 가만히 있진 않을 터였다. 그러니 그녀에게 맞서려면 몸을 지킬 수단부터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야 제대로 된 반격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호위라는 건…… 단순히 지키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란 소리네?”

카셀도 로렐라의 뜻을 금세 눈치챈 듯싶었다.


“맞아. 여러모로 ‘실력자’들로 꾸리고 싶어. 가능할까?”

그녀의 입가에 평소와는 다른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위너드는 어쩐지 그 모습에 더욱더 가슴이 뛰었다.


“당연하지. 제대로 찾아왔어. 대륙을 통틀어 우리를 능가할 사람들은 없으니까.”

길드장 녀석도 아주 물 만난 고기처럼 활기차기 그지없었다.


“시드를 비롯해서 다른 길드원들을 소집해 줄게. 누나가 바라는 모든 걸, 최대한 자세히 이야기해 줘.”

자신들은 비싸다는 둥, 조건이 까다롭다는 둥 온갖 헛소리를 해 가며 제 앞에서 뾰족하게 굴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위너드는 그런 카셀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입술을 부드럽게 끌어 올렸다.

눈엣가시 같은 녀석이었는데, 지금은 저 애송이가 로렐라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퍽 다행스러웠다.

‘안내자’라는 신분 덕분에, 자신의 힘만으로 그녀를 지키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까.


“아, 참! 누나한테 이걸 말하는 걸 깜빡했네.”

그때, 카셀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안경이 든 주머니를 잽싸게 집어 들었다.


“내가 실은 여기에 대단한 걸 넣어 놨는데 말이야.”

두 눈을 빛내며, 의기양양한 웃음을 흘리는 걸 보니 무언가 자랑하고 싶은 게 남았나 보다.


“대단한 거라니?”

“안경 줄에 몰래 이걸 달아 놨거든.”

안경을 꺼내 든 그가 손에 쥔 금빛 줄 끝에는 반짝이는 보석 하나가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뭐지?

지켜보고 있던 위너드도 의아한 시선으로 보석에 집중했다.

안경을 빌려 썼을 때부터 달려 있던 거였다. 그냥 장식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이게 뭐야?”

로렐라가 관심을 보이며 카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게 뭐냐면 말이야…….”

그러자 놈은 때를 놓치지 않고 로렐라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짜잔! 바로 영상석이지!”

영상석?


“그때 그놈이 보았던 광경이 이 돌 안에 그대로 남아 있을 거야.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꺼내서 볼 수 있어. 또 원하는 대로 지우거나, 따로따로 남기는 것도 가능해.”

길드장 녀석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영상석이 뭔지는 위너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걸 왜…… 달아 놓은 거지?


“하지만 녀석이 이걸 빌리러 왔을 때는, 이런 게 달려 있다고 말해 주지 않았어. 그 자식을 신뢰할 수 없었거든.”

문득 차오른 궁금증을 뒤로 밀어 놓은 채, 위너드가 실소를 흘렸다.


“어때 누나? 나 잘했지?”

과장된 동작으로 쉴 새 없이 애교를 부리는 애송이 녀석의 모습 때문이었다.

이젠 화가 나기보단 다소 안쓰럽기까지 했다. 아무리 저렇게 용을 써도 그녀의 마음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가 있지 않은가.

바로, 내게로.


“그 자식이 이게 다 ‘누나를 위해서’라곤 했지만, 거짓말일 수도 있으니까. 오히려 누나를 배신하려는 속이 시커먼 자식이면 어떡해.”

“아, 아니. 그건 아닐 거야…….”

말도 안 되는 음해에 로렐라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당황한 듯 보였다.

서로의 마음이 통한다는 건 아주 굉장한 일이 틀림없었다. 이젠 애송이의 저런 노력이 눈물겹다 못해 귀엽기까지 하니.


“아, 여기엔 목소리도 전부 흡수되어 있다? 영상석을 달아 놓았을 줄은 몰랐을 테니, 분명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했을 거야.”

