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왜 내가 아닌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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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왜 내가 아닌 걸까?
2022.10.12.
“그자의 이름이 정말…… 위너드란 말이지……?”
샬로네즈가 밭은 숨을 내쉬었다.
화사한 장밋빛 드레스 덕분에 더욱더 돋보이는 아름다운 얼굴이 새하얗다 못해 창백해져 있었다.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샬로네즈의 혼잣말이란 것을 인지하지 못한 레이나가 마구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분명 제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그녀는 큰 소리로 격렬하게 부정했다. 그야말로 살기 위한 처절한 발악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스터 급을 넘어선 검술 실력에, 오라까지 발현했다고 했지.”
샬로네즈는 방금 전 레이나가 한 말을 그대로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당시 벨레드리안 제국의 황태자도 분명 같은 능력을 지녔다고 했어. 그래, 맞아. 왕궁에 갇혀 살던 내 귀에까지 여러 차례 들려왔을 정도로, 아주 유명했으니까.”
샬로네즈는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혼잣말을 이어 갔다.
“그렇다면 어째서 안내자가 된 걸까? 게다가 지금 벨레드리안 제국의 황제는…….”
이상함을 감지한 건 레이나뿐만이 아니었다.
고개를 갸웃대며 다가온 라그가 새카맣게 타 버린 손으로 샬로네즈의 팔을 슬쩍 잡으려던 그때였다.
그녀가 몸을 휙 돌리더니, 레이나 곁으로 재빠르게 다가갔다.
여전히 손에 들고 있는, 푸른빛이 맴도는 날카로운 검을 본 레이나가 움찔 어깨를 떨었지만, 샬로네즈는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레이나 아벤도트. 네가 만든 상단은 예전부터 외국과의 교역이 상당히 잦았다면서?”
샬로네즈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왜 이런 걸 묻는 걸까? 하지만 레이나는 그 어느 때보다 착실하게 대답했다.
“네. 주로 보석과 실크, 그리고 향료들을 거래했습니다.”
“분명 벨레드리안 제국과의 거래도 있었겠지. 벨레드리안 산 다이아몬드와 루비는 워낙 유명하니까.”
단지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기 그지없었지만, 레이나는 일단 눈앞의 샬로네즈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습니다. 특히 벨레드리안 북쪽 광산에서 나는 원석들은 상단의 주요 거래 물품 중 하나였지요.”
“그런 원석들은 벨리드리안 황실에서 무척이나 까다롭게 관리한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거래를 트게 되었지?”
‘이제 와서 내 상단에 관심이 생긴 건 아닐 테고, 혹시 벨레드리안 황실과 관계가 있는 일인가?’
뭐든 간에 상관없지. 지금은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만이 목표니까.
샬로네즈가 제게서 부디 쓸모 있는 부분을 발견한 것이기를 바라며, 레이나는 열심히 입술을 움직였다.
“샬로네즈 님 앞에서 이런 외람된 말씀을 입에 올리는 점을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아벤도트 가문은, 왕국뿐만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거부로 이름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곳의 유일한 상속녀이지요.”
“흐음, 그래서?”
“그 명성 덕분에 제가 직접 차린 상단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무척 많았습니다. 국내외 수많은 고위 귀족들과 인맥을 쌓을 수 있었죠. 그중에는 벨레드리안 제국 황실과도 연이 닿는 자가 있어서…….”
“황실과의 거래를 뚫을 수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물론 중개인이 있긴 했지만, 직접 거래한 거나 마찬가지였지요.”
샬로네즈가 더욱 짙은 미소를 흘렸다.
“그렇다면 벨레드리안 제국 황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겠구나.”
“네. 감히 샬로네즈 님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현 황제의 즉위식 행사에 초청받을 정도의 친분은 있었습니다.”
그녀의 상단은 벨리드리안 제국 황실뿐만이 아니라 그 나라 중앙 사교계를 주름잡는 여러 귀족들과도 거래했다.
공식 사절단 외에도, 즉위식에 초대해 자리를 빛내 줄 귀빈 명단에 그녀의 이름이 올라간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레이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당혹스레 입을 가렸다.
당시 샬로네즈 왕녀는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데뷔탕트 무대에서 쓰러진 터라 모든 사람의 걱정을 샀었는데, 그걸 깜빡하다니.
