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소중하디소중한 (142/173)


142화. 소중하디소중한
2022.11.09.



 
손님들을 준비해 둔 공간으로 모시기 전에, 로렐라는 마지막으로 자리를 점검하기 위해 하녀와 함께 주랑을 지나 별궁 안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조금 특별한 공간이 하나 있었다.

금색 손잡이가 달린 문을 열자, 사방이 책으로 가득한 방이 보였다.

창문과 문을 제외한 모든 벽면에는, 마호가니로 만든 이중 책장이 놓여 있었다. 아래쪽에 작은 바퀴를 달았기에, 뒤에 있는 책을 찾고 싶을 때는 손으로 살짝만 밀면 되는 책장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니, 종이 특유의 냄새가 코에 가득 스몄다.

이곳은 별궁에 머무는 동안 무료함을 달랠 수 있도록 만든 작은 도서관이었다.

수천 권의 장서가 보관된 황궁의 장서관과 비교할 바는 못 되지만, 그래도 역사서부터 시작해 추리소설과 로맨스까지 각종 책이 빼곡했다.

이대로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책에 관한 대화를 나눠도 좋겠으나…….

로렐라는 그대로 방을 가로질러 오른쪽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 서 있던 하녀에게 눈짓하자 그녀가 앞의 책장을 벽 끝까지 밀었다. 그러자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빈틈없이 꽂아 놓은 책들이 보였다.

원래 뒤에 있는 책장들은 바닥에 고정해 둔 붙박이 책장들이었다. 하지만 이 책장만큼은 예외였다.

로렐라의 눈높이와 딱 맞는 선반에 작은 금빛 버튼이 튀어나와 있었다.


“여기죠?”

“네, 그렇습니다. 로렐라 님. 직접 해 보시겠어요?”

하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로렐라는 버튼을 눌렀다. 잠금장치가 풀리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버튼 아래의 줄을 잡고 잡아당기자, 커다란 책장이 마치 문처럼 스르륵 열렸다.

이윽고 뒤쪽에 숨겨져 있던 작은 공간이 보였다.

이 안에 숨겨진 비밀의 방이, 오늘의 특별한 티 파티가 열릴 장소였다.

* * *



“어머나, 이런 곳에 문이 있을 줄이야!”

방에 도착한 손님들은 이 조그마한 장치를 보며 즐거워했다. 물론 태황제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감쪽같군. 제법 잘 만든 장치야.”

“문 안쪽엔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로렐라는 태황후 곁에 서서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황후 폐하, 한 번 직접 열어 보시겠어요?”

아까 하녀가 제게 그랬듯이 말이다.

그 말에 황후가 거리낌 없이 손잡이를 잡았다.

책장이 움직이자 눈앞에 어두컴컴한 복도가 나타났다. 위로는 높았으나 옆으로 좁은 복도는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조금 어두우니 조심하세요, 여러분.”

로렐라는 앞장서서 그들을 안내했다. 몇몇 귀부인들은 살짝 겁이 났는지 머뭇거렸지만 황후는 아니었다.


“모험을 하는 것 같아 어쩐지 두근거리는군요.”

그녀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로렐라의 뒤를 따랐다.


“황후. 제발 조심하시오. 좀 더 발밑을 살피며 걸어요.”

거침없이 발을 내딛는 아내가 염려스러운지 황제가 연신 당부를 건넸지만, 그녀는 그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아.”

이윽고 눈앞에 나타난 광경에, 황후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렸다.

어두운 복도와는 정반대로 무척이나 밝고 아름다운 방이었다.

아치형 천장 한가운데에 뻥 뚫린 유리 사이로 눈부신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모서리마다 대리석으로 만든 여신 조각상이 서 있었다.

여신의 손에는 금으로 만든 수반이 들려 있었는데, 그곳에서 계속해서 물이 흘러나와 발아래 움푹 팬 공간으로 모였다.

넓은 방 한가운데에는 분홍 장미로 가득한 화병을 올려 둔 흰색 티 테이블이 보였다.

그 주위로는 키가 큰 이국의 화분 나무들이 자리를 둘러싸듯 늘어서 있었다.

무엇보다 압권인 것은 나뭇가지에 걸어 놓은 보석 박힌 새장이었다.

작은 카나리아 한 마리가 그 안에서 연신 아름답게 지저귀고 있었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마치 다른 세계 같아요.”

“여긴 무슨 용도로 만들어 놓은 방인가요?”

뒤이어 도착한 손님들도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사방을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로렐라가 이런 걸 기획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꾸며진 공간을 직접 본 건 처음인 다른 특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서 앉으시지요, 여러분.”

로렐라의 말에 방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하인들이 다가와 의자를 빼 주었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은쟁반을 든 하녀들이 속속들이 들어왔다. 넓은 방 안이 순식간에 즐거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즐거운 티 타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 * *

책장 속의 방 안으로 향하는 하녀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이어졌다.

