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만나 뵙길 고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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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만나 뵙길 고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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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만나 뵙길 고대했습니다
2022.11.19.
아름다운 호숫가를 따라 여러 대의 마차가 쉼 없이 달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하얀 말 네 필이 끄는 마차였다. 그 안에는 벨레드리안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부인,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오?”
태황제의 물음에 아까부터 미동도 없이 줄곧 창밖만 쳐다보던 태황후가 그제야 생긋 미소 지으며 돌아보았다.
“……별궁에서의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마침 부인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오. 참 즐거운 시간이었지.”
태황제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서렸다.
“모두가 극진히 대접해 주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레이디 로렐라가 마련해 주었던 티파티가 기억에 남는군.”
“저도 그렇습니다, 폐하. 숨겨진 방이라니, 굉장히 즐겁고 독특한 발상이었지요. 게다가 어쩐지…… 무언가 특별한…….”
태황후는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그날 이후 종종 이렇게 말을 하다가 갑자기 골똘히 생각에 잠기곤 해 측근들의 걱정을 샀다.
그러자 곁에 앉아 있던 태황후의 전담 시녀, 레티아노 백작 부인이 대신 입술을 열었다.
“극진한 대접에서 두 분을 생각하는 마음이 느껴졌답니다. 태황제 폐하와 태황후 폐하의 품격을 느낀 게 틀림없습니다. 저희 모두가 그러하듯이요. 분명 세실리카의 특사들도 같은 마음이었겠지요.”
“하하, 빈말이어도 기쁘군.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소, 백작 부인.”
“빈말이긴요. 이 모든 게 두 분의 높으신 은덕…….”
그녀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이던 그때였다.
콰앙!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굉음과 함께 마차가 거칠게 흔들렸다.
“아악!”
창문에 거세게 부딪힌 백작 부인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아!”
“화, 황후!”
마찬가지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휘청거리는 태황후를 태황제가 급히 잡았다.
가까운 곳에서 돌이 굴러떨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말이 거칠게 투레질하는 소리와 함께 기사들의 다급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경계 태세를 갖춰라!”
“귀빈들을 살펴라! 어서!”
창백해진 얼굴의 백작 부인이 가파르게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두, 두 분 괜찮으십니까?!”
백작 부인의 이마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조차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때, 마차로 달려오는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태황제 폐하, 괜찮으십니까!”
호위를 책임지고 있는 단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체 무슨 일인가!”
태황제는 노기 섞인 목소리를 내뱉으며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단장이 경직된 목소리로 답했다.
“위쪽 기슭에서 폭발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산사태가 일어나 길을 모조리 막았습니다.”
투구에 가려 알아보기 어려웠으나, 그도 적잖이 당황했다는 게 여실하게 느껴졌다.
“……폭발이라고?”
태황제는 아연실색하여 되물었다. 폭발이라니, 설마 황족을 시해하려는 시도인가? 습격이 이어지는 건 아닐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바로 태황후였다.
비록 입술은 떨리고 있었지만, 맑은 녹색 눈동자에는 어느새 침착함이 담겨 있었다. 덕분에 태황제는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다친 사람은?”
“떨어진 파편에 맞거나, 말에서 떨어진 병사가 있긴 하나 큰 부상은 아닙니다.”
빠르게 상황을 보고한 단장이 말을 이었다.
“호위를 제외한 이들이 사태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마차에서 나오지 마시고 안에서…….”
하지만 태황제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폐, 폐하……!”
단장은 물론이고, 주변을 경계하던 병사들이 놀라서 외쳤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쑥대밭이 된 주위를 자세히 살폈다.
앞은 물론이고, 이미 지나온 길 위에도 커다란 바위와 부러진 통나무들이 가득했다. 그뿐만 아니라 뒤쪽의 마차 두어 대의 지붕이 부서진 것도 눈에 들어왔다.
크게 다친 사람이 없다는 것이 천운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태황제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여기저기 움푹 팬 땅 밖으로 나무뿌리들이 흉측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 외에도,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듯 위태롭게 매달린 주먹만 한 돌들이 보였다
누군가 폭발을 일으켜 계획적으로 길을 막았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대체 왜?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태황제는 상념은 뒤로 밀어 놓고 다급히 명령했다.
“일단 모든 마차와 말을 길 가장자리로 이동시켜라. 낙석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태황제는 말을 마친 동시에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커다란 바위가 가로막은 뒤쪽과는 달리 그나마 앞은 사정이 나았다. 길을 막고 있는 나무 몇 그루와 작은 바위만 치우면 움직일 수 있을 듯했다.
“앞쪽의 장애물을 치우는 데 주력하게. 마차가 지날 수 있을 정도의 공간만 만들면 빠르게 벗어나도록 하지. 낙석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 최대한 빠르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다. 다들 알겠나?”
“명 받들겠습니다.”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도 중요하지만, 병사들의 안전도 조심하게. 어떻게 될지 모르니, 다치지 않는 걸 최우선으로 삼도록.”
