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누구의 안내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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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누구의 안내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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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누구의 안내자라고?
2022.10.08.
새카만 밤하늘 끝자락이 그새 희끄무레한 남빛으로 물들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수평선 너머의 색도 울긋불긋 변하기 시작했다.
바다는 그저 잔잔하고 고요했다.
물살 따라 둥둥 떠다니는 마물의 살점과 다 바스러진 갑판의 잔해만이 간밤의 격렬했던 사투를 말해 주고 있었다.
“어이! ……셀!”
멀리서 커다란 배가 이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다가왔다. 갑판 위에서 누군가가 무어라 외치며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바람도 전혀 불지 않는데, 뒤에 모터라도 달았나 싶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이 세계에 설마 내가 모르는 다른 기술이라도 있는 걸까?
하지만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배 후미에서 무언가가 퍼엉! 터지자마자 배가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폭발로 인해 생기는 거센 바람을 받는 것 같았다.
발을 동동 구르며 계속해서 손을 흔들던 남자의 목소리가 점차 명확하게 들려왔다.
“카셀! 카세엘……!”
쿠웅.
금세 선미가 부딪혔다.
판자를 이어 만든 다리가 순식간에 펼쳐졌다.
“인마, 무사했구나!”
나는 듯이 건너온 한 남자가 눈물을 글썽이며 다짜고짜 카셀을 덥석 껴안았다.
덜 익은 밀처럼 옅은 갈색 머리카락과, 말간 연둣빛 눈동자.
전체적으로 색소가 옅어 흐릿한 이미지였으나 어디 가서 뒤지지 않을 정도로 잘생긴 남자는, 나도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네가 갑자기 바다로 날아가 버려서 정말 얼마나 식겁했는지!”
바로 카셀의 오른팔인 시드였다.
“그런데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세상에……!”
카셀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그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다 부서진 배와 주변에 널린 잔해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신음했다.
그러다 몸에 화살이 박힌 길드원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델! 너는 왜 이렇게 된 거야!”
시드는 뒤따라 배에 올라타는 길드원을 향해 급히 손짓했다.
“빨리 치료해 줘!”
길드원 한 명이 작은 상자를 들고는 그녀에게로 빠르게 다가갔다.
시드는 카셀의 어깨를 안고 또다시 눈물을 글썽였다.
“넌 무사한 거 맞지?”
“아, 좀 떨어져. 징그럽게.”
그런 그를, 카셀은 무심하게 밀어 냈다.
“와, 이 매정한 놈! 내가 너를 구하러 오느라고 지금 마력이 담긴 병을 몇 개나 바다에 던져 댔는지 알기나 해? 그게 다 얼마…….”
기분이 상했는지 마구 불평을 늘어놓던 시드가 문득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이쿠,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습니까?”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는 언제 카셀과 아웅다웅했냐는 듯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넉살 좋게 인사를 건넸다.
“아, 네에. 더, 덕분에요.”
어색한 인사를 나눈 것도 잠시.
“어어?!”
이번엔 내 옆에 서 있는 위너드를 보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남자, 혹시……!”
그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카셀의 어깨를 마구 두드렸다.
설마 위너드를 본 적이 있나?
오래 지나지 않아 시드가 예전에 후작 저택에서 의사 행세를 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곳에 함께 조사를 받으러 갔을 때 봤었나 보다.
“잘 만났다!”
위너드를 대하는 시드의 태도 역시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카셀의 원수는 곧 나의 원수!”
“……하아.”
그 모습에 위너드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황스럽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 안내자는 아무래도 길드에서 완전 유명 인사가 된 모양이다.
“안 됩니다!”
그때, 치료를 받고 있던 아델이 시드를 급히 만류하고 나섰다.
“시드 님은 상대가 안 돼요. 그러니 절대 나서지 마십시오.”
“어? 뭐라고?”
“저는 분명 경고했습니다.”
“……그, 그 정도야?”
아델은 다시 한번 위너드를 힐끔 쳐다보더니 시드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닥거렸다.
“허어? 호오…….”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을 흘린 것도 잠시.
시드는 이윽고 구겨진 옷을 양손으로 쫙 펴며 헛기침을 했다.
“흠, 흠.”
그러고는 이쪽으로 다가와 위너드를 향해 갑자기 오른손을 척 내밀었다.
“자네.”
언제 적개심을 드러냈냐는 듯 시드의 입술 사이로 하얀 건치가 반짝였다.
“우리 길드에서 일해 볼 생각 없나?”
위너드가 어이없는 얼굴로 그 손을 내려다본 동시에, 누군가가 뒤에서 시드를 발로 걷어찼다.
“이 미친놈이! 지금 얻다 대고 영업을 하는 거야!”
“으아아아! 아, 아파! 아프다고!”
카셀의 씩씩대는 숨소리와 함께, 갑판 위를 데굴데굴 구르는 시드가 보였다.
