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장난은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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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장난은 여기까지다
2022.09.24.
“살아 돌아갈 생각은 말아라.”
해적들이 눈을 사납게 번뜩이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어두운 밤하늘 위로 날카로운 무기들이 섬뜩하게 빛났다.
잘 벼린 검과 도끼, 그리고 끝이 뾰족한 갈고리 창과 두꺼운 못이 잔뜩 박힌 기다란 철퇴까지.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을 입을 것 같은 흉악한 무기들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게다가 하나같이 핏자국으로 추정되는 검은 얼룩이 가득 묻어 있었다.
하지만 위너드는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아니, 오히려 여유로운 미소가 더더욱 짙어졌다.
그것이 해적들을 더 자극하는 듯했다.
“네놈 사지를 자른 뒤, 마지막으로 눈깔을 뽑아 주지.”
흉악한 내용만큼 어마어마한 살기가 느껴져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 정도였다.
“……바다의 망령에 관한 미신이 사실이었나.”
내내 웃던 위너드의 미간이 찌푸려진 건, 누군가가 이렇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뭐?”
“조심해라. 근처에 유령선이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얼씨구.”
해적들끼리 주고받는 소리에 위너드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망령은 누가 망령이라는 거야.”
탐탁지 않게 중얼거린 그가 이내 허리춤에 찬 은빛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더니 어느새 검날 위로 일렁이는 붉은 오라를 바라보며, 감격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옛날 생각나네.”
이쪽을 향해 다가오던 해적들이 순간 멈췄다. 위너드와 그의 검을 번갈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살의 이외에도 신중함이 엿보였다.
“너 미쳤어?!”
나는 그 틈을 타 위너드의 앞을 재빨리 가로막았다.
그가 몇 명인지 셀 수도 없는 해적들에게 맞서 싸우려 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안 돼, 안 돼! 절대로 끼어들지 마!”
왜 그러냐는 듯 한쪽 눈썹을 살며시 치켜올린 그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한 채 격렬하게 외쳤다.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징계라도 받으면……!”
“징계라니 무슨 소리야.”
위너드는 여전히 태연자약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 주인공 후보가 어디 있다고.”
“……어?”
“내 눈엔 안 보이는데, 혹시 너는 봤어?”
그러더니 능청스럽게 윙크하며 속삭였다.
“보아하니 얘들은 주인공 후보가 뭔지도 모르는 해적들인데.”
“그, 그건…….”
확실히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러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위너드는 더더욱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안내자 규칙 3조 3항, 안내자는 후보의 주식 판매량에 직접적으로 개입해선 안 된다. 4조 2항, 안내자는 후보들 간의 다툼에 끼어들어선 안 된다.”
말이 끝나자마자 검에 두른 붉은 오라가 더욱 강렬히 타올랐다.
“그리고 6조 1항. 자신의 후보가 위험에 처했을 때, 후보를 지키기 위한 개입은 허락된다.”
여전히 입술을 소리 없이 벙긋대는 나를 돌아보며, 위너드가 활짝 웃었다.
어때. 나 잘 외우지?
만면에 가득한 뿌듯한 표정이 꼭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뭘 속닥거리고 앉았어!”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기 띤 고함이 어둠을 갈랐다.
“저것들을 죽이지 못하면 네놈들의 모가지를 대신 잘라 버리겠다!”
날카로운 검을 타고 흐르는 붉은 빛을 멍하니 바라보던 해적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검을 곧추세웠다.
“죽여라!”
사납게 외친 해적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맹렬한 발소리에 나도 모르게 몸을 떨던 그때였다.
파앙!
돌풍과 함께 사방으로 붉은 기운이 뻗쳐올랐다. 눈가리개를 썼다 벗는 바람에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이 눈앞을 뒤덮었다.
“으아악!”
덕분에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지 못했다. 그저 사방이 떠나갈 듯 커다란 비명만이 들려올 뿐.
쿵! 쿵!
“악!”
“크억!”
육중한 무언가가 갑판에 떨어진 듯 요란한 진동이 느껴지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허겁지겁 머리를 쓸어 올렸다.
“끄으윽…….”
엉망으로 부서진 나무통을 끌어안고 신음하는 해적들이 보였다. 발밑으로 투명한 액체가 흘러들었고, 지독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뭐, 뭐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말을 더듬었다.
“아, 못 보다니…….”
위너드가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지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새가 없었다.
“주, 죽어라!”
“고작 한 명뿐인데 뭘 망설여!”
공포를 감추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 낸 함성이 밤하늘을 갈랐다. 쓰러져 있는 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짐승처럼 달려왔다.
휘익!
위너드가 그대로 팔을 휘두르자 기다란 날이 허공을 갈랐다.
