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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화. 마음에 들어 (146/173)


146화. 마음에 들어
2022.11.23.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갈색 머리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이미 사방이 어두워진 뒤인데도, 깊은 광산에서 캐낸 에메랄드 같은 눈동자는 영롱하게 반짝였다.


‘이 사람이 벨레드리안의 진짜 황태자…….’

가까이에서 본 위너드는, 단순히 잘생기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가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풍경을 근사하게 만드는 분위기조차 갖고 있었다.

지금도 팔짱을 끼고 가만히 서 있는 것뿐인데 주변이 마치 전혀 다른 세상처럼 보였다.

상상 속에서 줄곧 그렸던 것보다 훨씬 더 근사하고, 빛이 났다.

샬로네즈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왕궁 구석진 곳에 갇혀서, 저주 때문에 중병에 걸렸다고 철석같이 믿으며 자라 왔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무사히 스무 살 생일을 맞이하시면 저주가 풀릴 거예요. 그때가 되면, 늠름하고 아름다운 벨레드리안 황태자님이 청혼하러 오실지도 몰라요.’

 
상냥히 웃는 얼굴의 가면을 쓴 시녀들이 속살거리던 말도 아직 귓가에 선했다.

그저 언니를 위한 희생양으로 길러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직전까지, 그녀의 머릿속에서 위너드는 언젠간 자신을 데리러 올 왕자님이었다.

비록 만난 적은 없어도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던 사람이 실제로 눈앞에 있으니,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주인공 후보께서 내게 무슨 볼일이 있는 모양이지?”

위너드가 들고 있던 케인으로 가볍게 땅바닥을 툭, 치며 물었다.

그의 입가에 그린 듯 아름다운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샬로네즈를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살벌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의 태도에선 호의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데도 제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는 사실이 그저 기뻤다.

라그를 이용해 주인공 후보 명단을 손에 넣었을 때도 기쁘긴 했지만, 그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를 옆에 두고 싶다던 바람이 조금 더 확고한 감정으로 변했다. 이 사람을 갖지 못하면 평생을 두고도 후회하리라.

그녀는 거세게 요동치는 마음을 숨긴 채 잠잠히 그를 바라보았다.


“게다가…….”

그때, 또다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벨레드리안의 황태자라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마치 무거운 돌덩이가 몸을 짓누르는 듯한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샬로네즈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오히려 생긋 웃으며 그를 한껏 치켜세웠다.


“익히 들었던 명성보다 훨씬 더 고귀하고 아름다우십니다.”

위너드가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케인으로 그녀의 뒤쪽을 가리켰다.


“희한한 안내자를 달고 다니는 후보군.”

그 말에 샬로네즈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어느새 부르지도 않은 라그가 나타나 서 있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는지 라그는 두 눈을 무섭도록 치켜뜨고 있었다.

더 이상 팔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딱딱하게 굳은 나뭇가지 같은 걸 덜덜 떨어 대는 게 눈에 들어왔다. 덕분에 안 그래도 형편없는 몰골이 더욱 추레해 보였다.

그의 말대로 ‘저런 것’ 따위가 자신의 안내자라니. 수치스러웠다.

그녀에게 라그가 자신을 돕다가 저렇게 됐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잊은 지도 오래였다.


“허락도 없이 모습을 드러내다니. 건방지구나, 라그.”

“하, 하지만 샬로네즈 님. 저자는……!”

라그는 억울하다는 듯 샬로네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저자? 너 따위가 감히, ‘저자’라고?”

차가운 목소리가 쏟아졌다. 기묘한 광채가 서린 두 눈도 평소와는 달랐다.

라그의 눈동자에도 핏발이 섰다. 온몸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듯했다.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내가 당신을 위해 어떤 희생을 치렀는데!


“그나저나, 내 질문에 답할 생각은 없는 건가?”

그러는 사이 위너드가 샬로네즈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두 사람이 으르렁거리거나 말거나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물어봤어야 할까?”

베일 만큼 날이 선 시선과 달리,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소름이 돋았다.

그의 손엔 아무것도 없었는데도 날카로운 칼날이 목을 겨누고 있는 듯, 사나운 공기가 그녀를 옥죄었다.