갑판 한쪽에서 해적들을 포박하던 길드원들은 그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이내 다시 바쁘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런 일이 꽤 자주 있는 모양이다…….
“하, 내가 살다 살다 별…….”
또다시 푸욱 한숨을 내쉬는 위너드와, 여전히 심기가 무척 불편해 보이는 카셀 사이에서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어떻게든 이 분위기를 정리해야 할 텐데.
으음, 어떻게 하면 좋지?
다행히 고민은 금세 해결되었다.
저 멀리서 또 다른 범선 한 척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게 시야에 들어온 덕분이었다.
“아야야…….”
시드도 그걸 발견했는지 인상을 찡그린 채 허리를 두드리며 다가왔다.
“저 배는 또 뭐야……?”
품에서 망원경을 꺼내 그쪽을 유심히 살피던 그의 입에서 깜짝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라? 세실리카 제국과 아델리움 제국의 깃발이 같이 달려 있는데?”
“이리 줘 봐요.”
나는 그의 손에서 빼앗듯 망원경을 받아들었다.
동그란 렌즈 너머로, 익숙한 깃발들이 휘날렸다.
“저건 레어넌 단장님이 타고 있는 배가 틀림없어요.”
내 말에 시드가 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단장님이요? 레, 레어넌 베르하르트요?”
“네. 아델리움 항구에서 두 척의 배가 연달아 출발했었거든요. 하나는 사절단들을 위한 거고, 나머지 하나는 아델리움 병사들과 함께 레어넌 단장님이 탑승했어요.”
“그런데 왜 여기로 다가오는 걸까요?”
“따라오다 사고 난 배를 발견한 게 틀림없어요. 제가 사라진 것도 이미 알고 있을 테고요.”
“아잇! 그럼 큰일인데.”
시드가 발을 동동 구르며 카셀을 다급히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있어 ‘레어넌 베르하르트’라는 이름은 매우 껄끄러운 것일 테니까.
카셀이 재빨리 입술을 열었다.
“즉시 철수한다.”
“그래, 그게 좋겠어.”
나 또한 얼른 그의 말에 동의했다.
길드의 배가 이런 곳에 있는 걸 보여 줄 순 없었다.
길드원들이 더욱 신속하게 움직였다.
“해적들은 우리가 데려갈게. 이 중에 누군가가 밤새 목격했던 것을 행여나 발설하면 안 되니까.”
이어진 카셀의 말에 해적들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마구 비볐다.
“히익! 제발 살려 주십시오!”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델.”
대충 정리가 끝난 사이, 나는 마력을 써서 줄곧 레아의 대역을 맡아 준 길드원에게 다가갔다.
“미안해요, 이렇게 다치게 만들어서…….”
“아무렇지 않습니다. 이 정도 부상은 흔한 것이니까요.”
그녀는 딱 잘라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붕대가 칭칭 감긴 환부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혹시, 납치되었을 때…… 무언가 들은 게 없나요?”
“네?”
“이 일을 벌인 여자의 신원을 특정 지을 만한 것들 말이에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루에 갇혀 있을 때, 사람들이 나눈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그걸 이용하면 충분히 정체를 밝혀 낼 수 있을 듯합니다.”
“좋아요. 그럼 부탁할게요.”
“맡겨만 주십시오, 로렐라 님.”
아델이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머지 길드원들과 함께 배에 올랐다.
가녀린 체구와 어울리지 않게 날카로운 눈빛이 퍽 인상적이었다.
풍기는 분위기라든가 하는 행동을 보았을 때 카셀이 굉장히 신임하는 부하가 틀림없었다.
그런 부하를 보내 준 것이 고마웠고, 그렇기에 더더욱 미안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누나. 우리는 이런 일을 자주 겪으니까.”
카셀이 아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곁으로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내가 무엇 때문에 마음을 쓰는지 눈치챈 게 틀림없었다.
“이것보다 훨씬 위험한 임무도 엄청 많다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그의 팔과 얼굴에는 군데군데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파도를 타고 날아와 떨어졌을 때 생긴 게 틀림없었다. 내가 쿠키로 부르지만 않았더라도…… 다치지 않았을 텐데.
“누나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하지만 카셀은 오히려 밝게 웃었다.
누나, 누나 거리며 언제나 애교를 부리던 그가, 어찌 된 셈인지 지금은 무척이나 듬직하게 느껴졌다.
이보다 더 위험한 일도 많다니. 대체 얼마나 큰일을 겼었던 걸까? 앞으로 혹시 크게 다치는 일이 생기면 어쩌지?
마음속에 수많은 말이 차올랐지만, 나는 그저 이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고마워, 카셀. 그리고…… 미안해.”
“응? 아, 아니야.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카셀은 왜인지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아프겠다…….”
멍든 부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마구 휘젓던 그의 손이 멈췄다.
카셀은 무언가를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가슴을 움켜쥔 채 신음했다.
“윽……!”
“어? 왜, 왜 그래?”