어두운 밤하늘 위로 붉은 오라가 유려한 곡선을 덧그렸다. 그것도 잠시, 빛은 이내 거대한 물보라처럼 해적들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갔다.
이번엔 똑똑히 보았다.
나는 땀이 배어나는 주먹을 꼭 쥔 채 그 광경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으로 좇았다.
“버텨라!”
해적들은 손에 들고 있던 각종 무기를 휘두르긴커녕, 그저 그것으로 앞을 막기에 급급했다.
심지어는 부서진 술통을 방패로 이용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전부 소용없는 발악이었다.
경쾌한 파열음과 함께 또다시 하늘에서 마치 불화살과도 같은 눈부신 오라가 쏟아져 내렸다.
“어억!”
마치 거센 태풍을 직격으로 맞은 것처럼 해적들의 몸이 갑판 위를 이리저리 굴렀다.
“사, 살려 줘!”
어디선가 들려오는 유독 처절한 비명에 시선을 돌렸다.
흡사 발레리나처럼 바닥을 발끝으로 토도독 박차면서 애처롭게 버티던 사내가 붉은 빛을 타고 허공으로 떠오르는 게 보였다.
황소처럼 커다란 몸이 공중에서 종잇장처럼 나풀거렸다. 출렁거리는 파도 위에 떠 있는 야자 껍질 같기도 했다.
뭐가 되었든 간에 너무나도 기상천외한 모습에 절로 입이 벌어진 것도 잠시.
그를 가지고 놀던 빛은 남자를 고무공처럼 위로 띄우더니, 그대로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그와 동시에 남자는 여기저기 쓰러져 끙끙대는 동료들 위로 추락했다.
“으아악!”
쿵!
“꿱!”
“끄악!”
낭떠러지에서 바위가 떨어진 듯한 진동과 함께, 커다란 몸에 짓눌린 해적들의 입에서 돼지 울음소리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허으…….”
떨어진 놈이나 깔린 놈 모두 입에 거품을 문 채 사지를 바르르 떨어 대더니, 이내 추욱 늘어졌다.
위너드는 딱딱하게 굳어 버린 해적들을 향해 나직한 한숨을 흩날렸다.
“이거 검을 맞댈 가치도 없잖아.”
실망이 역력한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스친 동시에, 또다시 그의 검이 붉게 타올랐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선명한 붉은 빛이 주변을 물들였다.
“이제 놀아 주는 건 여기까지…….”
“꽤나 거친 안내자를 가지고 있네.”
그때, 싸늘하면서도 표독스러운 목소리가 위너드의 말허리를 잘라냈다.
나는 홀린 듯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갑판 뒤쪽의 어둠 속에서 한 여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뾰족한 하이힐과 풍성한 드레스, 그리고 레이스 장갑을 낀 채 검을 쥔 손이 차례차례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그녀의 전신이 밝은 불빛에 오롯이 드러났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렇게 기어오를 수 있을까?”
검은색인지 남색인지 잘 구분되지 않는 짙은 색깔의 머리카락과 달처럼 반짝이는 은빛 눈동자, 그리고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얀 피부까지.
화려하면서도 아름답지만, 마치 독버섯처럼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아름다운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뒤틀린 미소가 퍼져 있었다.
……또 다른 주인공 후보다.
나는 그녀의 정체를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윽고 내 시선은, 여자의 옆에 서서 질린 얼굴로 위너드를 바라보는 남자에게로 가 닿았다.
“흐음, 어떻게 된 거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런 건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능력이 아닌데…….”
위너드가 해적들과 맞붙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본 모양이었다.
남자는 귀족이라고 하기엔 조금 수수하지만, 해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깔끔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무기라고는 쥐어 본 적도 없을 것 같은 왜소한 체구였으나, 아까부터 우리를 탐색하는 듯한 눈빛만큼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아마도 저 여자의 안내자겠지.
“너로구나.”
나는 위너드 앞을 급히 막아서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온갖 지저분한 수작을 저지른 범인이.”
하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뒤에 선 남자들을 향해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죽여.”
나와의 통성명 따윈 필요치 않다는 듯, 간결하고 잔인한 말이 떨어졌다.
여자의 뒤에 도열해 있던, 검은색 옷을 갖춰 입은 남자들이 우리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그중 맨 앞에 서 있던 자가 새파랗게 빛나는 검을 빼 들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절대 나서지 마.”
뒤에 있는 위너드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하지만 단호하게 속삭였다.
그러고는 입술을 꼭 깨문 채 뒤로 물러나지 않기 위해 두 다리에 힘을 주며 버텼다.
‘방금 전 해적들과는 달라.’