각국의 수많은 대표들이 모인 커다란 행사였고, 심지어 레이나도 초대를 받았을 정도였는데 본인만 빠지지 않았나.
샬로네즈 입장에서는 그때의 일을 입에 올리는 게 몹시 불쾌할 것이다. 어쩌면 으스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죄, 죄송합니다. 왕녀님.”
레이나는 겁에 질려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조아렸다.
“괜찮단다. 고개를 들렴. 그 이후에 이렇게 멀쩡히 잘 털고 일어났잖니.”
하지만 샬로네즈는 부드럽게 말하며 온화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히려 불안한 마음에 레이나가 애꿎은 입술만 짓씹던 찰나였다.
“좋아. 벨레드리안 제국 황실과 그토록 친분이 깊은 레이나 양, 어디 한 번 대답해 보렴. 네가 즉위식에서 보았던 그 남자가 누구지?”
아니나 다를까. 샬로네즈는 비꼬는 말투로 묘한 수수께끼를 계속 이어 갔다.
“에르헨…… 벨레드리안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가 황제로 즉위하기 이전에는?”
레이나는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에르헨 황제는 벨레드리안 제국의 유일한 황위 계승자 아닙니까. 그러니 즉위하기 전에는 당연히 황태자였을 터…….”
그런데 그 순간, 그녀의 입술이 그대로 굳었다.
에르헨 황제의 황태자 시절을 떠올리자마자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머릿속이 희미해졌다.
아주 생생한 꿈을 꾸긴 했는데, 눈을 뜨고 나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기분과도 비슷했다.
내가 왜 이러지?
어째서 아무 기억도 나질 않는 거야?
“아하하하핫!”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샬로네즈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벨레드리안 황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너조차 갑작스레 바뀐 황태자를 눈치채지 못했다니! 기억 속에서 소멸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아주 무서울 정도야!”
“……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레이나가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자 샬로네즈의 웃음소리가 더더욱 높아졌다. 한참 동안 배를 잡고 웃던 그녀는 이윽고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쓸며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런 경우는 딱 하나뿐이지, 그렇지?”
어쩐지 들뜬 왕녀의 목소리가 마치 환청처럼 느껴졌다.
“그 남자도 우리와 같은 처지였던 거야!”
“…….”
레이나는 피가 터지도록 입술을 깨물며 생각을 집중하려 애썼다.
자신이 혹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놓아 버린 게 아닐까.
“세상이 한순간에 뒤바뀐 게 나뿐만이 아니었다니……!”
샬로네즈는 가슴을 들썩이며 격한 호흡을 내쉬었다. 꽤나 흥분한 듯, 그녀의 양 뺨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샬로네즈 님. 죄, 죄송합니다.”
레이나는 죽을 죄를 졌다는 듯 고개를 황급히 조아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어렵습니다.”
샬로네즈는 이윽고 천천히 몸을 숙여 레이나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나는 사실 예전에 이 자리에서 죽었단다. 쌍둥이 언니였던 샬로네즈를 살리기 위한 제물이었지.”
“네……?”
할 수 있는 거라곤 멍청한 반문뿐이었다.
하지만 샬로네즈는 이해를 바라는 게 아닌 듯했다. 그녀는 마치 고해성사라도 하듯, 계속해서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였다.
“내가 죽기 전, 그 남잔 분명 벨레드리안의 황태자였어. 하지만 왕녀의 몸으로 깨어났을 때……. 그래. 혼수상태였던 왕녀가 눈을 떴을 때, 그 자리는 어느새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어 있더구나.”
샬로네즈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기 그지없었고, 태도도 무척이나 친절했다.
레이나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다른…… 사람이라니요?”
“에르헨 말이야. 그자가 위너드 황태자의 자리를 빼앗은 거지.”
“…….”
미친 건 내가 아니라 혹시 샬로네즈 왕녀가 아닐까.
혼란을 감추지 못하는 레이나와 달리, 샬로네즈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내게 기억이 남아 있는 건……. 위너드 황태자가 실패하기 전에 내가 먼저 죽었기 때문일 거야. 황태자는 곧바로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삭제됐고, 그 뒤 다시 내가 깨어난 거지. 온전한 기억을 갖고서 말이야.”
