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어디다 더러운 손을 대 (128/173)


128화. 어디다 더러운 손을 대
2022.09.21.



 


“귀빈들을 지켜라!”

부지휘관에게 신신당부를 건넨 지휘관은 선장과 함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그가 내려가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맙소사. 저, 저기……!”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주교가 떨리는 팔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불이야!”

누군가의 고함을 시작으로, 갑판은 더욱 혼란해졌다.

지휘관은 선장과 함께 금세 다시 나타났다. 이 배의 책임자나 다름없는 두 사람의 표정은 무섭도록 굳어져 있었다.

미처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선장이 선원들에게 재빠르게 지시했다.


“구명정을 내려라!”

그 말에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선박 가장자리에 매어 놓은 구명선이 일제히 수면 위로 떨어지자, 희미한 어둠 속에서 하얀 물보라가 치솟았다.

위급한 상황에도 선원들은 허둥지둥하지 않고 능숙한 솜씨로 밧줄 사다리를 배 아래로 늘어뜨렸다.


“지휘관님!”

사절단은 그의 곁으로 우르르 달려왔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배 하부에 구멍이 뚫렸습니다. 화재까지 난 걸 보면, 내부의 사고일 수도 있겠습니다.”

“허어, 어떻게 이런…….”

주교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때, 침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로렐라 메이레드였다.


“구명정은 몇 척이나 있죠? 선원과 병사들까지 모두 탈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탈출용 배는 충분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디 한 명도 빠짐없이 옮겨 탈 수 있도록 해 주세요.”

태양처럼 붉은 눈동자가 고요히 타올랐다.


“예. 맹세하건대, 모두 안전히 대피시키겠습니다.”

지휘관은 고개를 끄덕인 후 큰 목소리로 외쳤다.


“어서 레이디를 모셔라!”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두 명의 선원이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어느새 탈출 채비를 모두 마친 듯, 어깨에 짧은 케이프까지 두른 차림이었다.

하지만 로렐라는 사절단 사람들을 바라보며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아니라 다른 분부터…….”

하지만 선원들은 그 말을 가볍게 자른 채 로렐라의 양팔을 잡았다.


“다른 분들도 차례로 모시겠습니다.”

“먼저 탈출하셔야 나머지 분들이 뒤따라오시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다소 강압적으로 그녀를 난간에 걸친 사다리 쪽으로 끌고 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휘관은 잠시 의문에 잠겼다.

아래층에 들어차기 시작한 바닷물을 헤집고 다니느라 흠뻑 젖은 다른 선원들의 신발과는 달리, 그들의 장화는 멀쩡했기 때문이었다.

지휘관은 한심하다는 듯 눈을 흘겼다.


‘모두가 힘을 합쳐 배를 구하려고 할 때, 어딘가 안전한 곳으로 피해 있었나 보군.’

그녀를 돕겠다고 나선 것도, 연약한 여자 옆에 붙어 있으면 누구보다 먼저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런 거겠지.

지휘관은 그들의 얼굴을 뇌리에 담았다. 선원으로서 자격이 없는 자들이니 나중에 선장에게 일러둘 생각이었다.

그는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혀를 차며 곁에 있는 병사 두 명에게 지시했다.


“너, 그리고 너. 첫 번째 구명정에 동승해라.”

“네!”

명령을 받은 병사 두 명이 뒤를 따라갔다.

지휘관은 그제야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에게는 사절단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안전을 책임져야만 할 의무가 있었으니까.

그의 입에서 배가 떠나가도록 쩌렁쩌렁한 외침이 터졌다.


“구명정으로 탈출하겠습니다! 지시를 따라 주십시오!”

 

* * *

시간이 가면 갈수록, 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더욱 짙어졌다. 코와 눈이 따가워 제대로 숨을 쉴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휘관은 가장 마지막으로 구명정에 올라탔다. 병사와 시종, 그리도 선원들까지 전부 무사히 대피하고 난 뒤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을 태운 작은 배들이 마치 낙엽처럼 파도 위에 점점이 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뒤늦게 당혹감이 밀려들었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문 채, 제복의 목 부근에 달린 단추를 하나 풀었다.


“지휘관님, 괜찮으십니까?”

지휘관과 마찬가지로 마지막까지 배를 지키던 선장이 물었다.


