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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내가 무슨 소원을 빌 줄 알고? (144/173)


144화. 내가 무슨 소원을 빌 줄 알고?
2022.11.16.



“하아, 하.”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방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리, 언제나처럼 깨끗하게 정리된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방 안에 놓인 하얀 침구 위로 주홍빛 노을이 가득 번졌다.

유달리 손끝이 야문 하녀가 완벽하게 주름을 잡아 묶어 놓은 캐노피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은은한 라벤더 향이 코끝에 스쳤다.

……잠깐, 바람?

나는 급히 눈을 돌렸다. 발코니로 향하는 여닫이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하늘거리는 레이스 커튼 뒤로, 난간에 기대어 서 있는 인영 하나가 비쳤다.

그쪽으로 재빨리 뛰어가 발코니로 나서자, 턱을 괸 채 먼 곳을 바라보던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 왔구나.”

쾌활한 미소는 물론, 다정함과 장난기를 동시에 담은 눈빛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미안. 생각할 게 조금 있어서, 오는 줄도 몰랐네.”

하지만 역시,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생각에 빠져 인기척도 못 느끼는 일은 지금껏 없었던 것 같은데.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위너드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두고 돌아서야 했던 그의 마음을 생각하니, 어쭙잖은 위로를 건넬 수가 없었다.


“왜 그래?”

말없이 있는 내가 이상했는지, 난간에 비스듬히 기댄 채 서 있던 위너드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으, 응……?”

“무슨 생각을 하길래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로렐라.”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던 모양이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검지로 내 미간을 가볍게 문질러 주었다.


“그냥 네 기분이 어떨지 생각하느라…….”

“내 기분?”

“응.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네 부모님이, 그러니까 태황제 폐하 부부께서…….”

나는 애꿎은 드레스 자락만 구기다가 머뭇머뭇 입술을 열었다.


“잠깐이지만 너를 알아보신 듯했거든.”

“그래, 그런 것 같아.”

위너드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부모님을 앞에 두고서 아무 말 못 하고 그저 돌아설 수밖에 없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안 좋았을까 해서.”

“아, 그런 생각을 했구나.”

그는 작게 웃더니, 내게로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고개를 들자, 황후 폐하와 똑같은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붉은 노을이 아름답게 스며 있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하지만 마음이 안 좋긴커녕 오히려 기뻤어.”

“……기뻤다니?”

“비록 주인공이 되는 데 실패해서 흔적조차 사라졌어도, 내 존재 자체가 아예 부인된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입가엔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웃는 얼굴을 보니 안심이 되긴 했지만, 한편으론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그런 나를 눈치챘는지, 위너드가 나직이 덧붙였다.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비록 소멸됐어도 두 분께서 나를 낳고 기른 추억, 그리고 가족으로서 함께 지내 온 시간 자체가 없어진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시스템도 그저 기억을 조작했을 뿐, 과거 자체를 지워 버릴 순 없었던 거야. 그걸 발견했기에 오히려…… 기뻤지.”

차분히 말을 이어 가던 위너드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고마워, 로렐라.”

그는 내 손을 천천히 힘주어 잡았다.


“다시 살아난 이후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어. 다…… 네 덕분이야.”

그는 활짝 웃었다. 진심이 느껴지는 참으로 밝고 환한 미소였다.

그걸 본 순간,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에 휩싸였다.

비록 기억해 낸 건 아니지만, 부모님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다음번에는 반드시 그들의 기억을 되찾아 주겠다는 다짐이 동시에 생겨났다.

내 눈은 어느새 위너드의 얼굴을 홀린 듯 좇고 있었다.

살랑거리는 갈색 머리카락과 선이 곱고 반듯한 이마, 그리고 날렵하게 뻗은 콧대를.

그렇게 찬찬히 살피다 다시 눈을 돌린 순간.


“…….”

나와 마찬가지로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안에 깃든 수많은 이야기가 그대로 마음속에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 같았다.


“고맙다는 인사는 괜찮아. 그저 네가 기뻐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을 뿐이니까.”

나는 위너드의 손을 그 어느 때보다 힘껏 맞잡았다.


“네가 좋아하는 걸 보니, 나도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그, 그래서 말인데…….”

……잠깐,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지?

그러나 이런 의문이 들었을 땐,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앞으로는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해 줄 테니까……!”

“……뭐?”

두 눈을 말없이 깜빡이던 위너드가 멍하게 입술을 열었다.


“지금 뭐라고…….”

그리고 그 역시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미친 나, 죽어라.