혹시 암살을 전문으로 하는 집단인 걸까. 뭐든 간에 중요한 건, 해적들과의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피부로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내 예상이 맞았는지, 뒤에 서 있는 위너드가 딱딱하게 몸을 굳히는 게 느껴졌다.
그가 크게 숨을 들이쉴 때마다 단단하면서도 너른 가슴팍이 등 뒤에 살짝 닿았다.
“움직이지 마!”
비록 뒤에 서 있어서 보이진 않지만, 위너드가 팔을 움직인 듯했다.
괴한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며 날카롭게 외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여자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나서지 말라고 했어.”
나는 다시 한번 싸늘하게 어르며 뒤로 얼른 팔을 뻗어 차갑게 식어 버린 위너드의 손을 꼭 잡았다.
이쪽을 지켜보던 해적들이 의아하다는 듯 웅성거렸다.
“저놈은 왜 갑자기 얌전하지?”
그도 잠시. 이내 키득거리면서 비웃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겁이라도 집어먹었나 본데?”
“덤벼 봤자 죽을 거라는 걸 깨달은 거겠지!”
……무슨 수를 써야 한다.
절대로 위너드가 끔찍한 징계를 받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정신을 집중했다.
뭘 하면 좋을까.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저놈 모가지는 우리에게 주시오.”
“으하핫! 뱃머리에 걸어 주자고!”
띵동!
띵동!
그때였다.
천박한 조롱을 뚫고 요란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 구역 주접킹’ 님이 기둥뿌리를 뽑아 모든 코인을 몰빵합니다!」
「우리언니(于里言尼) 가만도라(家萬道裸) 건들이면(建㐦以面) 삭다죽여(削多竹女).」
「보상으로 보너스 쿠키가 구워졌습니다.
받으시겠습니까?
1. 네.
2. 아니요.」
“어?”
나는 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쿠키.
……쿠키다!
주인공 후보로 발탁된 이후, 초반에 두어 번 쓴 것을 제외하고 한 번도 쓰지 않았던 바로 그것.
순간 망설여졌다. 몇 번 써 보진 않았지만, 쿠키는 내가 원하는 보상만을 주는 물건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불에 탄 혼인 서약서라든가, 부서진 문이라든가……. 심지어 주접킹의 쿠키는 절대로 안 부러진다던 그네를 부러트려 레어넌의 품에 강제로 뛰어들게 한 것도 모자라 입술까지 맞대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공교롭게도 주접킹의 쿠키 보상이다.
……그러나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가 검을 치켜올리며 잔인한 미소를 흘렸다.
“미안하지만 개인적인 원한은 없……!”
나는 그의 말허리를 끊어 내며 날카롭게 외쳤다.
“쿠키 사용!”
허공을 가르려던 손이 굳었다.
“……뭐? 쿠키라니?”
휘이익!
중얼거리던 입을 채 다물기도 전, 무언가가 매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뭐, 뭐야?!”
괴한의 눈이 휘둥그레진 것도 잠시.
퍼어억!
커다란 물고기 꼬리 같은 게 그를 후려쳤다.
뼈가 으드득 부러지는 소리가 귓가에 선득하게 내려앉았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나는 눈조차 깜빡일 수 없었다.
“으아아아악!”
커다란 비명과 함께 남자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강냉이 여러 개가 마치 하얀 점처럼 공중에 흩뿌려졌다가 이내 발밑으로 떨어졌다.
“살려 줘어어어억!”
풍덩!
하얀 포말이 인 물이 치솟으며 비명이 뚝 끊겼다.
동시에 내 발아래로 육중한 무언가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으앗!”
놀라 주저앉을 뻔한 나를, 위너드가 뒤에서 낚아채어 끌어안아 주었다.
나는 멍하니 서서 정체불명의 물건을 살폈다.
“허억…….”
잇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머리부터 거꾸로 처박힌 그것은, 다름 아닌 돛 꼭대기에 달려 있던 쇠로 만든 인어 동상이었다.
부서진 갑판 위로 삐쭉 튀어나온 꼬리가 보였다. 몸통과 꼬리 사이에 나 있는 옴폭한 홈에 돛과 연결된 밧줄이 칭칭 감긴 것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부채처럼 활짝 펼쳐진 꼬리 정중앙에, 마치 사람 얼굴처럼 보이는 흉측한 자국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저, 저거 방금 전에 찍힌 건가 봐.”
그렇게 말하며 위너드를 돌아보았다.
“…….”
대답 대신, 남자답게 튀어나온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꿀꺽.
마른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거센 바닷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왔다. 그러나 수십 명이 넘게 서 있는 갑판 위에는 그저, 찬물을 끼얹은 듯 차가운 침묵만이 맴돌 뿐이었다.
동시에 어디선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