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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걱정을 끼친 것 같아 미안해 (135/173)


135화. 걱정을 끼친 것 같아 미안해
2022.10.15.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고요한 새벽, 선선한 바람을 가르며 나아가던 배가 드디어 항구에 닿았다.

어슴푸레한 여명 속에서 힘차게 흔들리는 세실리카 제국의 깃발이 보였다.

항구에는 미리 전갈을 받은 에크레투스 성기사단원들과 황실 기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자세로 서서, 들어오는 배를 주시하는 그들의 용맹한 눈빛을 보니 비로소 마음에 안도감이 차올랐다.

주변을 돌아보니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나뿐만이 아닌듯했다. 다른 사절단 사람들 역시,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배가 잔교에 닿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나무 계단을 갑판 쪽으로 바짝 밀어붙였다.

황실 기사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배에서 내리자마자, 황제의 전령이 빠르게 다가왔다.


“사절단 여러분,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먼 길 오느라 피곤했을 테니 먼저 휴식을 취하라 하셨습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아무래도 고생한 사절단을 배려해 황제가 보고를 좀 늦춰 준 모양이었다. 정말 피곤했던 터라 몹시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럼…….”

나는 마차 앞에서 모두와 짧은 인사를 마친 뒤,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향해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지만 그는 인사를 받아주긴커녕, 갑자기 내 손을 잡더니 직접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레어넌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거절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

한참 말을 고르다가 결국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이 남자를 조금이라도 빨리 쉬게 하려면, 여기서 괜한 실랑이를 벌이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곧이어 레어넌도 나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흔들림 없이, 빠른 속도로 나아가는 마차 안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시간이 지나도 레어넌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여전히 굳은 눈매와 단단히 다물린 입술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단장님, 이제 괜찮아요.”

“…….”

“저는 정말 괜찮아요.”

두 번이나 힘주어 말하자, 푸른 눈동자가 비로소 나를 향했다.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분노와 거센 자책이 담겨 있었다.

나를 구조하러 온 선박에는 예상대로 레어넌 단장이 타고 있었다.

배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하게 망가진 해적선과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마물의 잔해를 경악스레 바라보던 레어넌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구명정에서 날 지켜 주려 했던, 그래서 함께 끌려갔던 아델리움의 병사들도 모두 무사히 구출되었다.

병사들은 끌려온 직후 내내 선실 아래쪽에 갇혀 있었기에, 갑판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조금도 보지 못했다.

덕분에 유일한 증인은 나뿐이었다.

나는 해적 집단이 처음부터 계획하고 벌인 일 같다고 진술했다. 함께 끌려갔던 병사들도,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게 틀림없다며 말을 보탰다.

어째서 갑자기 마물이 출몰한 건지에 대해선, 겁먹은 눈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면 그만이었다. 누군가가 일부러 불러낸 것 같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게 더 자연스러울 테니까.

다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만큼은 인정해야 했다. 마물이 날뛰는 와중에 어쩌다 보니 홀로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겠지.

게다가 레어넌 역시, 도망치던 배 한 척을 이미 본 듯했다.

나는 그 배에 국적과 신원을 알 수 없는 낯선 상인들이 타고 있었다고 둘러댔다.

그들이 고용한 호위들의 전투 실력이 무척이나 뛰어나서 반항하는 해적들은 물론 마물도 제압해 주었다고 전했다.

그리고 그 배의 갑판 위에 비밀스럽게 천으로 감싼 상자가 엄청나게 많이 쌓여 있었다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길드의 배가, 전문 밀수꾼들이 운영하는 배로 탈바꿈되는 순간이었다.

밀수품을 실은 배라면 당연히 출항 허가도 받지 않았을 테고, 어디다 신고도 못 하는 처지니만큼 약탈에 대한 대비책으로 전투 용병을 고용해서 데리고 다니는 것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계속해서 이 상황에 의문을 갖던 몇몇 사람들도 곧 이런 일보단 실종자들이 기적적으로 생환했다는 기쁜 소식에 더 집중했다.

그렇게 대충 넘길 수 있었지만, 레어넌 단장의 낯빛은 내내 어두웠다. 누구보다 예리한 사람이니, 무언가 미심쩍은 부분이 남아 있는 거겠지.

