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너무나도 닮은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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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너무나도 닮은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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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너무나도 닮은 얼굴
2022.10.29.
오랜 시간을 달린 끝에 겨우 목적지인 사그랑에 도착했다.
마차의 바퀴가 멈추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내릴 수 있겠구나. 피로가 온몸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황실에서 준비해 준 마차는 무척이나 크고 편안했지만, 아무래도 장거리 여행은 체력이 소모되는 일이니까.
“어서 오십시오, 로렐라 님. 사그랑 별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문이 열리자마자 마중을 나온 별궁의 시종들이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능숙하게 나를 에스코트해 주고 실어 온 짐을 날랐다.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찌뿌둥한 어깨도, 장시간 여행으로 인한 피로도 단숨에 잊게 해 주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마치 하늘에 닿을 듯 높게 솟은 산이었다.
흰 돌을 품은 채 시원하게 뻗은 능선은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이 났다. 그 위로는 뾰족한 종탑처럼 생긴 높은 봉우리가 보였다. 그 위에 걸린 구름은 마치 시간을 잊기라도 한 것처럼 한가로이 지나갔다.
시선을 빼앗는 압도적인 자연경관 속에서, 아름다운 흰색 별궁은 고고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새하얀 외벽 위엔 눈부신 은빛 지붕을 얹었으며, 동그랗게 솟아 있는 종루는 청록색을 띠는 대리석으로 만든 건물이었다.
주변과 기가 막히게 어우러진 별궁은 꽤 높은 지대에 있어 정원에서 저 아래 맑은 호수와 그 뒤쪽의 빼곡한 숲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산새 소리는 귀를 기분 좋게 잡아끌었다.
나는 잠시 넋을 놓고 아름다운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오랜 여행으로 지친 눈의 피로가 저절로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이런 마음을 눈치챘는지, 곁에 선 시종이 미소 띤 얼굴로 설명해 주었다.
“아름다운 풍경이지요? 뒤쪽에 있는 건 디에즈 산입니다. 세실리카의 왼쪽 어깨라고 부르는 사그라안느 산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지요.”
“사그라안느……. 그래서 이 지역을 사그랑이라고 부르는 건가요?”
“맞습니다. 이 별궁도 주변 자연환경을 본떠 지은 건물이지요. 청록색은 숲을, 그리고 은빛 지붕은 호수를 상징한답니다.”
시종은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게 좋은지 지역과 관련된 이야기를 줄줄이 읊어 주었다. 별궁에서 일하는 데에 굉장한 자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열심히 머릿속에 새겼다. 이곳을 찾아온 귀빈들에게 해 주기 딱 좋은 이야기였으니까.
나중에 조금 더 알려 달라고 해야겠다. 야무지게 써먹어야지!
“그럼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시종이 옆으로 비켜서자, 흰 장갑을 낀 익숙한 손이 정중하게 다가왔다.
“에스코트해 드리겠습니다. 발밑을 조심하십시오.”
바로 레어넌이었다.
그의 손을 잡는 순간, 따가운 시선들이 쏟아졌다. 함께 특사로 임명받은 귀족들과 호위를 위해 따라온 병사들, 심지어는 성기사단 몇 명도 함께였다.
다들 황궁을 밥 먹듯이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이기에, 사절단이 업무를 마치고 귀국하던 중 무슨 일을 당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에 레어넌이 얼마나 분노했는지도.
그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엄청난 인원의 대규모 조사단을 직접 꾸려 나를 습격한 사람들의 행방을 뒤쫓는 것에 주력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표류하다 섬에 흘러 들어간 해적 잔당이 있을 수 있다면서 조사단이 온 바다를 누비게 해 정보를 모으는 모양이다.
아델리움의 해군들도 협조하고는 있지만, 때론 지시가 너무 거침없어 곤란해한다는 소문도 들었다. 물론 이 역시 레어넌이 아무런 잡음이 나오지 않도록 완벽하게 처리하는 듯했지만…….
여하튼 이쯤 되니 사람들은 ‘무엇이 레어넌 단장을 그토록 분노케 했는가’를 궁금해했다.
그러다 보니 소문은, 황궁을 시작으로 바람처럼 퍼져 나갔다.
사절단에 레어넌 기사단장이 애지중지하는 여자가 있다고.
하필이면 ‘그녀’를 건드렸으니 불한당들은 이제 큰일 났다고 입방아를 찧어대는 호사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런 와중에 특사 임무까지 맡았으니.’
나는 곁에서 보폭을 맞추는 레어넌을 몰래 힐끔거렸다.