그래, 아주 하찮아서 귀여운…….


“지금 한번 들어 볼래? 그 자식이 뭐라고 지껄였는지.”

귀여…….


‘……뭐?’

내내 여유로웠던 위너드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주인공 후보가 어떻고, 안내자가 어떻고 하는 기밀을 애송이 녀석이 알게 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아니, 그것도 물론 큰일이긴 하지. 그렇긴 한데……!

내가 뭐라고 그랬더라?!

위너드의 머리가 어느 때보다도 다급하게 돌아갔다. 그때 자신이 무슨 말을 입에 담았는지 빠짐없이 기억하려고 애썼다.

샬로네즈에게 ‘네가 로렐라보다 뛰어날 순 있지만, 내가 징계를 감수하고 얻을 만한 가치가 있어?’라든가 ‘적어도 내 상대라면, 대제국을 다스리는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황제 정도는 되어야지’라는 말을 했었지…….

그걸 떠올리자마자 얼굴이 홧홧하게 불타는 듯했다.

어차피 모두 진심이 아니었다. 샬로네즈 따위는 당연히 로렐라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며, 대제국을 다스리는 아름다운 황제에게도 관심 없었다.

그저 샬로네즈를 자극해 원하는 상황을 만들기 위한 약간의 장치일 뿐이었다.

물론 로렐라도 자신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걸 알아줄 것이다. 그녀는 똑똑하고 눈치가 빠르니까.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런 말을 하는 자신을 그녀가 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음, 그래. 내, 내가 나중에 따로…… 들어 볼게.”

예상대로 로렐라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은 어차피 이해도 할 수 없고 알아서도 안 되는 비밀이 들어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중에라도 따로 듣지는 말아 주었으면 좋겠는데.

……제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길드장 녀석이 입술을 삐쭉 내미는 게 보였다.


“아, 영상석이란 말에 방금 생각난 게 하나 있는데, 혹시 부탁 하나만 더 해도 될까?”

그녀는 다른 부탁을 하는 것으로 그의 주의를 돌렸다.


“당연하지, 누나.”

“정말 고마워, 카셀. 언제나 이렇게 도움받기만 하고, 미안해서 어쩌지.”

“천만에. 제발 앞으로도 사양 말고 팍팍 부탁해 줘.”

카셀은 두 눈을 나른하게 치켜뜨며 살벌한 미소를 흘렸다.


“누나 곁에 있는 해충이란 해충은 다 처치하는 게 내 사명이니까.”

 

 
저 애송이 자식이 진짜.

위너드는 손등에 힘줄이 불거질 정도로 거세게 케인을 꽉 쥐었다.

물론 놈이 말한 ‘해충’이란 로렐라를 해치려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에 또 다른 은근한 뼈가 느껴지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니겠지.

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로렐라 어깨에 기댄 채 머리카락을 갖고 장난을 치는 둥 마구 애교를 피우고 있었다.

애써 지키려 노력했던 평정심이 다시금 흔들렸다. 위너드는 짜증스러운 손길로 얼굴을 쓸었다.

황태자로 지내 온 날들을 포함한 그의 인생 전체를 통틀어, 카셀 베스페라는 역시 가장 없애고 싶은 놈이었다.

* * *

길드에 다녀온 이후로도 나는 카셀과 여러 차례 접촉했다. 호위 말고도 또 의뢰했던 일 때문이었다.

오늘은 약속대로 세이블이 찾아왔다. 길드에서 돌아오자마자 보낸 전갈을 받고는 급히 달려온 듯했다.

모든 일을 제치고 가능한 한 빨리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써서 보냈으니까.

그런데도 응접실 소파에 홀로 앉아 있는 세이블의 얼굴은 살짝 피로감이 묻어 있는 것 외에는 평소와 똑같았다. 무슨 일인지 무척 궁금할 텐데도, 여전히 차분하기 그지없는 모습이 우아하게 느껴졌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 지금껏 알게 된 이야기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믿고 의지할 만한 친구니까.

