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만나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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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만나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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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만나기만 한다면
2022.10.26.
최근 아델리움 왕실의 신하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왕실 최고 주인의 심기가 몹시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왕은 자신의 집무실에 틀어박혀 내내 불퉁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눈부신 보석이 가득 들어차 있는 벽면의 진열장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이국에서 온 귀한 애완동물이 지칠 때까지 재롱을 떨어도 그의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나빠지기만 했다.
그의 기분이 나쁜 데에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우선 첫 번째로, 아벤도트 가문에서 운영하던 상단이 왕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에레몬’ 사교 클럽의 후원을 끊었기 때문이었다.
상단을 운영하던 레이나 영애가 행방불명된 탓에 더 이상 후원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게 그 이유였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엊그저께는 세르시안 후작이 병사들을 모아 수도 북쪽 신전에 쳐들어왔다. 사라진 이네스 후작 부인을 이 근처에서 목격했다는 제보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왕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사제들이 막아섰으나, 서슬 퍼런 후작의 기세에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신전을 관리하는 대사제는 왕이 특별히 총애하는 자였다. 분노에 찬 그는 왕에게 달려와 온갖 성토를 늘어놓았으나, 제대로 된 엄벌조차 내릴 수 없었다.
계속해서 귀족 영애들이 사라지는 사건들이 발생해 요즘 귀족들 사이에서 원성이 자자했기 때문이었다.
왕실에서도 전력을 들여 사건의 실마리라도 잡아보려고 했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실마리조차 잡히질 않았다.
“……하, 짐의 권위와 위엄이 아주 땅에 떨어졌군.”
오갈 곳 없는 분노와 짜증이 쌓이자, 그는 칼끝을 돌릴 만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게다가 그 능구렁이 같은 자마저 감히 아델리움 왕실을 능멸하려 들다니…….”
세실리카 황제의 얄미운 웃음을 생각하니 화가 더 치밀었다. 화려한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있던 왕이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거센 분노가 터져 나올 거라는 신호나 마찬가지였기에, 아까부터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가만히 서 있던 신하들은 저마다 마음의 준비를 한 채 어깨를 움츠렸다.
“존경해 마지않는 선대와 척을 지던 자를 일부러 불러들여 융숭한 대접을 베풀겠다니. 이건 누가 봐도 나를 도발하기 위한 수작 아니더냐!”
세실리카 황제의 속내가 그렇다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넘어가는 건 대체 뭔지…….
신하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지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고, 고정하십시오. 폐하.”
“닥쳐라! 이 쓸모없는 녀석들!”
어렵사리 꺼낸 신하의 말을 잘라 버린 왕이 거친 숨을 씨근덕댔다.
“그것도 모자라 납치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앓아누웠다는 사람을 의전 특사로 보내다니. 아니, 애초에 앓아누웠다는 것도 거짓일 거다. 감히 거짓말로 짐을 능멸하려 하다니!”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한 얼굴에서는 체통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직도 세실리카 황제가 보낸 서신을 생각하면 혈압이 치솟았다. 가장 아끼는 소중한 신하가 큰일을 겪었다며 호들갑을 떨던 서신에는, 자신을 자극하기 위해 바다에서 있었던 일이 시간대별로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훌륭한 왕께서 직접 살피는 평화로운 바다에서 어떻게 이런 경악스러운 일이!’라든가,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하찮은 무리를 부디 일벌백계하시기를!’ 같은, 자신을 비꼬는 문장들이 곳곳에 쓰여 있었다.
“끄으…….”
너무 흥분한 것일까. 왕은 목 뒤를 감싸 쥐더니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신음했다.
“폐하!”
“어, 어서 의사를 불러 와라!”
신하들은 호들갑을 떨어 댔지만, 왕에겐 그저 짜증을 더하는 소음일 뿐이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꼴 보기 싫었다.
그때, 문 너머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샬로네즈 왕녀님께서 급히 알현을 청하십니다, 폐하.”
그 말을 들은 왕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꽉 막힌 듯 답답하기만 했던 마음에 드디어 한 줄기 산들바람이 부는 기분이었다.