태황제 부부를 영접하는 중요한 일이니 황제의 조카이자 성기사단장인 그가 나서는 게 당연하지만, 소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더 로맨틱한 상황을 원했나 보다.
덕분에 레어넌 단장이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그녀’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기 위해, 특사 임무를 자처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로렐라?”
그때, 따듯하고 커다란 손이 내 손을 살짝 힘주어 잡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계십니까?”
퍼뜩 정신을 차리니 레어넌이 어느새 나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또다시 뒤통수가 따끔따끔한 느낌에 나는 얼른 웃으며 무난한 화제를 입에 담았다.
“호위가 참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황궁 병사들에, 성기사단원 분들까지…….”
뒤를 슬쩍 돌아보자, 호위 계획을 세우는 듯 별궁의 시종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성기사단 단원들이 보였다. 화려한 제복을 입고 서 있는 자세에서, 일반 병사와는 확연히 다른 늠름한 기상이 느껴졌다.
“레어넌 단장님이 단원들에게 따로 명을 내리신 건가요? 태황제 폐하 부부의 호위를 위해서요?”
“……그렇습니다.”
왜인지 그의 대답이 다소 늦었다.
“그쪽에서도 황실 호위단을 대동한다고 했는데, 너무 과하게 느껴지진 않을까요?”
대수롭지 않게 한 이야기인데 그는 머쓱한 듯 웃더니 말을 얼버무렸다.
“익숙해지실 겁니다.”
무심코 시선을 돌리자 빨갛게 익은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앞으로 로렐라 님은 어딜 가시든지 반드시 제가 지켜 드릴 거니까요.”
“네? 마, 말도 안 돼요. 단장님이 제 개인 호위도 아닌데…….”
당황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럼, 개인 호위로 받아 달라고 청하면 받아주실 겁니까?”
평소보다 더 조심스럽게 나를 에스코트해 주던 레어넌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네?”
너무 놀라 되묻고 말았지만, 다시 답하는 그의 목소리는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저는 진심입니다. 받아…… 주실 겁니까?”
갑자기 멈춰 선 탓인지, 다시 뜨거운 시선들이 마치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그만 좀 쳐다봐! 내 뒤통수 뚫어지겠다고……!
나는 생각해 보겠다는 말로 급히 대답을 얼버무린 채, 레어넌의 손을 잡아끌고서는 종종걸음으로 도망치듯 빠르게 걸었다.
* * *
배정된 방에 짐도 다 풀었겠다, 이제는 바쁘게 일할 시간이다.
나는 손님맞이 준비가 한창인 별궁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만찬은 계획대로 잘 준비되고 있는지, 무도회가 열릴 회장은 모자람 없이 잘 꾸며졌는지 등등을 꼼꼼히 체크했다.
손님들의 기호를 파악하고, 이름과 특이 사항들을 외우는 건 기본 중 기본이었다. 게다가 손님들이 머무실 동안, 최대한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일정을 짜는 것도 특사들의 몫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일정을 짜는 동안, 나는 내가 세운 야심 찬 계획 하나를 슬쩍 끼워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번 방문에 벨레드리안의 전 기사단장이 함께한 덕분에, 레어넌은 반나절 정도 그와 함께 외출할 계획이었다.
나는 그 시간에 태황제 부부에게 특별한 티타임을 선사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위너드가 갑자기 나타나려면, 레어넌이 없어야만 하니까.
다른 특사들에게는 어떻게든 둘러댈 수 있지만, 레어넌은 이미 위너드의 얼굴을 알고 있지 않나.
‘특별한 티타임’을 위해 내가 공수한 차와 과자들, 그리고 자리를 꾸미는 방법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근사한 이벤트라며 칭찬해 주기까지 했다.
어쩐지 좀 의욕 넘치는 신입이 왔구만, 하는 느낌이기도 하고…….
정신없이 준비하다 보니 며칠이 훌쩍 지나갔다.
드디어 대망의 예정일, 아침부터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하늘이 우리를 반겼다.
시종이 벨레드리안 태황제 부부가 곧 도착한다고 알려 왔다.
그 소식에 별궁에 있는 모든 사람이 몹시 분주해졌다.
나 또한 하녀의 도움을 받아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위너드로부터 선물 받은 그 푸른빛 드레스였다.
옷을 바꿔 입은 나는 커다란 거울 속 내 모습을 요리조리 살폈다.
“제대로 잘 입은 거 맞지?”
평소에 내가 입던 스타일이 아니어서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드레스는 마치 자로 잰 듯 몸에 꼭 맞았다.
장신구를 착용하고, 레이스 장갑까지 다 끼고 나니 위너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 참. 모자!”