“전 괜찮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를 쥔 병사에게 외쳤다.


“어서 구조 신호 준비를!”

“네!”

그는 대답과 함께 이미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건넸다.

지휘관과 함께 바다를 여러 차례 누빈 적이 있는 노련한 병사가 건네준 것은 다름 아닌 둥글고 길쭉하게 생긴 원통형의 도구였다.

기름을 흠뻑 머금은 심지 끝에 불을 붙이자, 어둠 속에서 빨간 불길이 이글거리면서 타올랐다. 그것을 그대로 공중에 던지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 위로 작은 불똥들이 쏜살같이 올라갔다.

원통형 도구는 곧바로 바다 위에 떨어졌지만, 별처럼 반짝거리는 불꽃들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머리 위에 맴돌았다.

아델리움 사제들이 성력을 담아 만들어 준 신호탄이었다.


“배들을 살펴보지. 움직여라.”

밤하늘의 뜬 별을 보고 방향을 가늠한 그는 병사에게 짧게 명령했다.


“네!”

망망대해에 뜬 구명정 사이로, 그들의 배가 빠르게 나아갔다.

지휘관과 선장은 배에 탄 사람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고 머릿수를 세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한데…….


“빌어먹을.”

좀처럼 평정을 잃지 않던 지휘관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새어 나왔다.

낙엽처럼 뜬 배들 사이를 몇 번이고 오갔지만 확실했다.

……한 척이 보이지 않는다.

설마 전복된 건가?

하지만 어디에도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갑자기 거대한 파도가 밀어닥쳐 구명정을 부숴 버렸다 해도, 함께 탄 병사나 선원들은 모두 수영에 능한 자들이었다.

주위에 다른 구명정이 많으니, 단 한 명일지라도 어떻게든 헤엄쳐 와 구조를 요청했을 것이다.

지휘관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콱 깨물었다. 혀끝에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배에 타고 있던 손님들은 모두 ‘귀빈’,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미 벌어진 사고는 어쩔 수 없다지만, 적어도 그들의 안전은 보장해야만 했다.

아델리움 왕국의 이름을 걸고 출항한 배다. 조국에 충성한 그로선 왕국의 이미지가 훼손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아니, 잘못하면 양국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틀어져 버릴 수도 있다!


“모두에게 알려라……!”

일렁거리는 횃불에 드러난 지휘관의 옆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귀빈들이 타고 있는 배를 제외한 나머지 배들은 당장 이 주위를 수색하라!”

그의 입에서 서릿발 같은 고함이 터졌다.


“사라진 배를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 * *

철썩거리는 파도를 가르며 배는 앞으로 조용히 나아갔다. 짠 냄새가 배어 있는 물방울이 배 안으로 연신 튀어 들었다.

나는 뱃머리에 오도카니 앉아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양손이 묶인 채.

설상가상으로 눈에는 눈가리개까지 씌워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이, 손이 느려진다.”

누군가 험상궂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구명정에 동승한 선원 중 한 명이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좀 더 빨리 저어!”

날카로운 무언가로 뱃전을 거세게 내려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러자 끼익거리는 소음이 더욱 잦아졌다. 보이진 않지만, 병사들이 묵묵히 노를 젓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구명정에 오르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 숨기고 있던 칼을 뽑아 들더니 나를 인질 삼아 아델리움의 병사들을 협박했다.


‘입도 벙긋하지 마라. 만약 허튼수작을 하는 놈이 있다면, 바로 이 여자 목에 바람구멍을 뚫어줄 테니까.’

 
나는 잠자코 불타고 있는 범선을 바라보았다.

만약 소리를 지르면, 저기까지 들릴 수 있을까.

당연하지만, 불가능했다. 배 안은 아비규환이었고, 사람들의 신경은 온통 탈출에 쏠려 있을 게 뻔했으니까.

괴한들의 협박에도 나와 함께 구명정에 탄 아델리움의 병사들은 몹시 용맹했다.


‘이 무뢰배 같은 놈들!’

 
그들이 좀처럼 물러서려 하지 않자 괴한 중 하나가 검을 겨누며 이죽거렸다.


‘좋아. 네 녀석부터 죽여서 물고기 밥으로 던져 주마.’