“들라 하라.”
왕이 얼른 몸을 똑바로 하며 외쳤다.
문이 열리고, 옅은 미색이 감도는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사뿐사뿐 걸어 들어왔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고 우아한지, 마치 한 송이 꽃이 사람으로 변한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샬로네즈의 등장에 신하들의 얼굴에도 비로소 화색이 돌았다. 이렇게 화를 내는 왕을 안정시킬 수 있는 건 그녀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려 우아하게 인사한 샬로네즈가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국정을 논하시는 귀중한 시간을 제가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바마마께서 식사도 거르시고 집무실에만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걱정이 되어 왔습니다. 게다가 의사를 부르는 목소리도 들리던데…… 혹시 어디 편찮으셔요?”
“아니다, 샬로네즈.”
자기를 걱정해 여기까지 온 착한 딸 앞에서도 화를 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왕은 얼굴을 살짝 문지르고는 입꼬리를 조금 끌어 올렸다.
“그래도 너를 보니 마음에 쌓였던 화기가 내려가는 듯하구나.”
“그러시다니 저도 기쁩니다. 괜찮으시다면 조금 쉬지 않으시겠어요?”
그러자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신하들을 모두 물린 그는, 샬로네즈와 함께 집무실 한편에 놓인 티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뜨거운 차를 마시며 왕과 잠시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던 그녀는 이내 조심스럽게 물었다.
“벨레드리안 태황제 부부에 관한 얘기는 들었습니다. 분명 그 일이 아바마마의 심기를 언짢게 한 것이겠지요……?”
“그래.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서신을 보낸 것도 모자라, 아델리움의 해적들 때문에 쓰러지기까지 했다는 사절단 중 한 명을 ‘굳이’ 특사로 보낸다니. 손님을 불러 놓고 무슨 이야기를 얼마나 신나게 늘어놓을지 보지 않아도 예상되지 않느냐? 하…….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보는 건지.”
“저도 오늘 오전에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참으로 당황을 금치 못했습니다.”
“잘나신 벨레드리안의 태황제 부부께서 환자의 의전을 받게 되시겠군. 참으로 우스꽝스럽구나.”
저열한 열등감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이었지만, 샬로네즈는 그저 미소 지은 채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아바마마의 심정이 어떠실지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하지만 너무 심려 마십시오. 고작 그런 것으로는 아바마마의 드높은 명성에 조금도 흠집을 남길 수 없을 테니까요.”
다정하고 달콤한 딸의 말에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짜증이 사르르 녹는 듯했다.
그래. 제 편이 하나라도 있는 게 어디인가. 게다가 이토록 사랑스럽고 똑똑한 왕녀가 든든한 자신의 편이 되어 주다니. 하늘에 감사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게다가 요즘 들어 나라에 실종 사고가 연달아 일어나 걱정이 크실 테지요.”
“그래. 범인을 잡긴커녕, 단서조차 찾지 못했으니……. 불만의 목소리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단다.”
사랑스러운 딸의 마음 씀씀이 덕분일까. 왕은 조금 더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귀족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도 불안에 떨고 있다는구나. 수도에서조차 저녁만 되면 모두가 문을 걸어 잠그는 모양이야. 거리는 쥐 죽은 듯이 을씨년스럽게 변하고…….”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어느새 왕녀의 순한 눈망울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혔다.
“실종자들이 하루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요.”
“그럼, 당연히 그래야 할 텐데 말이다.”
어수선한 나라 분위기를 생각하고 가슴이 답답한지, 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점점 커져만 가는 원성을 어떻게든 잠재워야 할 텐데……. 이대로 왕실의 위신이 내려앉을까 봐 무척 걱정스럽구나.”
샬로네즈는 한숨을 푸욱 내쉬는 왕을 말없이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제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좋은 생각이라니?”
“잠시 외유를 다녀오고자 합니다.”
“외유라니, 어디로?”
“사그라안느 서쪽 산맥 끝에, 영험하기로 소문난 에베 대신전이 있다는 건 알고 계시지요?”
갑작스러운 말에 왕은 입술까지 가져왔던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러나 샬로네즈는 흔들림 없이 이야기를 이어 갔다.
