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그런 후보가 있을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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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그런 후보가 있을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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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그런 후보가 있을 거 같아?
2022.11.26.
카셀이 낮게 코웃음 쳤다.
“마음대로 들이닥친 것도 모자라, 마도구를 달라고?”
“소중한 사람이 관련된 일이니까.”
위너드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를 바라보는 카셀의 붉은 눈동자에 묘한 이채가 서렸다.
어쩐지 숨 막히는 광경에, 시드가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카셀은 여전히 짐승과도 같은 눈빛으로 위너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셀이 저럴 때면 그와 평생을 함께해 온 시드조차도 어깨를 움츠렸다. 그는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제압할 수 있다는 걸, 카셀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남자는 시선을 피하긴커녕,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카셀과 눈을 맞췄다.
정말 대단한 강심장이었다.
아니면 세상에 무서운 게 없거나.
시드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남자가 한 말을 곱씹어 보았다.
내가 보는 광경을 상대방도 볼 수 있게 만드는 마도구.
그거라면 분명히, 예전에 카셀의 명령으로 로렐라 메이레드에게 빌려줬었지.
나중에 그 안경을 회수한 것도 자신이었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그걸 세이블 릴리가 가지고 있었던 것까지 전부.
그런데 이 남자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을까? 설마…… 그때 고원에서도 같이 있었나?
시드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그사이, 카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입술 사이로 느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미안하지만 우린 상당히 비싸.”
그러고는 책상 위로 두 다리를 꼬아 올리고는 깍지 낀 두 손에 머리를 기댔다.
“게다가 조건도 상당히 까다롭거든.”
평소와 다름없이 예쁜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은 꽤 심술궂어 보였다.
그러자 위너드는 기다렸다는 듯 망토 안자락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윽고 그가 꺼내 든 것은, 제법 두둑해 보이는 가죽 주머니였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테이블 위로 주머니를 툭 던졌다. 가벼운 움직임치고는 상당히 묵직한 소리가 났다.
“엇.”
깜짝 놀란 시드와는 달리 카셀은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부르는 대로 줄 테니 원하는 가격을 말해.”
“…….”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위너드가 주머니 하나를 더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 아까보다 훨씬 크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이래도 모자라나?”
이쯤 되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시드가 테이블 근처로 조심조심 다가가 재빠르게 주머니를 낚아챘다.
첫 번째 주머니에는 세피로의 금화가 들어 있었다. 아주 먼 옛날, 금빛 용을 잡아 대륙의 평화를 지켰다는 세피로 마법사가 직접 찍어 냈다는 그 금화.
몸에 지니고 있기만 해도 온갖 악운을 물리쳐 준다는 전설이 있어 내로라하는 유명한 수집가들은 물론, 황실에서도 구하려고 안달이 난 물건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주머니는 각종 보석으로 가득했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커프스 단추, 사파이어로 장식한 세련된 목걸이, 피처럼 붉은 루비 브로치를 비롯한 온갖 장신구가 들어 있었다.
잠깐, 이 반지에 박힌 건 뭐지? 자수정은 아닌 것 같은데…….
두 눈을 멀게 만들겠다는 듯 엄청난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보석이었다. 엄지손톱만 한 크기는 물론이고, 소름 끼칠 정도로 완벽한 세공이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카펠의 오른팔이자 길드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그조차 한눈에 알아볼 수 없는 보석이라니.
이거 예삿일이 아니구나.
시드는 급히 양손으로 머리를 싹싹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위너드의 곁으로 다가가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고객님.”
“…….”
“귀하신 분이 누추한 저희 길드에 방문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 당장 차를 내오겠습니다.”
위너드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시드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하…….”
짜증 난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쉰 카셀이 시드를 향해 매섭게 축객령을 내렸다.
“나가.”
“카셀! 내, 내 말을 좀 들어 봐. 응?”
“나가라고.”
결국 시드는 카셀이 부른 길드원들의 팔에 의해 연행되어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갔다.
방 안에는 다시 두 사람만 남았다.
카셀이 턱을 괸 채 위너드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소중한 사람이라는 게 누나를 말하는 거야?”
“그래.”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대답이었다. 카셀이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 올렸다.
이것 봐라. 아예 숨길 생각도 안 하네.
세상에서 가장 꼴 보기 싫은 연적을 향한 온갖 적개심이 끓어오르려던 찰나였다.
위너드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를 해치려는 사람이 내게 접근해 왔어. 그런데 그 사실을 말할 수가 없어.”