샬로네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 이미 죽은 자의 기억까지 소멸시킬 수는 없었던 거지.”
불그스름한 오팔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레이나를 빤히 응시했다.
“혹시 내 생각이 맞는지 네가 확인 한번 해 줄 수 있겠니?”
“네, 물론입니다!”
레이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비록 로렐라 메이레드를 죽이라는 임무에는 실패했지만, 샬로네즈는 아직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게 믿은 레이나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분부만 내려 주십시오! 이번에는 꼭 성공하겠습니다!”
“좋아.”
샬로네즈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면 나는, 한낱 왕녀가 아니라 이 세계의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게 해 달라고 빌 거란다. 하지만…… 네가 여기서 죽으면, 네 머릿속에는 여전히 왕녀로서의 모습이 남아 있겠지?”
“……네?”
그러나 그 미소는 곧 싸늘하게 변했다. 레이나의 두 눈에 공포가 차올랐다.
“그때 정말로, 나를 왕녀라고 기억하고 있는지 알려 주렴.”
샬로네즈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마치 사신의 낫처럼 날카로운 미소였다. 레이나가 두 눈을 부릅뜬 채 있는 힘껏 손을 휘저었다.
휘익!
매서운 소리와 함께 뜨듯하고 걸쭉한 액체가 벽에 튀었다.
“레, 레이나 님! 안 돼! 레이나……!”
등 뒤에서 그녀의 안내자인 듯한 누군가가 울부짖었지만, 샬로네즈의 귀엔 모기가 앵앵대는 소리보다도 더 하찮았다.
이윽고 그녀의 발밑으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얀 레이나의 손이었다.
“……뭐, 다시 살아났을 때 이야기지만.”
감정 없는 눈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며, 샬로네즈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싸늘한 시체를 뒤로 한 채 복도로 나서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언제나 그렇듯 처리는 그녀가 특별히 고용한 ‘심부름꾼’들이 맡아 줄 것이다.
돈이 많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일 처리에 빈틈이 없으니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수족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레이나가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는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지만, 레이나가 결코 실패만 한 건 아니었다.
“버러지가 마지막으로 밥값을 해 주고 가는구나.”
비틀린 붉은 입술 사이로 나직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위너드 황태자가 안내자가 되었다니.
샬로네즈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그녀도 ‘그 일’에는 늘 의문을 품고 있었다.
바로 옆 나라 황제가 순식간에 뒤바뀌어 버린 일 말이다.
샬로네즈는 가만히 과거를 회상했다.
‘왕녀님께서 깨어나셨다!’
‘아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왕녀님을 저희에게 돌려주셔서……!’
분명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깨어나니 주위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들은 샬로네즈가 황궁 무도회에서 춤을 추다 쓰러졌다는 것, 그리고 몇 개월 동안 줄곧 혼수상태였다는 것을 전부 낱낱이 이야기해 주었다.
그때 그녀는 자신이 샬로네즈 언니의 몸에 들어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라그를 만났고 말이야.”
“네?”
뒤에서 조용히 뒤따라오던 라그가 알은체를 했다.
샬로네즈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건강을 회복하는 대로, 국정에 조금씩 참여하려무나.’
왕의 명령에 그녀는 몹시 기뻐했다.
안 그래도 나랏일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에게는 매우 기꺼운 명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샬로네즈의 몸을 차지한 보람을 마음껏 누렸다.
머저리인데다가 기분파이기까지 한 왕과, 제 목이 잘릴까 두려워 천치처럼 입을 꾹 다물고만 있는 신하들 사이에 가교 역할을 자처했다.
무척이나 미미했던 그녀의 존재감은 금세 커졌다.
각종 기밀을 다루는 중요한 회의에, 왕녀가 참석하는 것을 반대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민감한 정치적인 사안에서도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고, 주요 왕궁 사람들을 제 휘하로 끌어들였으며, 그렇게 해서 조금씩 권력을 잡아 갔다.
정세를 파악하던 샬로네즈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바로 옆 나라 황제가 뒤바뀌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정말이지 너무 이상했어. 갑자기 옆 나라 황제가 에르헨 벨레드리안이라지 뭐야. 그 이름은 들어 본 적도 없는걸.”