“제가 그곳으로 가서 신께 직접 기도를 올리겠습니다. 실종자들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겠어요. 아바마마께선 이를 왕국에 대대적으로 널리 알려 주셔요.”
“하지만 고작 기도를 올리기 위해 한 나라의 왕녀가 외유를 나가기엔 너무 먼 곳이 아니더냐.”
왕은 마뜩잖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게다가, 벨레드리안 태황제가 초대받은 사그랑 별궁과도 꽤 가깝고…….”
누군 황실의 보호 아래서 극진한 대접을 받을 텐데, 아델리움의 자랑이자 꽃이라 불리는 왕녀는 나라의 액운이 발생해 멀리 있는 신전에 일부러 기도나 하러 가야 한다니.
생각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왕녀는 그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재빨리 말을 이었다.
“실종자들이 무사히 돌아온다면, 제 간절한 기도가 통한 증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행여 그렇지 않더라도…….”
어째서인지 그녀의 눈동자는 기이할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제가 직접 기도를 올리러 갔다는 소식이 퍼지면, 모두의 불안을 조금이나마 잠재울 수 있을 거예요.”
달갑지 않다는 듯 입술을 꾹 다물었던 왕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무엇보다 왕실이 노력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게 중요하지 않겠어요?”
“네 말이 맞긴 하지만…….”
“부디 허락해 주세요, 아바마마. 왕실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 오랜 시간 고민 끝에 떠올린 생각입니다.”
샬로네즈의 간절한 요청에도 한동안 고민하던 왕은, 이내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네 갸륵한 마음을 차마 외면할 수가 없구나. 외유를 허락하마, 샬로네즈.”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는 정말로 기쁜 듯이 환하게 웃으며 얼른 몸을 일으켰다.
“전 하루빨리 외유를 떠날 준비를 해야 하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러고는 빠르게 사라졌다.
아직 찻잔에는 뜨거운 차가 가득 남아 있건만, 더 이상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 * *
기나긴 복도를 가로지르는 샬로네즈의 걸음은 어느 때보다도 빨랐다. 뒤따르는 시녀들이 벅차할 정도였다.
대체 그 먼 곳은 갑자기 왜 가시겠다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왕녀의 명령이니만큼 충실하게 이행해야 했다.
샬로네즈를 방까지 모시고 난 뒤, 시녀들은 명을 따르기 위해 재빠르게 흩어졌다.
날씨가 좋아 방 안의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
“……벨레드리안 태황제 부부라.”
창가에 다가가 바람을 만끽하며, 샬로네즈는 생각에 잠겼다.
로렐라 메이레드가 쓰러진 건 꾀병이 아니라 아마 진짜겠지. 사그랑에 가는 것도, 황제의 명이 아니라 본인이 요청한 게 틀림없었다.
멍청한 왕은 분노에 사로잡혀 눈치채지 못했던 듯하지만,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로렐라는 황실에서 오래 일한 자도 아니고 고작 얼마 전 사절단으로서의 첫 임무를 완수해 냈을 뿐이다.
그런 사람을 굳이 특사로 콕 집어 보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세실리카 황실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녀가 그런 부탁을 한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안내자에게 부모를 만나게 해 주고 싶었던 모양이지.
“마음이 애틋한 건지, 아니면 잔인한 건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샬로네즈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차피 아들을 기억도 못 할 텐데.”
그때, 창밖에서 삑삑거리는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창문 밖으로 살짝 고개를 내미니, 아래쪽에 자그마한 둥지가 보였다.
샬로네즈는 창문가에 턱을 괸 채, 입을 쩍쩍 벌려 대는 새끼 새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로렐라 메이레드.”
귀찮게 혀를 꽤나 굴려야만 하는 이름이었다.
레이나가 임무에 실패하고 돌아왔을 때는 오장육부가 전부 뒤틀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분노가 치솟았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안 그래도 그 근사한 황태자님을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 줄곧 고민했거든.”
그래. 만나기만 하면,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제안을 절대로 거부하지 못할 테니까.
그녀의 눈이 서늘하게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