 
이렇게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괴한의 자세는 무척 안정적이었다. 게다가 그의 저변에는 검에 대해 잘 모르는 나조차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흘렀다.

누가 보낸 건지는 모르지만, 병사들 앞에서도 저리 자신만만할 정도면 대단한 실력자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또박또박 말했다.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아무도 해치지 마.’

‘아, 안 됩니다……!’

 
나는 새파랗게 질려 외치는 병사를 향해 다시 한번 힘주어 이야기했다.


‘그냥 이들이 시키는 대로 하세요.’

 
나 역시 두려웠지만, 나로 인해 애먼 사람의 목숨을 잃게 만들 수는 없었다.

절대로.

괴한들은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렸다.


‘호오, 생각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데? 역시 높으신 분은 높으신 분인가 봐!’

 
과장된 말투로 조롱한 것도 잠시.


‘말이 잘 통해서 아주 편하군.’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입에 천 뭉치가 물렸다. 그 뒤로 괴한들은 병사들을 차례로 무릎 꿇리고는 그들의 입도 막았다.

한 명이 내 손을 묶는 동안, 나머지 한 명은 모두를 무장해제 시켰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소리 지르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 막힌 채 검 대신 노를 쥔 병사들의 모습이었다.

이윽고 눈 위로 거칠거칠한 천이 씌워졌다.

온 사방이 새카만 암흑천지로 변했다.

* * *

출렁이는 파도 위에서 배는 쉴 새 없이 흔들렸다. 그저 노를 젓는 소리만이 지금 내가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는 걸 알려 주었다.

나는 속에서 올라오는 신물을 조용히 삼켰다.

머지않아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마구 요동쳤다.


“일어나!”

누군가가 내 어깨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아!”

계속해서 쪼그리고 앉아 있던 탓에 다리가 몹시 저렸지만, 나는 완력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두 다리가 불쑥 허공으로 들렸다.


“나쁘지 않은데. 귀족 아가씨들은 다 이렇게 가벼운가?”

누군가 나를 어깨에 둘러멘 듯했다. 저급한 웃음소리가 귓전에 스쳤다.

남자의 움직임을 따라 내 몸도 흔들렸다. 어딘가로 올라가는 듯, 몸이 자꾸만 들썩거렸다.

탁.

이윽고 구둣발로 단단한 지면을 딛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리저리 흔들리던 아까와는 달리 남자의 몸은 무척이나 안정적이었다.

혹시 땅을 디딘 건가?


“두목! 왔습니다!”

두목이라고?

남자가 큰 소리로 외치자 주변에서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으려 정신을 기울였다.


“으아악!”

그런데 그때 누군가의 비명이 귓전을 강타했다. 나와 함께 탄 병사가 틀림없었다. 비록 보이진 않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놈들은 그대로 지하 감옥에 가둬라.”

“네!”

냉정한 명령이 떨어지자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거칠게 비명 지르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결국엔 자취를 감췄다.

등줄기를 타고 긴장이 흘렀다.


“여자는 여기 내려놓고 눈가리개를 풀어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단단한 바닥 위에 나동그라져 나도 모르게 으악, 하고 소리를 내뱉었다.


“미안, 미안. 나도 좀 힘들어서 말이야.”

등 뒤에서 킬킬거리는 웃음이 스쳤다.

눈 앞을 가리던 천이 풀린 순간, 강렬한 빛이 엄습했다.


“읏.”

나는 눈부심을 이기지 못하고 재빨리 손으로 가렸다.

……설마 벌써 날이 밝은 건가?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천천히 손을 내리며 눈을 깜빡이자, 여러 개의 횃불이 달린 너른 갑판이 보였다. 그곳에는, 험악한 인상의 남자들이 나를 둘러싸고 서 있었다.

불빛에 비친 갑판과 난간은 물론, 위로 커다랗게 솟은 돛까지 모조리 검은 색으로 칠해진 배였다.

유일하게 다른 색이 있다면 바로 돛에 그려진 하얀 검이었다.

직접 본 건 처음이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수 없는 일이었다.


“해적…….”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돛 너머에는 마치 물속에서 그대로 솟아난 산처럼 커다란 암석 서너 개가 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선연히 보일 정도로, 상당히 가까운 거리였다.