그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는 게 마음에 걸렸으나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렇다고 카셀과 위너드가 합심해 마물을 처리했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그를 다시 한번 부르려던 그때였다.


“……당신을 잃는 건 아닐까, 겁이 났습니다.”

드디어 열린 입술 사이로 참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함께 있어 주지 않았을까 내내 후회하고, 또 후회했습니다.”

“단장님…….”

언제나 단정하고 아름답던 얼굴이 또다시 고통스레 일그러졌다. 나는 무어라 대답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두 번 다시 이런 기분은 맛보고 싶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푸르게 빛나는 눈이 나를 향했다.

마치 물속으로 가라앉은 것처럼 사방이 먹먹한 가운데 고요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앞으로 절대 그대를 놓지 않을 겁니다. 설령 지옥이라도 해도 기꺼이 따라가, 반드시 지켜 드리겠습니다.”

어느새 냉철함이 서린 두 눈동자는,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맑고 투명한 파란색을 띠고 있었다.

* * *

저택에 도착하니, 고용인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레어넌은 이제 그만 쉬시라는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로렐라 아가씨!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좋아하시는 꽃잎을 띄워 목욕물을 준비할까요? 아, 혹시 시장하면 식사 먼저 하시겠습니까? 바로 드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답니다!”

나는 모두의 환대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떠나 있던 건 고작 몇 주 정도였는데, 마치 몇 년 만에 집에 돌아온 것 같았다.

익숙하고도 그리웠던 광경을 눈에 담으니 피로가 사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쉽사리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가장 먼저 세이블의 안전을 확인해야 한다.

내가 직접 ‘그런 일’을 겪은 뒤라서 더욱 걱정됐다.

아델리움을 떠나기 전 별일 없다는 전갈을 받긴 했지만, 혹시 그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 후 펠리어트에게도 서신을 띄우고, 마지막으로 길드의 ‘아델’에게 연락을 취할 생각이었다. 납치당했을 당시 몰래 들었던 대화들로 그 여자의 정체를 밝혀 낼 수 있다고 했으니까.

검은 뱀 길드는 일 처리가 빠르기로 유명하니, 지금쯤 어느 정도 범인의 윤곽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러니까 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아가씨, 괜찮으세요?”

멍하니 서 있는 내가 이상했는지, 조이가 곁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 두 다리가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발밑이 순식간에 푹 꺼졌다.


“아가씨!”

조이의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눈앞이 까맣게 어두워졌다.

* * *

나는 계속되는 고열에 시달렸다. 마치 두들겨 맞은 듯 온몸이 아팠고, 연신 식은땀이 흘렀다.

눈을 뜨는 건 약을 먹을 때뿐이었다. 겨우 약을 삼키고 나면 어김없이 잠에 빠졌다.

그간 겪은 일 때문일까. 자는 동안에도 계속되는 악몽이 나를 괴롭혔다.

꿈에서 나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서 있었다.

음산한 종소리가 울리면 어김없이 눈앞에 붉게 물든 시스템 창이 떴다.

그리고…… 저 멀리서 나를 죽이러 칼을 들고 달려오는 그림자가 나타났다.

달아나려 했지만, 마치 못이라도 박힌 듯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내 두 다리는 어느새 모래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려 해도 억눌린 신음만이 새어 나왔다. 둥둥 떠다니는 핏빛 창 위에는 보란 듯 ‘소멸’이라는 단어만 쓰여 있었다.

벗어나려 아무리 몸부림쳐 보아도, 손가락조차 꿈쩍할 수 없었다.

공포에 질려 눈물만 흘리고 있던 그때였다.


“로렐라 님.”

작고 보드라운 손이 내 손을 꼭 잡는 게 느껴졌다.


“괜찮아요. 저예요.”

나를 덮친 어둠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세상에, 이렇게 진땀을 흘리시다니…….”

“……세이블?”

익숙한 목소리에 무겁게 감긴 두 눈을 힘겹게 떠보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눈을 덮어 주었다.


“괜히 일어나실 필요 없어요. 아프다고 하시기에 걱정이 되어 잠시 들렀어요.”

