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좋아, 허락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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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좋아, 허락하지
2022.10.19.
“아가씨, 안녕히 주무셨어요?”
화창한 햇살이 쏟아지는 아침, 조이가 상큼한 미소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새벽에 살짝 열어 뒀던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이제는 선선함을 넘어서 제법 쌀쌀한 날씨였다.
물론 나는 조이가 바꿔 놓은 이불이 너무 두꺼운 탓에, 자면서도 더워서 몸을 뒤척거려야 했지만.
“금방 회복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앓는 동안 수발을 들어 주느라 고단했을 텐데도, 그녀는 피곤한 기색을 보이긴커녕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었다.
“조이가 잘 돌봐 줘서 그런가 봐. 고마워.”
“그래도 너무 무리는 하지 마세요. 이렇게 몸이 나아질 때 더 조심하셔야 해요.”
조이는 창문가로 다가가 창문을 꼭 닫으며 애정이 가득한 당부를 건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보송보송한 털실로 만든 슬리퍼를 신고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방 안에는 여기저기서 받은 선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화려한 꽃이 핀 화분과 진귀한 찻잎, 각종 과일이 가득 담긴 바구니, 수면을 돕는다는 값비싼 향유까지.
모두 세이블과 펠리어트, 그리고 레어넌 단장에게 받은 것들이었다. 심지어 쾌유를 바란다며 황제가 보낸 선물도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원래 나를 봐주던 의사 외에, 또 다른 의사가 저택을 찾았다. 나도 여러 차례 이름을 들어 본 적 있는, 아주 유명한 의사였다.
진료 예약을 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들었는데, 대체 누가 보내 준 걸까? 하지만 아무리 물어도 그는 미소로만 답할 뿐이었다.
아마도 카셀의 지시가 아닐까, 하고 추측만 하는 수밖에.
어쨌거나 이쯤 되니 병이 안 낫는 게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그런데 정말 오늘부터 움직이셔도 괜찮겠어요?”
잠옷 벗는 것을 돕던 조이가 걱정스레 물었다.
“응, 그럼. 당연하지.”
“며칠만 더 쉬시지…….”
“괜찮다니깐. 게다가 오늘은 아주 중요한 약속이 두 개나 있잖아.”
중요한 데다가 미룰 수도 없는 약속이었다.
하나는 오전 중에 세이블을 만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무려 황궁에 입궁하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재빨리 씻고, 드레스로 갈아입은 뒤 머리 손질과 화장까지 모두 마쳤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나서는 세이블이 오기 전까지 서재에서 업무를 보기로 했다.
그동안 들여다보지 못해 엄청나게 쌓인 서류 중에서 가장 급한 일부터 몇 건 처리하고 나니, 어느새 약속 시간이 다가왔다.
세이블은 정확히 약속한 시간에 저택을 방문했다. 얼른 현관으로 나가자, 변함없이 차분하고 서늘한 미소를 띤 그녀가 나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로렐라 님.”
“이른 시간에 약속을 잡아서 미안해, 세이블.”
“별말씀을요. 건강해 보이는 모습을 뵈니 좋군요.”
말을 마친 세이블이 답지 않게 활짝 웃었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응접실로 향했다. 물론 저번에 병문안을 와 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응접실에는 이미 세이블이 좋아하는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녀가 기쁘다는 듯 다시 한번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만큼, 하고픈 이야기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어도 모자랄 정도지만, 그런 것보단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레이나 아벤도트.”
내가 내민 서류를 가볍게 훑어보던 세이블이, 그 안에 쓰인 이름을 조용히 입에 담았다.
검은 뱀 길드에게서 받은 서류였다. 아델이 밝혀 낸 놀랍도록 자세한 정보가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이 여자가 또 다른 주인공 후보군요. 로렐라 님을 납치한.”
“그래, 맞아.”
“혹시 바이올렛 영애도 이 여자 손에 죽은 걸까요?”
“그럴 가능성이 커.”
세이블의 눈빛이 이내 어두워졌다. 서늘한 눈동자에 슬픔과 더불어 분노가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던 그녀가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도망친 직후, 레이나 아벤도트도 곧바로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적혀 있군요.”
“아마도 죽었겠지. 아니, 살해당했겠지.”
“누구에게요?”
“이 모든 걸 사주한 사람에게.”
