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내가 꿈꾸는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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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내가 꿈꾸는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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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내가 꿈꾸는 미래
2022.11.02.
레어넌 단장의 목소리에 나는 옆을 바라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입매와 가라앉은 눈빛이 들어왔다.
……뭐지?
혹시 나처럼 귀빈들이 도착해서 긴장한 건가.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족과 왕족들을 수도 없이 맞이한 경험이 있는 레어넌이 그럴 리는 없을 텐데.
게다가 그에게서는 긴장으론 설명할 수 없는 무거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 순간 문득 레어넌이 위너드의 얼굴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어쩐지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만났던 후작 사건은 이미 한참 전의 일이었다. 게다가 위너드를 ‘만났다’곤 하지만, 조사를 위해 짧은 문답을 몇 번 나눈 게 전부였다.
그런 그가, 태황후의 얼굴을 보고 바로 위너드를 떠올릴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게다가 위너드는 외출 시종 신분으로 있었으니 높은 신분인 태황후와의 연결고리를 쉽게 생각할 순 없을 텐데…….
그때 천천히 다가오던 우아한 발걸음이 내 앞에서 멈췄다.
“벨레드리안의 태황제 폐하와 태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나는 황급히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고개를 너무 깊이 숙여 모자가 떨어지지는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고개를 드세요.”
명에 따라 굽혔던 허리를 펴니, 은은한 미소를 띤 노부부의 얼굴이 보였다.
특히나 태황후는 내 모자와 드레스를 살펴보곤 활짝 미소 지었다.
“벨레드리안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군요.”
아무래도 내가 입은 옷이 호기심 많은 태황후의 눈길을 끈 모양이었다.
정말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넣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위너드와 똑같은 녹색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반짝거리고 있었다.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태황후 폐하. 저는 메이레드 백작가의 로렐라 메이레드라고 합니다.”
위너드와 닮은 얼굴이 인자하게 미소 짓고 있는 걸 보니 온몸을 짓누르던 긴장도 다소 가벼워진 듯했다.
“벨레드리안 제국에서는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모자까지 갖춰 쓰는 것이 예의라 배웠습니다. 그래서…….”
어쩐지 쑥스러워서 말끝을 흐리던 찰나, 은은한 백단향 냄새가 가까워졌다.
곧이어 하얀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이 내 손을 잡았다.
“벨레드리안에서도 보기 드문, 굉장히 아름다운 드레스와 모자로군요. 그대와 무척이나 잘 어울립니다.”
그녀는 동의를 구하듯 옆에 서 있는 태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도 다정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모두 가까이서 보니 온화하고 자상한 인상이었다. 동작 하나하나에도 기품과 품위가 넘쳐흘렀다.
역시 황족은 황족이구나. 지금껏 많은 귀족을 만나 보았지만, 그들과는 격이 다른 품격이 느껴졌다.
‘위너드랑 정말 비슷한 느낌이야……. 그때 위너드도 시종 옷을 입고 있었지만, 도저히 시종 같지 않아서 당황했었지.’
그래. 이런 부모님 아래에서 자랐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순간 나도 모르게 태황제와 태황후 곁에 서 있는 위너드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질감이 느껴지긴커녕, 상상 속의 그들은 그림으로 그린 듯한 완벽한 가족이었다.
동시에 위너드에게 ‘야, 이 자식!’이라든가, ‘죽인다!’ 따위의 말을 지껄였던 과거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거기다 어깨를 주무르게 하고, 심지어는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기까지 했지.
생각해 보면 일국의 황태자였던 남자에게 꽤 실례되는 행동을 한 거 아냐?!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태황제 폐하, 그리고 태황후 폐하.”
“오랜만이오, 레어넌 단장. 에르헨 황제의 즉위식 이후 처음인가?”
그때, 태황제와 레어넌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그렇습니다. 시간이 정말 빠르군요.”
“하하, 그래도 지나는 시간이 야속하다 생각하지는 마시게. 시간이 흐를수록 세실리카 제국의 보석은 더더욱 눈부신 빛을 발하는 듯하니 말이오.”
차분한 미소를 지은 레어넌은 과찬이십니다, 하고 답하곤 정중히 목례했다. 언제 굳었냐는 듯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다. 태황제도 그런 레어넌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 뒤로 태황제 부부를 보필하는 벨레드리안 제국 귀족들과도 간단한 인사가 이어졌고, 모든 인사가 끝나고 나서야 시종들이 앞장서서 우리를 별궁 안으로 안내했다.
나는 이동하는 내내, 계속해서 레어넌을 곁눈질하며 살폈다.
정중하게 귀빈들을 에스코트하는 그의 태도에서는 아무런 수상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역시 아까 느꼈던 위화감은 별것 아니었던 걸까?
하지만 완전히 마음을 풀 순 없었다. 레어넌은 다른 이보다 유달리 감이 날카로운 사람이니까.
나는 그 사실을 머릿속 깊이 새긴 채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동안에도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마치 화려한 공작새 같은 벨레드리안 손님들은, 내게 유난히 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다행히 다들 내게 좋은 인상을 받은 듯했다. 벨레드리안에는 잘 없다는 붉은색 머리도 많은 이목을 끌었지만, 관심의 중심은 뭐니 뭐니 해도 위너드가 선물해 준 드레스였다.
“이 드레스는 제국에서 직접 공수하신 건가요? 로렐라 님과 너무 잘 어울려요!”
“이렇게 고급스러운 장식은 처음 봐요. 혹시 어느 의상실 작품인지 알려 줄 있나요?”