그러자 조용히 치장을 도와주던 하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모자를 건네주었다.
“어머, 특이한 모자네요. 직접 준비하신 건가요?”
“네, 이게 제일 중요하다고 했어요. 쓰는 것 좀 도와줄래요?”
나는 그녀의 도움을 받아 조심스럽게 모자를 쓴 뒤, 제대로 썼는지 확인하기 위해 몸을 뒤로 돌려 거울을 보았다.
그리고 순간 나도 모르게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은, 방금과는 딴판이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엔 좀 쑥스럽지만, 모자를 쓰기 전보다 훨씬 더 우아하고 기품이 넘쳐 보였다.
“어쩜, 너무 근사하세요!”
하녀의 입에서도 감탄사가 터졌다.
겨우 모자 하나 쓴 것뿐인데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이래서 모자가 중요하다고 했구나.
……벨레드리안 사람들은 아무래도 패션에 진심인가 봐.
앞으로 옷을 맞출 때 모자도 함께 주문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밖으로 나가자, 복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레어넌이 보였다.
“로렐라 님, 금방 나오셨…….”
환하게 웃으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레어넌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는 한참이나 말을 고르는 듯 입만 벙긋거리다가 몇 번 헛기침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처음…… 보는 옷이군요.”
“네. 벨레드리안 제국식으로 입어 본 건데……. 혹시 이, 이상한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레어넌이 눈을 느리게 깜빡이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너무 아름다우셔서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몹시 붉었다.
“감사해요.”
어쩐지 나까지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나는 얼른 모자의 챙을 내려 열이 오른 얼굴을 숨겼다.
현관으로 가는 내내 그의 시선이 내게 향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평소와는 달리 편하게 말을 건넬 수 없었다.
심장이 하릴없이 뛰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곧 태황제 부부를 맞이한다는 생각까지 더해져서 긴장감이 차올랐다.
밖으로 나가자, 별궁 시종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의 앞에서 대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저 멀리서 달려오는 화려한 행렬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장한 기사들이 지키고 있는 끝없는 마차 행렬이 별궁의 앞에 멈춰 섰다.
가장 먼저 금술이 달린 보랏빛 망토를 휘날리며 벨레드리안의 기사들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말에서 내려, 세실리카의 황실 기사들과 인사를 나눴다.
처음 만나는 기사들인데도 갑옷이 무척 눈에 익었다. 위너드가 황태자이던 시절, 마물과 싸우던 그의 부하들이 입었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으니까.
뒤이어 가장 선두에 섰던 마차 두 대의 문이 열렸고, 다채로운 색깔의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줄줄이 내렸다. 황제 부부를 보필하는 귀족들이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시종들의 에스코트를 따라 그들은 아직 문이 열리지 않은 단 한 대의 마차 앞에 일렬로 섰다.
나는 그 광경을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위너드도 틀림없이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겠지.
아직 문이 열리지 않은 건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마차뿐이었다.
“에세드 루베헨 벨레드리안 님과 카타리나 델 벨레드리안 님께서 드십니다!”
힘 있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거수경례를 한 채 정렬해 있는 기사들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나 역시 허리를 숙이고 발끝만 보고 있는데, 마차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어 사박사박 걷는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왜인지 모르게 긴장되어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킨 그때였다.
“다들 고개를 드시오.”
부드러우나 왜인지 모르게 위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귓가에 나직이 내려앉았다. 과연 전 황제답게 위엄은 여전한 듯했다.
그 명에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든 순간, 나는 순간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아팠지만, 덕분에 멋대로 튀어나오려던 탄성을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세실리카 여러분의 환대에 감사드리오.”
비록 나이는 들었으나, 웬만한 청년과 견주어도 지지 않을 정도로 풍채가 좋은 에세드 루베헨 벨레드리안 때문이 아니었다.
구불거리는 아름다운 갈색 머리와 에메랄드처럼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를 지닌 카타리나 델 벨레드리안.
……한눈에 봐도, 판박이일 정도로 위너드와 닮은 그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상냥한 목소리가 멍하니 서 있는 내 귓가를 스쳤다.
사람들과 눈을 마주칠 때마다 호기심 많은 눈빛을 띠는 점이라든가, 미소 지을 때마다 가느스름한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는 버릇까지도…… 전부 위너드를 연상케 했다.
이 정도로 어머니와 닮았는데, 혹시 만나면 기억을 되찾는 게 아닐까?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이어 가던 찰나였다.
“이게 대체 무슨…….”
내 곁에 서 있던 레어넌이, 충격받은 듯한 목소리로 신음하듯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