세이블은 흔들림 없는 자세로 내 말을 경청해 주었다.

이야기가 모두 끝난 뒤, 다소 놀란 기색이었던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가만히 읊조렸다.


“샬로네즈 왕녀…….”

언제나 정적이고, 차가운 느낌의 세이블이지만 오늘은 한층 더 서늘한 분위기를 풍겼다.

순간 밀려든 한기에 나도 모르게 목덜미를 문지를 정도였다.


“후보 명단을 손에 넣어 차례로 후보들을 죽여 왔다니.”

그녀의 눈에 고요한 분노가 서렸다. 입 안에 차오른 씁쓸함을 삼키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블은 감정을 내비치는 일이 적었다. 그녀가 이런 분노를 보이는 데는, 아마 바이올렛 영애가 큰 영향을 미쳤겠지.

그저 지인 사이라곤 했지만,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는 세이블이 일부러 소식을 좀 알아봐 달라며 내게 특별히 부탁했을 정도였으니까.

지인이 같은 후보였다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후보라는 이유만으로 샬로네즈 왕녀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당연히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러 생각이 들지만, 우선 로렐라 님의 의견을 듣고 싶군요.”

마음을 가라앉혔는지, 세이블이 잔잔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나는 그 말에 곧장 조그만 주머니 여러 개를 꺼내 들었다.

어제 카셀에게 부탁해 받아 온 영상석들이었다.


“이건…….”

“그날 있었던 일의 일부를 잘라 내 담아 봤어. 아, 세이블 네 것도 있으니까 줄게.”

나는 겉에 ‘세이블’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주머니를 살짝 굳어 있는 그녀의 손에 얼른 쥐여 주었다. 그러고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인원수대로 만드느라 큰돈 썼다고.”

세이블이 작게 웃고는 조심스레 주머니를 열었다.

그 안에서 반짝거리는 하얀 보석을 꺼내 손에 올려놓은 그녀가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볍게 건드렸다.

아무래도 그녀는 이미 ‘영상석’의 사용 방법을 알고 있는 듯했다.

곧 손톱만 한 작은 돌에 희미한 빛이 서리더니, 이내 검은 연기가 장막처럼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위로 무언가가 일렁거리며 나타났다.

바로 샬로네즈 왕녀가 창을 띄우는 장면이었다.

세이블은 다시 돌을 건드려 영상을 멈췄다.

그러고는 확연히 커진 두 눈으로 샬로네즈 왕녀의 창과 그 안에 뜬 자신의 이름을 들여다보았다.

명단 속에는 다른 후보들 이름도 적혀 있었지만, 그 부분은 일부러 흐릿하게 해서 식별할 수 없도록 손을 좀 보았다. 명확하게 보이는 건 오로지 세이블 이름뿐이었다.


“이건…….”

그녀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이블은 한참 만에 영상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이미 내 의도를 짐작한 듯했다.


“다른 후보의 이름까지 다 보일 필요는 없잖아. 중요한 건, 누군가가 내 이름이 적힌 명단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니까.”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주머니를 살짝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로렐라 님. 정말 다른 후보들에게 그걸 보낼 건가요?”

“응. 익명으로 보낼 거지만……. 아마 눈치 빠른 사람은 금세 알아차릴 거야. 이걸 보낸 누군가가, 일부러 다른 후보의 이름을 지우고 보냈다는 걸. 나는 또 다른 변칙을 허용할 생각은 없어. 물론 내가 악용할 생각도 없고.”

세이블이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작게 끄덕였다.


“샬로네즈는 이미 후보가 누군지 다 아는데, 정작 다른 사람들은 샬로네즈의 존재를 모른다면 너무 억울하잖아.”

“그걸 알게 되면 아마도 누군가는……. 아니, 어쩌면 모두 샬로네즈를…….”

평소처럼 냉정한 목소리였지만, 세이블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적어도 게임의 규칙은 공평해야지.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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