샬로네즈는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라그를 내버려 두고 혼잣말을 이어 나갔다.
“게다가 그토록 칭송이 자자했던 위너드 루베헨 벨레드리안을 아무도 기억하질 못하다니.”
왕궁 내 신하들을 은근슬쩍 떠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다들 자신을 이상한 사람 보듯 했다.
한 번 혼수상태에 빠진 전적이 있으니, 혹시라도 후유증이 남은 게 아니냐며 걱정을 사기도 했다.
결국 해답을 찾을 수 없었지만 샬로네즈는 의구심을 잠시 마음속 깊은 곳에 밀어 놓았다.
주인공 후보로서 경쟁에 뛰어든 이상,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에 사력을 쏟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남의 나라 황제가 왜 뒤바뀌었는가에 대해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그래. 분명 그랬었는데.
“대체 내가 혼수상태였던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벨레드리안 황실의 태양이라는 별칭을 가진 남자. 위너드 루베헨 벨레드리안.
사실 그 이름은 왕궁 내 가장 은밀한, 사람들의 발길이 좀처럼 닿지 않는 구석진 곳에 갇혀서 자랐던 그녀에게도 익숙했다.
하녀들은 물론, 유모에게서도 간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화술에 능하시고, 외교술은 물론 지략도 엄청 뛰어나시다고 해요. 제국의 황제께서도 그분을 아주 아끼신답니다.’
‘왕실 기사단에 들어간 제 동생이 그러는데, 황태자의 검술은 가히 천재적이시래요. 대륙에서도 섣불리 견줄 자가 없답니다.’
이야기 속 그는, 모든 것이 완벽할뿐더러 외모마저도 출중한 남자였다.
‘드넓고 풍요로운 가을 녘의 대지처럼 부드러운 갈색 머리를 지니셨지요. 사절단의 시중을 들기 위해 함께 갔던 하녀의 말에 의하면, 먼발치에서 봐도 빛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라고 하셔요.’
‘게다가 그분의 눈동자는 여름날의 신록보다 눈부신 에메랄드빛이랍니다. 왕녀님께서도 분명 한 눈에 반하실걸요.’
말만 들어도 어쩐지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그 늠름하고 멋있는 황태자의 배필은 바로 왕녀님이 될 거라는, 꿀 바른 것처럼 다디단 아첨을 얼마나 철석같이 믿었던가.
그러니까 어서 건강해지셔야 한다고, 스무 살 생일만 지나면 모든 저주가 풀릴 테니 그때까지만 참으면 된다는 그들의 말에 아무런 의심조차 품지 않았다.
언젠가 자신을 데리러 올, 옆 나라 황태자의 근사한 자태를 머릿속에 그려 가면서.
……물론 그녀들의 말처럼 진짜 황태자의 배필로 거론되었던 건, 자신이 아니라 샬로네즈였다는 사실 역시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좋은 건 다 그녀의 것이었으니까.
샬로네즈는 계속해서 복도를 걸었다. 고요와 적막만이 맴도는 공간 속에서, 그녀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아까 레이나 앞에서 ‘그 남자도 우리와 같은 처지였다’라고 외쳤던 것이 떠올랐다.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섣불리 단정 지은 말은 아니었다.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기억 속에서 ‘소멸’되지 않았나.
그녀가 알기에 이런 경우는 딱 하나뿐이었다.
“위너드 황태자가 정말 실패한 주인공 후보였던 걸까.”
샬로네즈는 평이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워낙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들어 왔기 때문일까. 그가 주인공 후보였다는 사실은 의외로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안내자로 다시 살아났다는 게 더욱 충격적이었다.
이윽고 밖으로 향하는 문 앞에 선 샬로네즈가 문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돌렸다.
끼익 소리와 함께 작게 열린 틈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빛은 양지에서 사랑받으며 온갖 좋은 것을 독식하던 샬로네즈를 떠올리게 했다.
그래. 애초부터 좋은 건 모두 샬로네즈 차지였다.
그리고 이제 샬로네즈는 저였다.
“그런데 왜…….”
그녀는 더없이 환한 빛을 받으며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남자가 내 것이 아닌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