세이블은 대답 대신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평소와 다름없는 우아한 동작이었으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파악한 피해자들은 전부 아델리움에 살고 있었어. 그러니까 범인도 어쩌면, 아니, 상당히 높은 확률로 아델리움 사람이겠지. 하지만…… 언제 칼끝이 세실리카 제국으로 향할지 모르는 일이야.”
나는 한 자 한 자 힘주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절대로 방심해선 안 돼. 세이블.”
“그래서 저는…….”
찻잔을 내려놓은 세이블이 나직하게 말했다.
“로렐라 님이 걱정돼요.”
“어째서?”
“실패했으니까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시선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가 상대라면, 아마 약이 바짝 올랐을 거예요. 그래서 말인데…….”
왜인지 세이블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나 머뭇거린 것도 잠시. 곧이어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 저택으로 오시지 않겠어요?”
“으응?”
의외의 제안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저택은 조금…… 안심이 안 되어서요. 제 저택은 기사단이 빈틈 없이 사방을 지키고 있죠. 후작가 상황도 상당히 안정되었으니, 로렐라 님이 지내시기에 불편함은 없을 거예요.”
솔직히 말해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른 후보가 후보를 납치하고 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지금 같은 상황에 다른 주인공 후보를 보호해 주겠다니.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서, 긴 고민 끝에 어렵사리 내린 결정이라는 걸 읽을 수 있었다. 동시에 나를 생각해 주는 그녀의 마음도 느껴졌다.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고마움이 가슴 속 가득히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세이블이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물론 당장 결정을 내리시라는 건 아니에요. 충분히 생각하신 후 대답을…….”
“그렇게 하면, 내가 너와 연합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거나 마찬가지야.”
“…….”
“상대는 이미 내가 주인공 후보라는 걸 알고 있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함께 행동하는 건 좋지 못해. 오히려 너도 후보라는 사실을 알려 주게 될지도 모르니까.”
세이블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그녀의 머릿속을 거쳐 간 생각이리라. 그러나 세이블은, 그 어떤 것보다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큰 듯 보였다.
절대로 널 위험에 빠뜨릴 순 없어.
나는 마지막 말은 속으로 삼킨 채, 쿠키를 하나 집어 들고 깨물었다.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맛이 감도는, 세이블의 취향에 맞춘 쿠키였다.
그리고 그걸 꼭꼭 씹어 깨끗하게 삼킨 후, 밝게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제안해 줘서 고마워, 세이블. 이건 진심이야.”
“……하아.”
나지막한 한숨이 들려왔다. 갑갑한지 그녀가 찻잔을 깨끗이 비워 냈다.
“이 건은 길드에 정식으로 의뢰해 놨어. 바이올렛 영애는 물론이고, 레이나 아벤도트를 파헤치다 보면 분명 꼬리가 잡힐 거야.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즉시 공유할게.”
“알겠습니다. 만약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물론이지. 걱정하지 마.”
나는 세이블의 잔에 차를 따라 주며, 부러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바꿨다.
“아, 그런데 조만간 서부에 가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어. 그때 놀러 가도 되지?
“네?”
세이블이 두 눈을 깜빡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꼭 초대해 줘. 놀러 갈 테니까.”
나는 그녀에게 윙크를 해 보이며, 입술 끝을 위로 한껏 끌어 올렸다.
* * *
“레이디 로렐라, 고개를 들게.”
명에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드니 언제 보아도 화려한 방 안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 어떤 장식도 눈앞에 앉아 있는 황제를 이길 순 없었다. 그의 위풍당당한 모습은 언제나 모든 사람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사절단 일정을 마치고 앓아누웠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네. 좀 더 쉬는 게 좋지 않았겠나? 인사는 나중에 천천히 와도 되니 말일세.”
“당치도 않습니다, 폐하.”
나는 공손히 두 손을 모은 채 얌전히 고개를 저었다.
“일개 신하인 저를 위해 귀한 선물까지 보내주시다니, 하해와 같은 은혜에 어찌 다 감사를 표할 수 있을는지요. 덕분에 금세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로 폐를 끼쳐 정말 송구합니다.”
“폐라니. 당치도 않아.”
황제는 인자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아델리움의 왕도 친서를 보냈다네. 그대의 쾌유를 빌더군.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주 면목 없는 눈치였어.”
기분 좋은 웃음소리와 달리 그의 입매가 심술궂게 올라가 있었다.
“암, 면목 없어야 하고말고. 내 귀한 충신에게 온갖 고초를 겪게 했으니.”
나는 동감을 표하는 의미에서 말없이 미소 지었다.