설마 저기에 숨어서 대기하고 있었던 건가.


“이년이 뭘 눈동자를 굴리고 있어.”

그때, 중년 남자가 저속한 욕설을 쏟아 내며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이마와 턱, 그리고 왼쪽 눈꺼풀 위를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긴 흉터였다.

제대로 치료를 받긴커녕, 대충 이어 붙인 듯 붉고 울퉁불퉁한 흔적들이 불빛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끔찍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시자, 그는 음흉하게 웃더니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자, 여기 서명해라.”

펜과 두꺼운 양피지로 만든 종이였다.


“이게 뭔데.”

“네 저택과 가게의 권리를 넘긴다는 증서.”

이게 뭔 개소리야.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내 가게와 저택이 어디 있는지 알고?”

“물론이지. 너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걸 알고 있거든. 세실리카 수도에서 요즘 꽤 잘나가는 꽃이라지?”

남자는 입가를 여유롭게 끌어올리며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내 들었다. 그걸로 손목을 결박한 줄을 끊어 내더니, 다시금 펜을 들이밀었다.


“자, 어서 서명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지.”

마치 은혜를 베푼다는 듯한 거만한 목소리에, 나는 손목에 난 자국을 만지작거리다 말고 피식 웃었다.


“……웃기고 있네.”

“뭐?”

“어차피 죽일 거 아니야?”

“…….”

“너희에게 이런 일을 사주한 사람의 최종 지시는 그거였을 텐데.”

정곡을 찔렸는지 남자가 눈썹을 움찔거렸다.

이런 자들이 내 정보를 어디서 얻었겠는가.

게다가 ‘세실리카 수도에서 요즘 꽤 잘나가는 꽃’이라고 했다. 그건 보통 사교계에서 쓰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이 남자가 그런 것까지 알 리는 만무했다. 그저 들은 대로 입에 담은 거겠지.

정말로 해적들이 단독으로 벌인 짓이라면, ‘장사 잘되는 가게와 커다란 저택을 가지고 있다’거나 ‘황제의 눈에 들어 부자가 되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덕분에 머릿속에 이미 대충 상황이 그려졌다.

……바이올렛 영애를 해친 누군가가 나 또한 노리고 있다.


“일부러 떠날 날까지 기다렸다가 바다 위에서 납치하다니. 귀찮았을 텐데.”

나는 웃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뭐, 세실리카에서 조사단이 급파돼 수도 곳곳을 뒤지도록 놔둘 순 없었겠지. 그랬다간 다른 주인공 후보들을 처리한 흔적이 들통날 수도 있을 테니까.”

“누가 멋대로 움직여도 좋다고 했……. 뭐?”

나를 향해 우악스럽게 손을 뻗던 남자가 무슨 헛소리냐는 듯 인상을 썼다.


“후보? 주인공……?”

“아, 그 말은 신경 쓰지 마.”

나는 얼른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입 닥치고 시키는 대로 서명이나 해.”

남자는 다시 한번 강요했다. 아무래도 날 죽이기 전에, 한몫 더 챙기려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가 시키는 대로 할 수는 없었다.

협박에도 꿈쩍하지 않고 서 있자, 그가 날 잡아먹기라도 할 듯 눈을 부라렸다.


“이년이 정말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그러고는 내 목을 움켜쥐려 위협적으로 팔을 뻗은 그때였다.


“……감히 어디서 더러운 손을 뻗어.”

낮은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해적 두목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


“크윽!”

고급스러운 장갑을 낀 손이 손목을 비틀자, 두목이 고통에 찬 비명을 흘렸다.

자연스럽게 고불거리는 갈색 머리가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너, 넌 누구냐! 대체 어디서 나타난…….”

“그건 알 것 없고.”

“으어억!”

우두둑 하고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두목이 무릎을 꿇었다.


“저, 저놈은 뭐야!”

“서, 설마 유, 유령……!”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연히 나타난 남자를 본 해적들 사이에서 공포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 멍청한 새끼들! 지금 대체 뭐 하고 서 있는 거냐!”

두목은 손목을 그러쥔 채 노기 띤 얼굴로 소리 질렀다.


“유령이고 나발이고 죽여 버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각종 검과 도끼를 뽑아 드는 소리가 선득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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