“네!”
위엄 서린 지시에 화답하듯, 씩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록 일선에서 물러났다고는 하나, 태황제는 여전히 근엄하고 존경받는 군주였다.
한결 냉정해진 병사들이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갑작스레 벌어진 초유의 사태에 경악한 것은 세실리카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엉망으로 무너져 내린 기슭과, 커다란 바위에 가로막힌 길이 눈에 들어온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탄식을 토해 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다행히 아직 마차의 파편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건너편 상황을 확인할 수가 없으니, 무작정 안심할 수만도 없었다.
마음과는 달리, 병사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말에서 내렸다. 거대한 암석과 통나무 따위가 길을 완전히 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매섭게 소리쳤다.
“당장 비켜라!”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 선발대를 따라잡은 레어넌이었다.
“다들 최대한 멀리 떨어지도록!”
그는 말에서 거의 뛰어내리다시피 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길을 막고 서있는 바위를 향해 검을 휘두른 순간, 눈 부신 빛과 함께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어넌 단장이 거친 숨을 토하며 물러섰다. 동시에 바위가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몇 차례 더 팔을 휘두르자, 커다란 바위는 이내 사람이 충분히 들어서 옮길 수 있을 만한 크기로 조각났다.
그의 이마 위에는 구슬땀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레어넌은 지체하지 않고 다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뿌리째 뽑혀 쓰러져 있는 나무를 향해서였다. 성인 두 명이 팔을 뻗어도 다 안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나무였다.
속속들이 도착한 성기사단원들이 그를 도왔으나, 레어넌을 능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레어넌이 휘두른 칼에 커다란 나무며 돌 모든 게 산산조각이 났다. 덕분에 산더미 같은 잔해들 아래 매몰되어 있던 길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단장님, 이제 저희가 하겠습니다. 성력을 이렇게 소모하면 큰일 나십니다!”
레어넌이 지닌 능력은, 몸 안의 내력을 끌어다 쓰는 힘이었다. 그걸 쉬지 않고 남발하면 신체에 무리가 오는 게 당연했다.
그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을 텐데도 쉬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어떤 내색도 하고 있지 않지만, 레어넌의 안색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파리했다. 결국 기사들이 그를 말리기 위해 달려든 그때였다.
“저도, 저도 돕게 해주세요!”
다급하게 말을 멈춘 로렐라가 뛰듯이 내려 그들 쪽으로 달려왔다.
상황을 들을 생각조차 없는 듯, 그녀는 기사들을 지나쳐 가타부타 말도 없이 맨손으로 잔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가시가 잔뜩 박힌 나뭇가지와 뾰족한 돌이 가득한데도, 그녀는 조금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어찌나 다급하고 절박한 기세인지, 아무도 말리긴커녕 다가설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로렐라……!”
희고 고운 손은 금세 엉망이 되었다. 기사들의 만류에 물러났던 레어넌이 그들을 뿌리치고 그녀에게로 황급히 다가갔다.
“그만하십시오! 이러다가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하지만 로렐라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 일도, 아무런 일도 없어야만 해. 절대로……!”
주변의 만류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하얀 손이 금세 흙투성이가 되었다. 곱게 손질 된 손톱 사이로 옅은 피가 비쳤다.
무언가 이상했다. 레어넌은 걱정과 불안이 어린 눈으로 로렐라를 바라보았다.
물론 특사로서 귀빈을 걱정하는 마음은 잘 알고 있다. 당장 자신만 해도 그들을 위해 정신없이 말을 달려 왔으니까.
게다가 태황제 부부는 무척이나 자상하신 분들이고, 존경할 점도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은 분들이다.
그들이 별궁에 머무는 내내 곁에서 보살폈으니, 다정한 로렐라가 마음을 쓰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은…… 어쩐지 그런 태도 이상이었다.
말려도 듣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몇몇 병사들이 나서서 그녀를 돕기 시작했다.
그들은 조각난 암석과 작은 나뭇가지 더미를 치워 낸 뒤, 레어넌이 동강 낸 통나무를 옆으로 굴려서 지나갈 길을 확보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까보다 더 큰 돌덩어리 하나가 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하…….”
병사들의 입에서 안타까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로렐라의 눈에도 절망이 서렸다. 어느새 눈물이 고이는가 싶더니, 두 뺨 위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 눈물을 본 순간, 레어넌의 머릿속에 가득했던 여러 가지 의문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그녀를 안심시켜 주고 싶다는 생각만이 들어찼다.
그래, 지금 저 눈물을 멈춰 줄 사람은 나뿐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로렐라.”
절망에 빠져 주저앉아 있는 로렐라를, 레어넌이 조심스레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녀를 바위에서 멀어지게 만든 뒤, 그는 다시금 검을 고쳐 쥐었다.
“반드시 제가 구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비로소 눈물 젖은 눈이 그를 향했다.
