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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어쩐지 지금 당장 얼굴이 보고 싶어서 (143/173)


143화. 어쩐지 지금 당장 얼굴이 보고 싶어서
2022.11.12.



 
온종일 청명했던 하늘이 점차 옅은 주홍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아래, 높다란 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사그랑 별궁의 자태는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붉은 노을이 새하얀 대리석 위로 스며들어 마치 커다란 보석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래쪽에 비스듬히 뻗은 산기슭은 벌써 어두컴컴하기 그지없었다.

하늘 높이 솟은 울창한 나무 때문이었다.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 좁은 산길은 초입부터 온통 축축한 이끼로 잔뜩 뒤덮여 있었다. 무거우리만치 고요한 정적 속에 간간이 들리는 소리라고는 산새의 날갯짓 소리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검은 망토와 복면을 두른 이들이 말을 타고 숲 쪽으로 향했다. 그들의 뒤로는 별다른 장식이 달려 있지 않은 작은 마차 한 대가 조용히 따라오고 있었다.

행렬은 이윽고 길이 좁아지는 곳에서 멈췄다.

한 남자가 말에서 내려 가볍게 마차의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여기서부터는 마차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가 그의 손을 잡고 내렸다. 아름다운 백금발을 지닌 청초하고도 가녀린 미인, 바로 샬로네즈 델렌느 아델리움이었다.

그녀는 머리에 쓴 커다란 후드를 벗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대신전의 기도실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지만, 그녀는 이미 대역을 세워 두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왕녀의 등장에 주위 사내들이 고개를 숙였다. 아무 감정도 서려 있지 않은 무감한 눈이 그 모습을 조용히 훑었다. 순간 매서운 한기가 사내들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마치 살육을 벌일 준비를 마친 짐승이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그랑 별궁까지는 조금 더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녀는 저 멀리 보이는 별궁을 말없이 응시했다.


“마차로 이동하시면, 이 아래 나 있는 큰 도로로 나가야 합니다.”

분홍빛 입술 사이로 고저 없이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길은 별궁까지 곧바로 이어져 있고?”

“네. 그곳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말에 호박색 눈이 만족스럽다는 듯 휘어졌다.


“유일한 도로라……. 그렇다면 별궁에서 나올 때도 그 길을 이용하겠구나.”

“네, 그렇습니다.”

“좋아, 너희는 여기서 대기하렴.”

“네? 이곳에서요?”

남자가 반문하자 샬로네즈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표는 태황제 부부니까. 일정을 마치고 길을 떠날 때를 노려.”

말을 마치고 다시 마차를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입술이 어느새 아름다운 호선을 그렸다.


‘위너드 루베헨 벨레드리안을 만나려면 방법은 이것뿐이야.’

자신의 안내자인 라그를 시켜 접촉하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녀는 곧 그 생각을 거두었다.

라그라면 어째서 로렐라 메이레드의 안내자에게 접근하려고 하는지, 빤히 눈치챌 테니까.

버려질 게 분명하다 생각할 테니 순순히 협조하지 않겠지.

샬로네즈는 마차에 타기 전,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서 있는 별궁을 흘끗 바라보았다.

로렐라 메이레드에게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나?

아름다운 미소가 떠오른 입술과는 달리, 핏빛 노을을 받아 더욱 선명해진 주홍빛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 * *



“정말 재미있는 하루였어요.”

“근사한 추억을 만들어 줘서 고마워요, 레이디 로렐라.”

“아우레아에서 공수했다는 과자도 정말 맛있었어요. 벨레드리안에 돌아가서도 생각날 것 같아요.”

티 타임이 끝나갈 무렵, 손님들은 앞다투어 로렐라에게 인사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활짝 피어 있었다.

로렐라도 생긋 웃으며 화답했다.


“여러분들이 좋아해 주셔서 저도 무척이나 즐거웠답니다.”

언제든 원한다면 과자를 보내 줄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티 타임이 끝났음에도 쉽사리 떠나지 못하던 사람들은 이대로 돌아가긴 아쉽다며 입을 모았다.

그때 눈치 빠른 하녀 하나가 밖에 예쁘게 노을이 지고 있으니 후원을 산책하시는 게 어떻겠냐 제안했다.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푹신한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걸어 아치형 격자문을 지나는 동안에도 웃음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하녀의 안내를 따라 밖으로 나가자, 색색의 장미가 가득 피어 있는 아름다운 공간이 나타났다.

물론 별궁 앞의 화려한 정원에 비하면 규모는 작았지만, 아기자기하게 가꿔 놓은 후원은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하녀의 말대로 노을이 아름답게 지고 있어, 노을빛을 받아 시시각각 변하는 꽃잎들의 색채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몹시도 아름다운 광경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졌다.

로렐라는 사람들을 따라 잘 꾸며진 산책로를 걸으며, 틈틈이 그들을 살폈다.

위너드가 나간 직후, 다들 아무 일 없다는 듯 즐거운 대화를 이어 갔다.

손님들은 물론이고 차 시중을 들던 하녀들까지, 어딘가 어색하거나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대놓고 말할 순 없어도 태황후가 갑자기 눈물을 흘린 일이나,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던 태황제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낀 사람이 있을 법도 한데…….


‘아무래도 위너드가 능력을 썼나 봐. 자신이 다녀간 걸 기억하지 못하도록.’

이 상황이 이해가 되려면 그것밖엔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한테도 그 능력을 썼을까?’