가장 먼저 뜨거운 차가 담긴 찻주전자가 들어갔고, 이번에는 특별한 티 푸드가 들어갈 차례였다.

알록달록 아기자기한 색으로 구운 동그란 과자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데다가 보기에도 예뻤다.

차와 함께 먼저 나간 다른 티 푸드와 달리, 차가울 때 먹어야 맛있는 과자라고 해서 지금 나가게 되었다.


“로렐라 님의 명으로 아우레아에서 어렵게 공수한 귀한 과자이니 조심하세요.”

“네, 걱정 마십시오!”

젊은 하인 한 명이 하녀장의 손에서 쟁반을 씩씩하게 받아 들었다.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복도로 들어섰다. 쟁반이 워낙 커서 조금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벽에 부딪힐 정도는 아니었다.

저 끝에서는 연신 도란도란한 이야기 소리가 흘러나왔다. 웃음꽃이 떠나질 않던 손님들 얼굴을 떠올리자 하인의 기분도 좋아졌다.

어떻게 저곳을 티 룸으로 활용할 생각을 했을까?

한가운데가 유리로 되어 있는 천장과 사방에 놓인 조각상들이 아름답긴 하지만 원래는 조금 살풍경한 방이었다.

기도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공간이나 이미 사용하지 않은 지도 꽤 되었다.

물론 책장 뒤편의 비밀 공간이라는 점이 재미있긴 해도, 아이들이 아닌 이상 금세 흥미가 식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곳에 화분을 놓아 달라거나 새장을 걸어 달라고 하더니 저렇게 아름다운 공간으로 만들 줄이야.

다른 특사로부터 황제 폐하가 그녀를 아끼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이유를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어……?”

방에 거의 다다랐을 때 즈음, 하인이 깜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서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누, 누구……!”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려는 찰나, 남자가 손가락을 튕겼다.

하인은 그대로 자리에 서서 두 눈만 끔뻑였다.


“수고했어.”

남자는 그림 같은 미소를 지으며 하인의 곁으로 다가왔다. 화려한 정복을 차려 입은, 미청년이었다.

근사한 옷차림을 보니 아무래도 손님 같은데, 일행 중에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있었던가?


“여기서부터는 내가 들고 들어가지.”

“네……? 그, 그게 그러니까…….”

“기억 안 나나? 레이디 로렐라께서 지시했을 텐데.”

“아!”

하인은 그제야 굳었던 얼굴을 펴고 고개를 끄덕였다.


“참, 그랬었죠. 죄송합니다.”

하인은 남자의 말을 듣자마자 홀린 듯 대답했다. 사실 자세한 이야기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그런 지시를 받았다는 느낌만은 확실히 들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남자의 손에 얼른 쟁반을 넘겨주고는 허리까지 숙였다.

남자는 그런 하인을 등진 채 유유히 멀어졌다.

* * *

한편 방 안의 손님들은 조금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 바다 위에서 사절단과 로렐라가 겪은 일에 대한 것이었다.


“그렇군요. 벨레드리안 황실 쪽에도 소식이 들어갔다니…….”

말끝을 흐리는 로렐라 대신, 태황제가 그 말을 받았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긴 하지만 마침 우리가 운유에 나선 때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황실에선 조금 불안했던 모양이오. 사자와 함께 추가 호위까지 보내고 특별히 조심할 것을 당부하더군.”

“……그랬군요. 실은 지금까지 전혀 말씀이 없으셔서 그 일에 관해서는 모르고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을까? 내게 넌지시 이야길 꺼낼 기회는 무척 많았는데. 로렐라는 조금 의아했다.


“공포와 두려움은 시일이 지나도 마음속에서 쉬이 없어지지 않는 법이지요.”

그 마음을 읽은 것처럼, 태황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레이디 로렐라에겐 그 일이 큰 충격이었을 텐데, 고작 호기심만으로 그 화제를 꺼내는 건 당사자에겐 또 다른 상처가 되지 않겠어요?”

그 말에 다른 황실 사람들도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렐라가 존경 어린 눈으로 태황제 부부를 바라보았다. 벨레드리안의 귀빈들에게서 풍기는 위엄과 기품은, 이들로부터 비롯된 듯했다.

그런데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듣기 좋은 나지막한 목소리가 사람들 사이로 내려앉았다.


“……로렐라 님께서 부탁하신 과자를 가져왔습니다.”

방 안에서 차 시중을 들던 하녀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태황제 부부의 곁에 앉아 있던 로렐라가 차분한 얼굴로 물었다.


“귀한 손님들이 드실 것이니만큼, 특별히 준비한 과자가 있습니다. 잠시 들라 해도 괜찮을까요?”

그러자 태황제 부부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 이렇게 고마울 데가.”