견딜 수 없는 민망함에 얼굴이 저절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무슨 프러포즈도 아니고…… 대체 왜 이딴 소리를 지껄인 거야!?


“그, 그러니까 내가…… 널…….”

입을 열면 튀어나올 것처럼 심장이 마구 요동쳤지만, 이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아니. 네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그, 그래! 바로 이거야.


“주인공이 되면 안내자도 소원을 이룰 수 있다며? 그건 바꿔 말하면 내가 널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뜻도 되는 거지……!”

……좋아, 자연스러웠어!

물론 앞뒤가 조금 안 맞긴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지금은 이 난관을 어떻게든 빠져나가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


“로렐라.”

그런데 그때, 위너드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또다시 성큼 다가왔다.

이제 그와 나 사이에는 빛조차 아슬아슬하게 겨우 통과할 정도로 아주 작은 틈밖에 남지 않았다.


“왜, 왜……?”

“……내가 무슨 소원을 빌 줄 알고?”

이윽고 그가 내 턱을 잡고 살짝 얼굴을 들어 올렸다. 아주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손길인데도 고개를 돌리긴커녕,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대로 얼굴이 뚫리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 쏟아졌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애꿎은 뺨만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바라만 보던 위너드가 이윽고 입술을 열었다.


“어쩌면 내 소원은…… 이미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그의 얼굴에 언뜻 스친 행복한 미소를 본 것도 잠시.

나직하게 말을 마친 위너드가 그대로 나를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 것이 아닌 심장 소리가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그 박자에 맞추기라도 하듯 내 심장 또한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 위너드……?”

“……왜.”

당황한 나와는 달리 꽤 천연덕스러운, 그러나 한 박자 늦은 대답이 돌아왔다. 말을 마친 그가 더더욱 나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 역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것일 테다. 왜냐하면 내가 이름을 부른 순간부터 귓가에 들리던 박동 소리가 더더욱 빨라졌으니까.

그의 옷자락을 힘주어 잡자, 그가 팔에 살짝 힘을 풀었다.


“왜 불렀어?”

그러고는 한없이 따듯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머릿속이 텅 비는 느낌이었다.


“…….”

이번에도 대답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그대로 굳은 채 두 눈을 가만히 깜빡였다.

……혹시 나만 이런 걸까.

위너드도 나처럼 빨개졌을까? 아니면 평소랑 똑같을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오로지 그의 얼굴을 보아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고개를 들려고 했지만…….


“아.”

내가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조금 돌린 위너드가 다시 힘을 주어 나를 끌어안았다.


“안 돼.”

최후의 수단으로 몸을 바르작거려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점점 숨만 가빠 왔다.


“글쎄, 안 돼.”

왜 안 되는데!

이쯤 되니 오기가 생겨,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치려던 때였다.


“……내가 실수할 것 같으니까.”

낮은 울림이 가슴을 타고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단단한 흉곽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느껴졌다.


“…….”

나는 결국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고개를 묻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온몸을 잔뜩 경직시킨 힘마저 푼 채로.

힘차게 움직이는 건 이제, 오로지 심장밖에는 없었다.

* * *

어느덧 벨레드리안 손님들이 별궁을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마차가 연석 앞에 도열해 있었다. 맨 앞의 기사가 들고 있는 황실 깃발이 바람에 쉬지 않고 나부꼈다.

조금 쌀쌀하긴 했지만, 그래도 길을 떠나기에 나쁘지 않은 날씨였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워낙 많은 이야길 나누어서일까. 그새 무척이나 친해진 그들이 떠난다는 게 너무나 아쉬웠다.


“즐거운 시간은 정말 너무 빨리 흐르는군.”

“그 말씀이 맞습니다. 야속할 정도예요.”

태황제와 태황후도 서운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렇게 모실 수 있게 되어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나는 예의 바르게, 그러나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태황제와 그의 신하들이 다른 특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사이, 태황후가 내 곁으로 조용히 다가와 손을 꼭 잡았다.


“정말 고마웠어요, 레이디 로렐라.”

다정한 눈이 내 얼굴을 조용히 응시하자, 어찌 된 일인지 심장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괜찮은가요? 얼굴이 좀 빨간 것 같은데.”

“괘, 괜찮습니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니까, 진짜.

태황제도 어느새 곁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고생 많았소. 어쩐지 좀 수척해진 것 같아 미안하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폐하……!”

나는 더더욱 화들짝 놀라 얼른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소원을 빌 줄 알고?’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어제도 밤늦게까지 깨어 있었다는 말은 들었다오. 배웅 준비를 하느라 바빴을 테지. 다시 한번 고맙소. 모쪼록 돌아가서 푹 쉬도록 하시오.”