로렐라는 한 발자국 옆에서 함께 말없이 걷고 있는 태황제 부부 쪽으로 조용히 눈을 돌렸다. 그들도 별다른 일은 없어 보였다.

그 모습으로 보건대 무의식적으로 눈물을 흘린 일 같은 건 전부 잊은 듯했다.

하긴, 자리에 있던 사람 중 두 분이 가장 커다란 동요를 보였으니까. 만약 그때 일을 여전히 기억한다면, 차후 괜한 소동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


‘그래서 또다시 부모님의 기억을…….’

로렐라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순간적으로 울컥 차오른 감정을 삭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이상한 점을 발견해 냈다.

두 사람의 눈빛이 간혹 미묘하게 변한 것이었다.

슬픔에 잠겨 있는 듯 보이기도 했고, 때론 복잡해 보이는 감정이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설마…….’

기억을 지웠어도, 본능적으로 여전히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것일까? 좀처럼 수긍하기 어렵지만, 그렇지 않으면 설명이 안 되는 반응이었다.

로렐라는 흰 장미가 가득 핀 넝쿨 앞에 멈춰 서서 장미 향기를 맡고 있는 태황제 부부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들의 얼굴 위로, 아델리움 왕국에서 만났던 에라주리스 백작 부부의 얼굴이 겹쳐졌다. 딸인 바이올렛을 잃고 비통한 눈물을 흘리던 그들의 얼굴이.

가짜 시한부였던 바이올렛 영애는 주인공 경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목숨을 빼앗겼다.


‘그래서 세이블을 비롯해 부모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거지.’

그러나 그 기억도 주인공이 결정되고 나면 전부 사라질 것이다.

에라주리스 백작 부부 역시 지금은 슬퍼해도, 그때가 되면 틀림없이 딸에 관한 걸 전부 잊어버리겠지.


‘주인공이 정해지면, 후보들은 자신이 존재했던 기억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니까.’

위너드가 그랬던 것처럼.

로렐라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나 비정하기 짝이 없는 규칙이었다. 사랑했던 사람들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못하고 사라져야 한다니.


“폐하, 그리고 여러분. 저는 이만 방으로 돌아가도 괜찮을까요?”

그때, 태황후가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그러자 태황제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많이 피곤한 모양이군. 물론이오.”

로렐라는 재빨리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태황후 폐하. 저녁 만찬까지 아직 시간이 넉넉합니다. 그때까지 푹 쉬시겠습니까?”

“그게 좋겠어요. 폐하도 함께 가시겠어요?”

“그렇게 하지. 먼저 들어가 보겠소.”

두 사람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산책을 다 즐겼는지 함께 돌아가자 나섰다.

지나왔던 복도를 다시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로렐라는 태황제와 태황후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서글서글하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태황제 부부는 형식적인 대답만 할 뿐, 어두운 표정으로 묵묵히 걸었다.

아까는 그저 ‘설마’라고만 생각했던 것이, 어쩌면 정말 맞을지도 모르겠다.

놀라움과 더불어 또다시 여러 가지 감정들이 로렐라의 마음속을 가득 메웠다.

태황제 부부가 머무는 방까지 동행했던 로렐라는 그 뒤 만찬을 준비하는 하녀들을 만나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러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 주랑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바빴다.

비록 약속을 한 건 아니지만, 위너드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었다.

아까 뒤돌아 걸어 나가면서 한 번도 돌아보지 않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생생했다.

……그때 그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참담한 표정을 짓는 아버지와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보고 난 뒤, 어떤 마음을 홀로 끌어안고 있을까?

게다가 저를 알아본 듯한 부모님의 기억을, 다시 한번 제 손으로 지워야 했을 때의 마음은 과연 어땠을까.

그 생각을 하니 어쩐지 지금 당장 위너드가 만나고 싶었다. 꼭 얼굴을 봐야 할 것 같았다.

만약 슬퍼한다면 최선을 다해 위로해 주고 싶고, 그리고…….


“아!”

생각에 빠져 급히 계단을 오르던 중, 로렐라는 그만 누군가와 부딪힐 뻔했다.


“이런.”

사과를 하려 황급히 고개를 든 그녀의 시야로 나직한 웃음소리와 함께 햇살처럼 환하고 다정한 미소가 쏟아졌다.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레어넌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어딜 그렇게 급히 가시는 겁니까?”

그는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얼른 잡아 주며 반갑게 물었다.


“죄송해요, 단장님. 앞을 똑바로 봤어야 하는데…….”

“별말씀을요. 안 그래도 만나러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레어넌은 티 타임이 잘 끝났는지 궁금했다. 그녀가 얼마나 공들여 기획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태황제 부부께서는 별다른 일 없으셨…….”

하지만 레어넌은 말을 하다 말고 황급히 입술을 다물었다. 로렐라에게서 무척이나 조급한 기색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일이 있는 듯하군요. 무언가 급한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아뇨. 급한 문제가 아니라…….”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말과는 달리, 로렐라가 살짝 몸을 비틀었다. 그 덕에 어깨를 잡아 주던 손이 떨어졌다.


“단장님, 죄송해요. 실은 제가 지금 옷이 엉망이라 얼른 갈아입어야 하는데, 이만 가 봐도 될까요?”

“아.”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그럼요. 물론입니다.”

레어넌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러자 무어라 말을 할 새도 없이, 그녀가 급히 달려 나갔다.

탐스러운 붉은 머리가 물결치듯 굽이쳤고, 엉망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드레스가 아름답게 나풀거렸다.

레어넌은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빠르게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인지 따끔거리는 마음 한구석을 애써 외면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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