“레이디 로렐라가 특별히 부탁했다니, 무척이나 기대되는군요.”

“감사합니다. 들어오세요.”

말이 끝난 순간, 문이 열렸다.

한 남자가 어둠을 등진 채 밝은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곁에 서 있던 하녀가 반사적으로 그의 손에 들린 쟁반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그뿐, 그녀는 움직이는 것을 잊고 남자의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방 안의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는 찻잔을 쥔 손을 허공에 든 채 굳었고, 누군가는 차를 젓던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무척이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남자였다.

부드럽게 휘날리는 갈색 머리카락 하며 매끈하게 떨어진 콧날과 조각 같은 턱선, 진귀한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녹색 눈동자까지.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정복 밑단을 매만지는 척하며 몰래 손가락을 튕겼다.

하녀들이 그제야 바삐 움직였다.

이윽고 인원수대로 준비한 작은 접시가 사람들 앞에 놓였다.

로렐라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제가 투자한 아우레아의 디저트 가게에서 만든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들의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녀의 성의에 대표로 감사를 표시해야지.

태황제는 그러한 일념으로 입을 열었다.


“틀림없이 맛이…… 아주 좋을, 좋을 것 같은…….”

하지만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여전히 두 눈을 부릅뜬 채, 누군가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을 뿐이었다.


“…….”

테이블을 가로질러 길게 뻗은 햇살 위로, 깊고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내가…… 왜 이러지?’

태황제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과자를 들고 들어온 미청년의 얼굴을 보는 순간부터 그랬다.

혹시 여행으로 피로가 쌓인 걸까? 아니면, 아까 마신 차에 독한 술이라도 들어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저 안개가 낀 것처럼 머릿속이 혼탁했다.

이윽고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바라보는 깊고 그윽한 녹색 눈동자가 살짝 떨린 그 순간.

황제는 저도 모르게 힘주어 주먹을 쥐었다.

분명 처음 보는 청년인데, 어째서 이렇게 아주 잘 알고 있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가.

커다란 키와 늠름하게 벌어진 어깨, 그리고 황후를 빼닮은 이목구비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치 소중하디소중한 것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목숨과 바꿔도 아깝지 않을 소중한 무언가를 말이다.

황제의 눈시울이 서서히 붉어졌다.

동시에 가슴속을 가득 메우는 알 수 없는 슬픔에 코끝이 시렸다.

하지만 어째서 이런 느낌이 드는지 생각하기도 전에, 모든 것이 기억의 뒤편으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아무리 쥐고 또 쥐어 보아도 손 틈새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막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 주름진 얼굴 위로 서렸다.

그런 황제와 한참 동안 시선을 맞추고 있던 남자가 이내 옆으로 천천히 눈을 돌렸다.


“태황후 폐하의 잔이 비었습니다만…….”

단정하게 맞물린 입술 사이로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한 잔 따라 드려도 되겠습니까.”

조심스럽고 예의 바른 태도였지만, 포트를 향해 손을 뻗는 동작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황후의 차 시중을 전담하던 하녀가 급히 나서려 했지만, 로렐라가 조용히 그녀를 제지했다.

어머니의 곁으로 다가간 위너드가 잔 받침을 잡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작은 찻잔에 뜨거운 홍차가 금세 가득 채워졌다.

야속하리만치 향기로운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위너드는 테이블 위로 포트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무언가를 참아내듯 손잡이를 꽉 쥐고 있는 손등 위로 푸른 힘줄이 돋아 있었다.

예전처럼 어깨를 안아 드리거나, 손을 잡아 드릴 수조차 없다.

아프도록 넘쳐흐르는 커다란 그리움을 삭이며, 그저 이렇게 바라볼 수밖에.

하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 감사했다.

아주 가까이에서 부모님의 모습을 눈에 하나하나 아로새기던 위너드는, 이내 조용히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리고 태황제와 태황후를 향해 고개를 정중히 숙였다.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이 한마디만을 남긴 채 천천히 몸을 돌렸다.

문을 향해 걸어 나가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뒤를 따르는 그림자만이 미련처럼 길게 남았을 뿐이었다.

그때, 하녀의 경악에 찬 목소리가 고요를 깼다.


“태황후 폐하……!”

불현듯 황후 쪽을 바라본 로렐라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꼭 깨물었다. 테이블에 앉은 다른 사람들도 놀란 눈을 말없이 깜빡였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은 채 위너드가 나간 쪽을 바라보고 있는 황후의 얼굴이,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놀란 하녀가 다소 허둥지둥하며 깨끗한 손수건을 내밀었다.


“내, 내가 왜…….”

그걸 받아 들며 황후가 밭은 숨을 힘겹게 토해 냈다.


“대체 왜…… 이러는…….”

울먹이며 떨리는 목소리에는 참을 수 없는 슬픔만이 가득했다.

굵은 눈물방울이 그녀의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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