깜짝 놀라 카셀을 부축했다. 단단하고 커다란 몸이 기다렸다는 듯 내게 기대 왔다.
“나 갑자기 너무 아파. 아파서 죽을 것 같아.”
“뭐? 진짜!?”
“응. 그러니까 누나가 치료해 줘.”
루비처럼 예쁜 눈동자가 날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누나만 괜찮으면, 매일 밤 치료받으러 갈까……?”
유혹하듯 속삭이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려던 그때였다.
“……크흠.”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주먹 쥔 손을 입가에 댄 채 서 있는 위너드가 보였다.
“안 갈 거야?”
“…….”
“지금 안 가면 레어넌 단장에게 잡힐지도 모르는데.”
위너드는 손을 뻗어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커다란 범선 쪽을 태연하게 가리켰다.
걱정하는 듯한 말과는 달리, 굉장히 여유로운 태도로.
카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하며 위너드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곧,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짜증스러운 손길로 머리를 거칠게 넘겼다.
“……즈금 글그그든.”
잇새 사이로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두 사람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잠시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금…… 아니 상당히 살벌한 눈빛 사이로 수많은 대화가 오고 가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뭔가 둘이…….
“친해졌나……?”
나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린 순간.
“누가 저 X끼랑!”
“미치지 않고서야!”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격렬한 항의를 쏟아 냈다.
* * *
새카만 잿빛을 띠는 지붕 위로 스산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몇백 년에 걸쳐 파이고 깎인 흔적으로 가득한 벽은 온통 울퉁불퉁했다.
아델리움 왕궁 내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지라, 이 건물에는 좀처럼 볕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끔찍한 일이 자행되고 있는 석실은 지하에 위치해 춥기까지 했다.
“……크윽.”
여자가 신음할 때마다 붉은 피가 차가운 석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파르르 경련하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다.
예쁘게 손질되었던 손톱은,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바닥을 긁어 댄 통에 엉망으로 헤지고 말았다.
“쯧.”
여자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샬로네즈가 마뜩잖은 듯 혀를 찼다.
“그냥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괜한 시간 낭비를 했어.”
“…….”
“마물을 풀어 놓고 오면 그걸로 끝이야? 내가 지시한 일은 그게 아니었을 텐데.”
레이나는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송구함 때문이 아니라, 온몸에 힘이 없어 저절로 수그러든 것이었다.
마물을 간신히 피한 뒤에도, 집채 같은 파도를 몇 번이나 넘어야 했다. 손바닥만 한 구명정에 매달리다시피 한 채 간신히 아델리움으로 돌아왔을 때, 레이나는 이미 초주검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샬로네즈는 이미 그녀의 실패를 보고받은 듯했다. 사람을 따로 붙인 게 틀림없었다.
인적이 드문 해변을 골라 배를 댄 레이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다름 아닌 잘 훈련된 괴한들이었다. 그녀는 저항할 틈도 없이 개처럼 샬로네즈 앞으로 끌려왔다.
“날 도울 사람은 자기뿐이라더니.”
샬로네즈가 싸늘하게 웃으며 사뿐사뿐 다가왔다.
“별것도 아닌 게.”
그녀의 손에서 날붙이가 서늘하게 빛났다.
변명할 틈이나 만회할 기회는 주지 않겠다는 듯이.
“로렐라 메이레드의 안내자…….”
레이나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입을 열었다.
“그자가 상당히…… 능수능란했습니다. 시스템의 허점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듯한…….”
평소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레이나였으나, 지금은 살기 위해 지리멸렬한 변명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어떤 안내자도 가지지 못한 힘을…… 지녔어요. 검술은 마스터 급을 넘어선 듯 보였고, 거기에 오라 능력까지 발현시키는 걸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 말에 샬로네즈의 뒤에 조용히 서 있던 라그의 목이 또다시 기괴하게 꺾였다.
같은 안내자로서, 그런 능력을 지닌 자가 있다는 소리는 그녀도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마스터 급의 검술 능력을 지닌 안내자?”
샬로네즈가 비웃듯 속삭였다.
“들을 가치도 없는 변명이구나.”
“저, 정말입니다. 그자는 분명 로렐라 메이레드의…… 안내자였어요. 위너드라는 이름의……!”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보란 듯이 귀를 문지르던 샬로네즈의 손이 멈추었다.
“……뭐라고?”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은 레이나가 고개를 바짝 세웠다.
“그게 그자의 이름입니다……!”
고통을 견디느라 어눌해진 말투도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왔다.
희망이란 그런 것이었다.
고작해야 바늘 하나 들어갈락 말락 할 틈이 생긴 것뿐인데, 또다시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삽시간에 피어올랐다.
게다가 그저 기분 탓이라고 하기엔, 어쩐지 샬로네즈의 상태가 영 이상했다.
“방금 뭐라고 했니……?”
예쁜 주홍빛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위너드라고? 그자가…… 안내자라고?”
레이나는 몹시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샬로네즈가 이처럼 동요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사람을 죽일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그녀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