태황제가 자상한 목소리로 당부를 건넸다.

물론 떠나는 손님들에게 드릴 선물을 확인하느라고 조금 바빴던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잠을 줄일 정도까지는 절대 아니었다.

사실 제가 잠을 설친 건…… 두 분이 아직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두 분의 아드님 때문인데요!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순 없으니까.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리 신세를 졌으니 갚지 않으면 안 되겠지. 그대들을 조만간 벨레드리안 황궁에 정식으로 초대하고 싶소. 그때 꼭 와 주길 바라오.”

“정말 감사드립니다, 태황제 폐하. 꼭 그리하겠습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뵐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진심이었다. 처음엔 오로지 위너드와 만나게 해 주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지만, 직접 만나 보니 배울 점이 아주 많은 분들이었으므로.

다음번에는, 아들에 대한 기억이 돌아온 상태로 뵐 수 있겠지.

……반드시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나는 각오를 다지며 마차까지 그들을 에스코트했다.

이윽고 모든 사람을 태운 마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멀어지는 마차를 향해 세실리카의 호위 기사들이 절도 있게 경례했고, 다른 이들은 크게 허리를 숙였다.

점이 되어 사라지는 마차를 바라보며 또다시 아쉬움이 차올랐다.

위너드도 이 광경을 보고 있겠지?

하지만 첫날처럼 조바심이 나진 않았다. 그가 내게 솔직하게 들려 준 이야기 덕분이었다.

한결 후련한 마음으로 몸을 돌리는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

레어넌이 굳은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엊그제부터 쭉 이런 느낌이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도 하고, 때론 묘하게 불안해 보이는 그런…….


“레어넌 단장님?”

그를 조심스럽게 부르자, 어느새 굳었던 얼굴이 풀어졌다.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내게 다정한 미소를 건넸다.


“고생 많았습니다, 로렐라.”

“아녜요. 고생은 단장님께서 더 하셨죠.”

“우리도 이제 그만 들어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와 나란히 안으로 향했다. 여전히 마음속에는 위화감이 남아 있었지만, 애써 신경 쓰려 하지 않은 채.

잠시 1층에 서서 그동안 우리를 도와주었던 시종들과도 일일이 살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 후에는 진짜로 짐을 정리할 시간이었다.


“두 시간 후에는 출발할 텐데, 혹시 시간이 부족하진 않으십니까?”

“전혀요. 오히려 남을 정도인걸요.”

방문 앞까지 날 데려다준 그의 물음에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짐은 이미 하녀가 다 정리해 놓았기에, 딱히 내가 손댈 것도 없었다.

레어넌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근처에 있는 그의 방으로 향했다.

방은 어느새 내가 여기 처음 들어왔을 때와 똑같은 상태로 정돈되어 있었다. 나는 그대로 안을 가로질러 발코니로 향했다. 울창한 삼림과 맑은 호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티 없이 맑은 수면 위로 쏟아져 내린 햇살은 마치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나는 잠시 난간에 기대어,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았다.

벨레드리안 손님들은 저 사이에 나 있는 하나뿐인 길을 따라 돌아간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쯤 그들도 이와 같은 풍경을 아주 가까이에서 감상하고 있겠지?

그런데 그때.

콰앙!

멀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내가 서 있는 건물에까지 작은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커다란 폭발이었다.


“아!”

깜짝 놀란 나는, 난간 쪽에서 급히 떨어졌다.


“이, 이게 무슨…….”

주저앉지 않으려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준 그때.

폭발이 일어난 곳으로 추정되는 부근에서 검은 연기가 솟구쳤다. 벨레드리안 손님들이 지나고 있을 그 길 근처에서.


“……안 돼.”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절대 안 돼……!”

비명처럼 이 한마디를 외친 것과 동시에 급히 달려가 문을 벌컥 열었다.


“어서 기사들을 불러와! 반드시 전원 구조해야 한다!”

크게 고함치며 내 앞을 지나쳐 급히 뛰어가는 레어넌의 뒷모습이 보였다.


“별궁을 지킬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하면 모두 출발한다. 다들 말을 준비하도록!”

“네!”

여기저기서 기사들의 발소리가 이어졌다. 아름답고 조용했던 별궁 안이 순식간에 지옥처럼 변했다.

나도 그들을 따라 무작정 달렸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는지 혀끝에 피 맛이 났지만, 아픔 같은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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