이상한 말이었다. 세이블의 저택과 우리 집은 잠시 들를 만한 거리가 아닌데.

그러나 다른 생각을 이어 갈 틈이 없었다.


“세, 세이블. 실은 바이올렛…… 영애가…….”

나는 억지로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만 화상이라도 입은 듯 목 안쪽이 너무 아파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쉿. 지금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회복에만 힘쓰세요.”

나직이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마치 주문이라도 담긴 듯했다.

나는 또다시 까무룩 잠에 빠졌다.

그렇게 얼마쯤 잤을까.

이번엔 크고 서늘한 손이 내 이마를 짚는 게 느껴졌다.


“의사는.”

“아까 왔다 갔습니다. 그 이후로 다행히 차도가 꽤 있으셔서…….”

“다시 불러.”

“네?”

“아직 열이 있으니까. 아니, 아예 저택에 상주시키는 게 낫겠군.”

“……아, 알겠습니다. 공작님.”

눈으로 보지 않아도 집사를 당황케 한 사람이 누군지 알겠다.

나는 쉰 목소리로 방문객의 이름을 속삭였다.


“펠리어트……?”

놀란 듯 낮게 신음하는 소리가 울렸다.


“이런……. 내가 깨웠나?”

세이블에 이어 펠리어트까지 찾아오다니.

그냥 몸살이 난 것뿐인데, 여러 사람에게 괜한 걱정을 끼친 것 같아 미안했다.

펠리어트가 내 옆에 조심스레 앉는 게 느껴졌다. 실눈을 뜬 채로 그쪽으로 간신히 고개를 돌리자, 아주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펠리어트의 얼굴이 너무도 수척했다. 내가 아델리움에 떠나기 전보다, 훨씬 더.

심지어 안색 또한 파리하기 그지없었다.


“당신…… 괜찮아? 혹시 어디 아파……?”

그는 눈썹을 움찔하는가 싶더니 이내 낮게 중얼거렸다.


“……아픈 건 당신이지. 내가 아니라.”

안 그래도 차가워 보이는 눈매가 더욱 예리하게 변해 있었다. 손을 가져다 댔다간 그대로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턱선도 눈에 띄었다.

이마를 덮은 검은 머리가 마구 헝클어진 채였는데도, 서늘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로렐라, 미안해.”

뜬금없는 사과에 나는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뭐, 뭐가?”

“당신 허락 없이 찾아와서.”

덤덤한 어투였지만,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당신의 서신이 줄곧 신경 쓰였고, 무엇보다 아프다는 소식에 걱정되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 싫으면…… 금방 가도록 할게.”

“아니야, 괜찮아…….”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약 기운 때문인지 도저히 졸음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쌕쌕거리며 숨을 내쉬는데, 뜨거운 이마에 또다시 서늘한 손이 닿았다.

함부로 만지면 망가지는 조각품을 다루듯 조심스레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무척이나 기분 좋아서, 나는 안심하고 밀려드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로렐라.”

그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러자 펠리어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새 잠들었군.”

아니야, 아직 안 자는데…….

혹시 중요한 할 말이 있는 걸까 싶어 억지로 눈을 떠 보려던 그때였다.


“대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내게는 말 못 할 일인가?”

어느새 내 손을 꼭 잡은 그가 또다시 로렐라, 하고 중얼거렸다. 잡은 손에 점점 힘이 실리는 게 느껴졌다.


“……설령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겠지. 난 돌이킬 수 없는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른 사람이니까.”

비록 눈을 감고 있지만, 얼굴 위로 그림자가 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다가왔다.


“나를 평생 용서하지 않아도 좋아. 내 곁이 아닌, 다른 사람의 곁을 선택한다 해도 상관없어.”

한 마디 한 마디 속삭이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왜 자꾸만 상처 입은 짐승이 생각나는 걸까.


“그 대신 아프고 괴롭고 힘든 건……. 영원히 내 몫으로 달아 놔.”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잔잔한 파도처럼 귓가에 밀려들었다.


“그러면 당신은 그저 봄처럼 웃기만 할 수 있겠지.”

몰려오던 잠기운이 어느새 싹 달아났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눈을 뜰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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