물론 이번 일은 아델리움 왕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하지만 아델리움의 앞바다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이 매우 중요했다. 게다가 공격받은 그 배에는 무려 아델리움의 지휘관까지 타고 있지 않았나.
아델리움 왕의 체면과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점이, 우리 황제 폐하를 무척이나 기분 좋게 만든 듯했다.
“아무튼 고생 많았네, 레이디 로렐라. 참, 듣자 하니 협상 테이블에서도 그대가 많은 활약을 해 주었다지? 레어넌은 물론이고, 사절단의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아주 칭찬이 자자하더군.”
“과찬이십니다.”
“하핫! 아무래도 내가 인재를 제대로 알아본 게지.”
황제는 호탕하게 웃으며 나를 양껏 치하해 주었다.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폐하…….”
“음?”
“송구스럽지만,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몸이 회복되자마자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는 게 마땅했기에 방문하기도 했지만, 다른 목적도 있었다.
“뭐든 좋으니 말해 보게.”
무슨 부탁인지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는데도, 황제의 대답은 무척이나 시원시원했다.
“서쪽 사그랑 지역의 황실 별궁에, 곧 특사단을 파견하신다 들었습니다.”
사그랑은 세이블의 저택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아, 그렇지. 자네가 아델리움에 가 있는 동안, 벨레드리안 태황제와 태황후께서 궁을 나와 운유를 시작하셨다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내주에 서쪽 국경 근처를 통과할 예정이시지.”
일전에 병문안을 와 준 레어넌으로부터 이미 들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듣는 순간, 곧바로 한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황제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둘도 없는 친우가 짐의 영토와 가까운 곳을 지난다는데, 어찌 모른 척하겠나? 사그랑의 별궁에 직접 초대해, 극진하게 대접할 예정이라네.”
실제로 황제는 벨레드리안 태황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둘도 없는 친우’라는 표현은 조금 과장된 면이 있었다.
게다가 형제나 친척, 혹은 그 정도로 막역한 사이가 아닌 이상 보통은 이렇게까지 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았다.
황제는 이 기회에 아델리움의 왕을 제대로 약 올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무도회에서 만난 아델리움의 귀족들로부터 아델리움의 선왕이 벨레드리안 태황제를 몹시 질투했었다는 비화를 전해 들었다.
왜인지 이유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 질투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모양이었다. 둘 다 일선에서 물러난 지 오래인데도.
그런데 그런 태황제를 일부러 별궁까지 모셔와 보란 듯이 대접한다는 것은…… 분명 의도가 엿보였다.
“폐하. 외람된 말씀이옵니다만, 그 특사에 저도 함께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으음, 그대를 말인가?”
“네.”
나는 고개를 더욱 조아렸다.
“하지만 그대는 사절단 임무를 마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제 막 몸을 추스른 참 아니던가?”
“아델리움에 다녀온 후, 제 부족함을 깨달았습니다. 폐하의 하늘 같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보다 많은 경험을 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비록 짧은 기간이라 해도 벨레드리안 제국의 태황제와 태황후를 가까이서 보필할 수 있다면 이는 개인적으로도…….”
“좋은 공부가 될 거라 이건가?”
“그렇습니다, 폐하.”
물론 내게는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찜찜한 문제들도 남아 있었고.
하지만 놓치고 싶지 않았다.
위너드가 코앞에서 부모님을 만나 뵐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를.
벨레드리안 태황제 부부가 사그랑에 방문할 거란 이야기를 들은 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레어넌이 돌아간 후, 위너드가 갑자기 나타났다. 물론 아무 때나 얼굴을 내미는 건 자주 있는 일이긴 했지만, 그날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특유의 능청스러운 미소도, 가벼운 농담도 없었다.
그날, 위너드가 본인의 사라진 과거, 특히 소중한 가족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아주 짧게 들을 수 있었다.
‘아들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려서 오히려 다행이야. 적어도 괴롭진 않으실 테니까.’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위너드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그리움이 가득 배어 있었다.
그래서 이 일을 계획했다.
물론 언젠가 벨레드리안 제국에 사절단으로서 직접 방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때가 언제일까.
게다가 지금 벨레드리안 황실에는…… 위너드를 죽이고 그의 모든 것을 차지한 원흉이 버티고 있지 않은가.
“부탁드립니다, 폐하.”
그렇기에 이번 기회가 더욱 간절했다.
잠시 생각하던 황제는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허락하지.”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들뜬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황제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인자한 미소를 만면에 가득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