마른침을 삼킨 샬로네즈가 그를 향해 생긋 미소 지었다.


“그럴 리가요, 전하. 다만 지금부터 제가 해 드릴 이야기가 전하의 귀에 어떻게 들릴지, 조금 염려될 따름입니다.”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몇 번이고 재차 깨닫는다. 그러나 그럴수록 오히려 샬로네즈의 머릿속은 또렷해졌다.

라그의 이글대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런 것 따윈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그녀는 어차피 제게 아무 짓도 하지 못한다. 후보에게 위해를 가하는 건 안내자에겐 동반 자살이나 마찬가지니까.


‘지금에만 집중하자.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허무하게 망칠 수는 없어.’

“제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전하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믿으시겠어요?”

여태껏 싸늘한 웃음 외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위너드가 한쪽 눈썹을 슬쩍 위로 들어 올렸다.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저는 쌍둥이 언니를 살리기 위한 제물로 바쳐졌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비록 죽기 전까지 왕궁에 갇혀 지냈지만, 황태자 전하의 드높은 명성은 제가 있는 곳까지 들려왔답니다.”

위너드는 눈빛은 여전히 서늘했다. 하지만 샬로네즈는 그가 무섭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저는 모든 기억을 간직한 채 죽음을 맞이했고, 그 후 다시 깨어났을 땐 언니인 샬로네즈가 되어 있었어요. 시간은 이미…… 수개월이 훌쩍 지나 있었고요. 그사이 전하에게도 큰일이 닥쳤던 거겠죠.”

위너드는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샬로네즈는 조용히 말을 이어 갔다.


“제 기억 속 벨레드리안의 유일한 적통 후계자는 분명 위너드 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죽고 언니의 몸으로 다시 깨어나 보니, 에르헨이라는 자가 적통 후계자라 불리는 것도 모자라 결국엔 황제가 되었더군요.”

그 이름이 나오자 위너드가 아주 작게나마 몸을 움찔거렸다.


“저는 내내 갇혀 지냈던 터라 그자에 대해선 자세히 모릅니다. 하지만 제 신하들은 물론, 심지어 아바마마조차도 뒤바뀐 황태자를 눈치채지 못하시더군요. 이상한 나머지 벨레드리안 제국에 갔을 때 직접 위너드 전하에 대해 수소문해 보았으나…….”

“잠깐.”

줄곧 말없이 듣기만 하던 위너드가 처음으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 이후, 벨레드리안에 간 적이 있다고?”

“네.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지 않아 사절단 대표로 임명되었습니다. 태황제 부부는 물론, 수많은 황실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지요. 하지만 ‘그 누구도’ 전하를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그녀는 일부러 ‘누구도’라는 말에 살짝 힘을 주었다.

그 말에 위너드의 입술이 가볍게 비틀렸다.

찰나였지만 그의 얼굴 위로 수만 가지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샬로네즈는 한시도 놓치지 않고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조용히 미소 지었다.

어설픈 거짓을 꾸며 내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예상대로 잘 먹힌 듯했다.

사절단 대표로 간 것은 사실이었다.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사람들에게 위너드에 관해 은밀히 떠본 것 역시도.

샬로네즈 왕녀의 몸으로 깨어난 뒤 많은 걸 얻게 됐다. 그러니 그토록 꿈에 그리던 벨레드리안의 위너드 황태자를 얻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흔적도 없이 아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가 누군지도 몰랐다. 그 사실에 얼마나 경악했던가.


‘이 세상에 그를 기억하고 있는 건 나뿐이었다니.’

아주 로맨틱하고 운명적으로까지 느껴졌다.

그녀는 말을 마친 동시에 대담하게 손을 뻗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매끄러운 뺨을 유혹하듯 쓸고 지나갔다.


“전하가 잃어버린 걸 반드시 되찾아 드리겠어요. 그러니…….”

샬로네즈가 손을 내려 그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위너드는 순순히 몸을 굽혀 주었다. 은은한 백단향 향기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

발끝을 살짝 든 샬로네즈가 입술을 열었다. 뒤에 서 있는 라그에게 들리지 않도록, 아주 작은 목소리로.