“……왜?”
왜 말을 못 한다는 거지? 카셀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우연히’ 안경을 통해서 본다면 괜찮을 거야. 아슬아슬해도 선을 넘은 건 아니거든.”
대체 뭐라는 거야?
“물론 내가 왜 그런 행동을 벌였는지 판단하는 건, 그녀의 몫이겠지만.”
“…….”
이래서야 대답은커녕, 혼자 헛소리를 늘어놓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확실히 이것만은 알겠다. 저 유들유들한 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는 것.
비장하다 못해, 서늘한 한기가 느껴질 만큼 날 선 기운이 그의 저변에 가득했다.
위너드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카셀이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바로 했다.
카셀은 ‘감’이 좋은 사람이었다. 한 번도 일을 그르친 적이 없을 만큼.
그런 그의 감이 지금, 무언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었다.
“……좋아.”
그는 손을 내려 책상에 있는, 자신만이 손댈 수 있는 서랍을 열고는 그 안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빌려줄게.”
선심 쓰듯 말하며 가볍게 던지자, 위너드가 공중에서 주머니를 바로 낚아챘다.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 여유를 부리긴 했지만, 내심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카셀이 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름다운 은발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뭐, 내가 준 물건으로 환심을 얻는 것도 좋지.”
천사처럼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심술궂은 목소리와 짓궂은 미소는 여전했다.
“아니, 그 반대야.”
위너드는 그런 카셀을 향해, 마찬가지로 근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뭘 얻으려는 게 아니라, 내 모든 걸 걸었다니까.”
* * *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한 고요한 새벽.
밤새 울던 귀뚜라미 소리마저 사라진 대신전의 뒤뜰에 작은 발소리가 이어졌다.
샬로네즈는 조용히 한 발, 한 발을 내디뎠다. 이슬 머금은 축축한 잔디를 밟을 때마다 진한 풀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새벽녘의 차가운 공기는 숨을 선득하게 만들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정신이 더욱 깨는 느낌이었다.
어젯밤, 남몰래 행렬의 뒤를 밟게 한 부하에게서 벨레드리안의 태황제 부부가 황궁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드디어 약속한 날이 다가온 것이었다.
……한데 그가 정말 나타나 줄까?
아까부터 머릿속을 맴돌던 불안한 물음이 또다시 떠올랐다.
샬로네즈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서 주위 풍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감하고 서늘한 눈빛이었지만, 마음속에는 어느덧 초조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주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금 발을 내딛으려던 그때였다.
“이런. 내가 기다리게 했나?”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새 근사한 남자가 앞에 서 있었다. 뒤늦게 불어온 바람이 백금색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고 지나갔다.
“그렇다면 미안하군.”
가볍게 웃는 모습에, 샬로네즈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아닙니다. 황태자 전하.”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게 웃으며 예를 갖춰 인사했다.
“와 주셨군요.”
그러자 당연한 소릴 한다는 듯 위너드가 환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샬로네즈는 저도 모르게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오늘 황태자는 처음 만난 날보다 한층 더 근사했다.
값비싼 금사로 화려한 수를 놓은 새하얀 정복이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재킷의 루비 단추와 맞춘 듯한 붉은 실크 크라바트는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게다가 그는 일전에는 보지 못했던, 얇은 금줄이 달린 모노클까지 끼고 있었다.
혹시 시력이 안 좋은 걸까? 하지만 눈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는데. 안경알 자체가 아주 얇은 걸 보면, 그냥 장신구인 것 같기도 했다.
어쩐지 꼭 자신을 만나기 위해 더 신경을 쓴 것처럼 느껴졌다.
그 생각에 심장이 시끄러울 정도로 거세게 두근거렸다.
“그래서…… 제 제안은 생각해 보셨나요?”
“물론이지.”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해도 될까요?”
기대로 가득한 샬로네즈의 말에 위너드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전에 궁금한 게 있어. 괜찮다면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데.”
궁금한 거라니, 이제 와서?
불안이 살짝 고개를 들이밀었지만, 샬로네즈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녀는 위너드의 곁으로 다가가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새초롬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걸으면서 이야기할까요?”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대답 대신 잠시 주위를 둘러본 위너드가 그녀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여기 앉아서 이야기하지.”
뒤뜰 구석에 놓인 테이블 앞이었다.