특히나 벨레드리안의 귀부인들은 드레스를 어디서 샀는지 몹시 궁금해했지만, 대답해 줄 수 없었다.
나도 모르는 걸 어떻게 대답해 주냐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시종들은 각자의 방으로 손님들을 안내해 주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태황제와 태황후는 개인 서재와 응접실이 딸린 가장 좋은 방을 배정받았다. 방 안에 있는 문을 통해 서로의 침실로 갈 수도 있었다.
벨레드리안 귀족 손님들은 태황제 부부의 방만큼은 아니어도 어지간한 대저택이 남부럽지 않은 화려한 방에서 묵게 되었다.
방을 안내받은 후, 시종들이 마저 짐을 옮기는 사이 우리는 귀빈들을 티 룸으로 안내했다.
입구부터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티 룸을 본 손님들은 저마다 감탄을 내뱉었다.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나는 일부러 뒤쪽으로 잠깐 물러서서, 끝도 없이 펼쳐진 복도를 잠시 살폈다.
화려한 휘장과 보랏빛 카펫으로 치장된 그곳에는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
분명 지켜보고 있겠지……?
모습만 드러내지 않았을 뿐, 이 모든 걸 그가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조바심이 차올랐다.
“로렐라 님? 괜찮으신가요?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우두커니 서 있는 내가 이상했는지, 곁에 있던 하녀가 말을 붙여 왔다.
“……네.”
나는 그녀에게 생긋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얼른 안으로 뒤따라갔다.
* * *
사방에 높다란 아치형 창문이 나 있는 고풍스러운 티 룸에서, 사람들은 차를 즐기며 단란하게 대화를 나눴다.
양쪽으로 세워진 커다란 기둥 곁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공연한 폐가 아닐까 하여 망설였건만 오길 잘한 듯싶소. 이토록 환대를 받다니, 황궁에 돌아가면 사람들에게 해 줄 이야기가 무척이나 많겠군.”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 순간, 위너드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가득했다.
“태황제 폐하께서 좋아해 주시니 저희도 기쁠 따름입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부디 편안히 머물러 주세요.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레어넌 단장과 로렐라의 대답이 이어지자마자,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았다.
“안 그래도 함께 가고 싶다는 이가 많았는데, 이 얘기를 들으면 매우 슬퍼하겠군. 이거 큰일이야.”
그러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중 가장 크게 웃은 사람은 황태자 시절 그에게 경제학을 가르쳐 준 셀베로나스 후작이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어머니가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까와는 달리 말수가 퍽 줄어들었다. 그게 누구보다도 차를 집중하여 음미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위너드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모습을 눈에 담는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 휘몰아쳤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보았지만, 복잡한 마음을 좀처럼 가라앉힐 수 없었다. 기쁘면서도 서글프고, 또 행복하면서도 동시에 분노가 차올랐다.
그는 조용히 손을 들어 매고 있던 크라바트를 아래로 슬쩍 잡아당겼다.
숨쉬기는 한결 편해졌으나, 가슴 속을 가득 메운 먹먹함은 오히려 부피를 키워 나갔다.
한시도 잊은 적 없는 그리운 풍경.
너무나도 익숙하기에 더욱 가슴 설레는 저곳에, 오로지 그의 자리만 없었다.
물론 이제는 이런 일로 상처받지 않는다. 다만, 기억 속의 모습보다 훨씬 더 짙은 주름이 자리 잡은 부모님의 얼굴이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위너드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마른세수를 했다. 아무리 가라앉히려 해도, 계속해서 격한 감정이 치솟았다.
안내자가 된 이후 갖게 된 새로운 능력으로, 벨레드리안 제국에 몰래 다녀올까 고민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보고 싶었던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나면 행여나 마음이 약해질까 봐서이기도 했고, 마치 도둑처럼 숨어서 훔쳐봐야 한다는 사실을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왜 그립지 않았겠는가.
실제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지금껏 몇 번씩이나 상상하던 것과 똑같은데.
씁쓸한 미소를 지은 위너드가 자리를 뜨려던 그때였다.
“레이디 로렐라는 얼마 전 사절단으로서 아델리움을 다녀왔다고 했지?”
아버지가 로렐라를 향해 살짝 몸을 틀며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폐하.”
“그런데도 곧바로 이곳에 오다니. 조금 과중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 세실리카의 폐하께서 그대에게 특별히 일을 많이 주시는 것인가, 아니면 본인이 자처한 것인가?”
“이번 일은 제가 자원한 것입니다, 폐하.”
“흐음. 일을 즐기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대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지?”
떠보는 듯 근엄한 말투였지만 눈은 전혀 아니었다. 그의 눈매가 살짝 둥글게 휘어 있었다. 일부러 농담을 건넨 게 틀림없었다.
“……예?”
“내 앞에서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되오.”
“아. 폐, 폐하. 그게…….”
하지만 로렐라는 그의 의중을 읽지 못했는지 몹시 당황해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서도 인재를 탐내시는군요, 폐하. 즐겁다고 하면 제국으로 가자는 말도 하실 거지요?”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어머니가 결국 말을 보탰고, 또다시 사방에서 즐거운 웃음소리가 터졌다.
위너드는 홀린 듯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그의 시선은 자신의 소중한 후보…… 아니, 소중한 그녀에게 꽂혀 있었다.
반짝이는 눈빛은 물론이고 우아한 손짓, 그리고 즐거운 듯 말하는 목소리까지 모두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사람들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지만, 그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시선 속엔 오로지 세 사람만이 남았다.
가장 꿈꾸던 미래가 바로 저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