“제 안내자가 되어 주세요, 전하. 한 나라의 왕녀이자, 이 세계의 주인공인 저만을 위한 안내자가요.”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옷깃을 유혹하듯 매만졌다. 아찔할 정도로 달콤한 목소리는 마치 아름다운 뱀의 혀처럼 귓가를 휘감았다.


“전하는 전남편을 피해 도망친, 한낱 백작 가문 출신의 후보 곁에 계시기엔 너무 아까운 분이세요. 게다가 주인공은 이미 저로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랍니다.”

“자만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나? 로렐라 메이레드 말고도 아직 후보가 많이 남아 있을 텐데.”

위너드 또한 샬로네즈를 따라 목소리를 낮췄다. 어투는 여전히 딱딱하기 그지없었지만, 어쨌거나 반응을 보여 주었다는 게 중요했다. 그녀의 입술이 더더욱 짙은 호선을 그렸다.


“맞아요. 하지만 그래도 저를 이길 순 없을 거예요. 뭐, 이제 몇 명 남아 있지도 않고요.”

그 순간 위너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째서일까.

‘몇 명 남지 않았다’는 말에, 줄곧 바이올렛 영애 실종 사건을 캐던 로렐라의 모습이 떠오른 건.


‘……설마.’

물론 가볍게 넘길 수도 있는 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은 후보보다 탈락한 후보가 더 많아진 건 사실이니까.

그러나 아델리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의문의 실종들과, 로렐라를 습격했던 레이나 아벤도트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일, 거기에 줄곧 의구심을 갖던 로렐라의 표정까지.

모든 것이 하나하나 떠올라 뇌리를 가득 메운 그 순간.


‘이 여자야.’

이 여자가 실종 사건의 범인이야.

마치 커다란 벼락이 몸에 내리꽂히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위너드는 그 자리에 입을 꾹 다물고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전하처럼 멋지고 훌륭하신 분이 기억에서 잊히고 모든 걸 빼앗긴 것도 안타까운 일인데, 하필이면 허무하게 죽을 후보의 안내자까지 되셨으니…….”

진심으로 통탄할 일이라는 듯 그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더욱 멀게만 느껴졌다.


“그렇군.”

위너드는 그녀의 손을 잡고는 가볍게 떼어 냈다. 여전히 입가에 근사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생긴 것과 달리 야심만만한 왕녀님이네.”

그뿐만 아니라 마치 잡아먹기라도 할 듯 살벌했던 눈빛 또한 어느새 한결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샬로네즈는 짐짓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혹시 야망이 큰 여자는…… 싫으신가요?”

“싫을 리가.”

즉답이 떨어졌다.


“아주 마음에 들어.”

시원하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입술에서 도무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샬로네즈의 심장이 또다시 거세게 뛰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두 분을 볼모로 삼은 건 도가 지나치군.”

그러나 언제 웃어 주었냐는 듯 냉랭한 음성이 떨어졌다.


“만약 그분들이 다치기라도 했다면 절대로 가만있지 않았을 거야.”

폭발이 일어난 자리를 흘끗 돌아본 위너드의 얼굴 또한 다시금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부모님이 신변의 위협을 받았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벨레드리안 태황제 폐하와 태황후 폐하께 무례를 저지른 점, 부디 용서해 주세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전하를 뵐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샬로네즈는 다시 한번 깊게 허리를 숙였다. 사과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건데도, 태도는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흠잡을 곳 없는 예법이었으나, 사실 그녀는 조금 긴장한 상태였다. 그의 행동과 눈빛에서 숨기지 못한 노기가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 제의 자체는 꽤 마음에 들어.”

마음을 졸이던 샬로네즈는 그 말에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위너드의 표정이 또다시 싹 바뀌어 있었다. 정말이지 사람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는 남자였다.


“단, 대답은 태황제 부부께서 황궁으로 무사히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난 뒤에 하지.”

샬로네즈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혹시 그사이 로렐라와 무언가를 작당하려는 건 아닐까?

그러나 그녀는 곧 의심을 거두었다.

안내자에게는 ‘다른 후보의 비밀을 발설해선 안 된다’ 라는 규칙이 있으니까.