레어넌은 그녀와 시선을 맞춘 채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정신을 집중하여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다, 단장님. 병사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게 어떻습니까?”
“만약 그러시다 큰일이라도 나시면…….”
사방에서 쏟아지는 걱정 어린 목소리가 점차 멀게 느껴졌다. 그러다 결국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된 찰나.
콰앙!
흔들림 없이 내려친 일격에, 거대한 바위가 단번에 수십 조각으로 쪼개졌다.
돌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몇몇 병사들이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을 정도였다.
이윽고 흙먼지 사이로 얼기설기 얽힌 덩굴과 나뭇가지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이쪽을 향해 입을 쩍 벌리고 서 있는 벨레드리안 병사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은 레어넌을 보자마자 길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줄지어 서 있던 마차로 달려갔다.
“폐하! 별궁에서 구조대가 도착했습니다! 레어넌 단장님이 직접 오셨습니다!”
다급히 노크하기가 무섭게 문이 벌컥 열렸다. 그 안엔 태황제와 태황후가 앉아 있었다.
별궁을 떠날 때와 똑같은 모습을 보니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듯했다.
“모두, 무사…….”
레어넌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황급히 입을 가렸다. 거센 기침과 함께 입에서 피가 터졌다.
땅에 박아 넣은 검이 아니었더라면, 볼품없이 땅에 무릎을 꿇었을 정도로 그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단장님!”
가장 가까이 있던 기사가 다급하게 그를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로렐라도 곁으로 급히 달려왔다.
“단장님! 피, 피가……!”
새하얀 장갑과 정복 앞섶을 가득 물들인 붉은 자국에, 그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단장님, 더 이상 힘을 쓰시다간 정말 큰일 납니다! 속히 신관을 불러올 테니 그때까진 절대로 움직이지 말고 계십시오!”
단원은 주위 사람에게 얼른 그를 인계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단장님, 일단 여기에 앉으셔서…….”
몇몇 병사들이 무어라 권유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레어넌의 시선은 오로지 로렐라에게만 향해 있었다.
“……두 분은 무사하십니다.”
레어넌은 힘겹게 숨을 토해 내며 그녀의 어깨를 한 손으로 끌어안았다. 평소답지 않게 묵직한 무게가 실렸다.
“레어넌……!”
위태로운 느낌에 로렐라는 저도 모르게 그의 등 뒤로 팔을 둘렀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힘겹게 미소 짓고 있는 입술 사이로 억눌린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눈물로 젖은 눈 밑을 쓸어 주는 그의 손길은 여전히 자상하고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 * *
능력을 사용해 한달음에 산기슭으로 도달한 위너드는, 폭발이 일어난 장소를 금세 찾아냈다.
그는 움푹 팬 자리에 서서,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기슭의 아래에선 구조 작업이 한창이었다. 사람들은 바삐 움직였고 부산스러워 보였다.
늘 영롱하게 반짝이던 녹색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모든 것을 얼려 버릴 정도로 싸늘한 시선이었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하마터면 부모님이 큰일을 당할 뻔했다. 그 생각에 거센 분노가 솟구쳤지만, 위너드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직 ‘습격’은 끝난 게 아닐지 모르니까.
위너드는 검게 그을린 땅을 짓이기듯 밟았다. 흔적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건 마력을 이용한, 아주 정교한 폭발이었다.
일부러 길의 앞뒤를 막으려 한 건가? 어쩌면 목숨을 노린 게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가 한 건지 알 수도 없고, 목적마저도 불분명하니 찜찜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 뒤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위너드는 어느 때보다도 예리한 눈빛으로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후후.”
수풀 뒤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웃음소리다.
긴장으로 그의 오감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이윽고 작은 발걸음 소리와 함께, 수풀을 헤치고 새카만 로브를 머리끝부터 뒤집어쓴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첫 만남이 엉망이군요. 무례를 저질러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꼭 만나 뵙고 싶었답니다.”
로브 안에서 차분하면서도 맑은 음색이 흘러나왔다.
“……넌 누구지?”
위너드는 고저 없이 담담한 음성으로 조용히 물었다. 하지만 그의 저변에는 어느 때보다도 살벌한 공기가 가득 내려앉았다.
그 서늘한 분위기를 느꼈을 텐데도, 후드 아래로 얼핏 드러난 입술은 호선을 그린 채였다.
“만나 뵙길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릅니다. 로렐라 메이레드의 안내자님.”
……뭐라고?
생각지도 못한 말에 위너드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를 더욱 놀라게 한 말은 다음에 이어졌다.
“아, 이런. 실례했습니다. 그런 하찮은 직함으로 불릴 분이 아니신데……. 다시 한번 정식으로 인사 올리겠습니다.”
여자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공손히 예를 갖춰 인사한 후 천천히 고개를 든 그녀가 양손으로 후드를 젖혔다.
“대벨레드리안 제국의 황태자 전하.”
아름다운 백금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바로 샬로네즈 왕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