서로 마주 보고 앉을 수 있게끔, 나무 벤치가 테이블을 가운데 둔 채 양옆으로 놓여 있었다.
“저런 걸 달고 산책이라니. 내내 뒤를 따라올 거란 생각만으로도 영 으스스해서 말이야.”
샬로네즈가 뒤를 돌아보았다. 위너드의 말대로, 어느새 라그가 나타나 있었다. 이번 역시 부른 적이 없는데도.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라그의 태도에 샬로네즈의 얼굴 위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짜증이 서렸다.
이제 라그는 그녀를 위해 희생했던 안내자가 아니라, 귀찮고 성가신 방해꾼이나 다름없었다.
날카로운 적대감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샬로네즈를 앞에 두고, 위너드가 갑자기 재킷을 벗어 들었다. 그러더니 그걸 벤치 위에 깔고는 그녀에게 앉으라는 듯 눈짓했다.
“어머나, 전하.”
“아침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았으니까.”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만큼이나 값비싼 옷일 텐데.
“감사합니다.”
이토록 탐나는 남자가 친절하게 대해 주다니. 샬로네즈는 저도 모르게 두 뺨을 붉히며 벤치에 앉았다.
라그 때문에 곤두섰던 신경이 가라앉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궁금하신 게 무엇인가요?”
하지만 맞은편 자리에 앉은 위너드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샬로네즈는 재촉하지 않고, 안경 너머 눈동자에 가만히 시선을 맞췄다.
“안내자 배정 말이야.”
이윽고 위너드가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목소리를 낮췄다.
“안내자는 보통 시스템이 배정해 주거든. 잘 맞을 것 같은 사람으로. 하지만 나처럼…… 직접 선택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
의외의 말에 샬로네즈는 조금 놀랐다. 세상에, 황태자가 그런 보잘것없는 여자를 선택했다고?
그 와중에도 위너드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내가 로렐라를 버리고 널 선택한다 쳐. 그럼 징계는 피할 수 없을 거야. 마음대로 후보를 바꾸는 행위를 시스템이 용납하지 않거든.”
“어차피 주인공이 되는 건 저예요.”
샬로네즈는 눈을 내리깐 채 속삭였다.
“만약 징계를 받는다고 해도, 곧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어요. 전하가 그토록 바라던 것을요.”
“하지만 네게는 이미 안내자가 있으니 불가능한 일 아닌가?”
“……그 역시도, 제 안내자가 사라지면 문제없죠.”
조곤조곤하게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라그는 이미 심각한 규칙 위반으로 무거운 징계를 받았다. 만약 한 번만 더 규칙을 어긴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야.”
위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당 후보의 안내자가 이미 사라지고 없다면, 후보를 바꾸겠다 선택할 수는 있지. 단 어느 정도의 징계는 감수해야겠지만.”
이제 다 왔다고 느낀 샬로네즈가 밝고 환하게 웃어 보이던 그때였다.
“그런데 내가 너 말고 다른 후보에게 갈 가능성은 생각해 보지 않은 모양이네.”
“……네?”
“사실이 그렇잖아.”
그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물론 네가 로렐라 메이레드보다 뛰어날 순 있겠지. 일국의 왕녀니 신분상으로도 당연히 우위이고. 하지만 세상에 후보가 얼마나 많은데, 과연 그중에서 네가 제일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나? 정말로 내가 징계를 감수하고서라도 널 얻을 만한 가치가 있어?”
“…….”
“솔직히 말할게. 아델리움의 왕녀라는 신분도 내겐 딱히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아. 후보 중에는, 대제국을 다스리는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황제가 있을 수도 있잖아? 적어도 내 상대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더 나은 후보로 갈아탈 마음은 있지만, 그게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건가?
“어차피 로렐라 메이레드가 주인공이 될 수 없다면, 그래서 징계 받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다른 후보에게로 가야 한다면, 난 최대한 안전한 쪽을 택하고 싶거든.”
샬로네즈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가 바닥에 내팽개쳐 짓뭉개 버린 자존심이 그녀의 가슴 한쪽을 고통스럽게 찔러 왔다.
“후보 중에…… 대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위너드는 절대로 그런 후보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그런 후보가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명단을 갖고 있으니까!
“그래. 주인공 후보 중에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나?”
그러나 위너드가 다시 한번 그 말을 입에 담는 순간, 그녀는 참지 못하고 시스템 창을 띄웠다.
눈앞의 커다란 화면에서 흘러나온 빛에, 위너드의 안경알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