‘누구보다 그걸 잘 알고 있을 테니, 섣불리 무모한 짓을 저지르진 않겠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듣던 대로 그가 눈치도 빠르고 무척이나 똑똑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 아마 지금쯤 머릿속으로는 계산이 다 서 있을 것이다. 누가 봐도 자신과 손을 잡는 게 유리하니, 어떤 선택을 할진 불 보듯 뻔했다.

그녀는 두 눈을 사악하게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전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비로소 만족했다는 듯, 내내 야속하게 굳어 있던 황태자의 입술에 엷은 미소가 서렸다.


“두 분이 황궁에 무사히 들어가시는 순간, 찾아가도록 하지.”

그는 그 말만 남긴 채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 동시에, 눈앞의 미남자는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 * *

한편 그 시각, 세실리카의 수도 외곽에 있는 한 건물 아래에서는 처절한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빛은커녕 바람조차도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지하 복도에는 좁은 방 수십 개가 자리 잡고 있었다.

검은 뱀 길드의 감옥이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점점 가까워지는 인기척을 느낀 죄수 한 명이 철창을 잡고 흔들며 마구 울부짖었다.


“여기서 꺼내만 주신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자는 얼마 전 잡아 온 해적 중 하나였다.


“쯧, 쯧.”

이윽고 철창 앞에선 남자가 죄수를 바라보며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바로 카셀의 오른팔인 시드였다.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못한 거야?”

시드는 방긋 웃는 낯으로 물었다.

그러자 해적이 얼른 다시 안쪽으로 기어들어 가 나머지 동료들 틈에 박혔다.

이 남자가, 감옥의 주인인 카셀 베스페라만큼이나 잔혹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 밥만 축내는 버러지들을 계속 살려 둬야 하나……?”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시드가 한숨을 푹 쉬며 무자비한 말을 늘어놓았다. 어둠 속에서 눈만 내놓고 있는 해적들이 소리 없이 사지를 떨었다.

하지만 카셀이 언젠가 쓰임새가 있을지 모르니 살려는 두라고 지시한 이상 별수 없지, 뭐.

‘언젠가’ 쓰임새가 있을지도 모른다니.

그런 불확실한 이유로 안 그래도 좁아터진 감옥의 한자리를 내준 것도 모자라 죽지 않게 밥까지 주고 있다는 게, 시드로서는 영 불만이었다.


“하여튼 그 여자만 관련되었다 하면 아주 길드 기둥뿌리까지 뽑아서 바칠 기세라니까.”

시드는 투덜대면서도 꼼꼼히 감옥을 한번 살핀 뒤, 다시 끝도 없는 계단을 올랐다. 이래서 감옥 점검은 하고 싶지 않은데. 지하 깊숙이 위치한 탓에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한참이나 쉬지 않고 오른 끝에 겨우 카셀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하, 힘들다.”

밭은 숨을 내뱉으며 조심스럽게 문을 노크했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카셀?”

시드는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그러자 비로소 대답이 들려왔다. 그런데 어쩐지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카셀, 왜 그래? 무슨 일 있…….”

이상한 기색을 느낀 시드가 얼른 문을 열어젖힌 그때였다.


“어……?”

그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소파에 웬 고급스러운 옷차림의 남자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다, 손님이 올 거라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아!”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시드가 손가락질하며 크게 외쳤다.


“카셀의 원수!”

갈색 머리카락에 녹색 눈, 그리고 지나치게 잘생긴 저 얼굴! 그래, 틀림없었다.


“원수라니.”

그 말에 남자가 마뜩잖은 듯 눈썹을 찡그렸다.


“오늘은 정식으로 의뢰를 하러 온 거야. 손님으로 대해 줬으면 좋겠는데.”

“의뢰라니……. 저, 저희 길드에요?”

시드가 묻자, 남자가 그림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듯이.


“너희들, 재미있는 마도구를 하나 가지고 있던데.”

“마도구는……. 네, 많지요. 많긴 한데…….”

정말 손님으로 온 듯한, 그의 당당한 모습에 시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가 필요한 건 안경알로 만들어진 마도구야.”

위너드가 앞으로 상체를 숙였다.


“그걸 나눠 끼면 내가 보는 광경을 상대방도 볼 수 있다지?”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게 필요해.”

그동안에도 카셀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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