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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127/173)


127화.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2022.09.17.



“읍, 으읍!”

꽁꽁 묶인 자루가 이리저리 꿈틀거렸다.

힘에 부칠 법도 한데, 자루 안에 갇힌 여자는 쉬지도 않고 용을 썼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누군가가 나지막이 혀를 찼다.


“쯧쯧.”

한쪽 발로 힘을 주어 그 위를 꾸욱 밟자 뾰족한 구두 굽이 자루를 뚫고 무른 살에 박혀 들었다.


“으윽……!”

발밑에 깔린 여자가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지만, 그녀는 힘을 풀지 않았다.


“조용히 해.”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잔혹함이 아름다운 은빛 눈동자에 서렸다.


“귀중한 인질이니, 곧바로 죽이진 않을게.”

그래. 로렐라 메이레드를 만날 때까진 살려 둬야 하고말고.

샬로네즈의 명령은 언제나 그렇듯 쉽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못하면 자신이 죽는다. 그러니 기를 쓰고 해낼 수밖에.

거센 바닷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짙은 남빛 머리카락이 등 뒤에서 이리저리 물결쳤다.

귀족이 아니면 구경조차 하기 힘든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자는, 지금 그녀가 서 있는 낡고 거친 해적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샬로네즈 왕녀와 손잡은 또 다른 주인공 후보, 레이나 아벤도트였다.

아벤도트 가문의 유일한 상속녀이자 아델리움 최고의 악녀라는 별칭을 얻은 여자.

레이나는 ‘진짜 상속녀’를 해치운 뒤, 그녀의 행세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주인공 후보가 되었다.

그녀가 한 건 단순히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상속녀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나약한 계집애’라고 생각하는 자들을 휘어잡기 위해 사업을 시작했다. 세상에 돈의 힘만큼 막강한 건 없으니까.

명석한 두뇌와 아벤도트 가문의 힘을 이용하니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재물이 그야말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제야 비로소 자신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여전히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누구도 제 앞에서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젊고 잘생긴 귀족들의 구애 또한 이어졌다. 입맛대로, 또 그날의 기분대로 남자를 바꾸며 화려한 싱글 라이프를 즐겼을 뿐인데 각종 찬사가 쏟아지며 주식이 팔렸다.

온 세상이 제 것만 같았다.

……샬로네즈 왕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너도 후보로구나.’

 
그녀 혼자만 간직하고 있던 비밀이, 누군가의 입에서 나왔을 때 느꼈던 그 섬뜩함은 평생을 가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을 보며 소름 끼치게 웃던 그녀의 손에는 날카로운 검이 들려 있었다. 머리가 몹시 비상했던 레이나는 즉시 깨달았다.

샬로네즈 왕녀는 자신의 경쟁자이며, 그녀는 자신을 죽이러 온 것이라는 걸.

혹시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던 레이나는 이내 포기했다.

자신이 후보라는 걸 알고 있는 것도 모자라, 아무도 모르게 납치해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사실이, 이미 그녀가 한 수 위라는 걸 증명해 주었으니까.

아벤도트 가문의 비호를 받고 있는 그녀를 납치하기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건, 주인공 후보들을 알아보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일 것이다.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왕녀의 집념이 엿보였다.

레이나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살아남을 수 있을 만한 방법을 모색했다.


‘왕녀님. 저는 왕녀님을 도울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살려 주신다면, 저를 죽여서 얻는 이득보다 더 큰 것을 반드시 가져다드리겠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 샬로네즈는 한참이나 배를 잡고 웃더니 갑자기 표정을 바꾸고 정색했다.


‘날 진정으로 돕는 길은, 그냥 죽어 주는 거란다.’

‘잘 생각해 보셔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부리기보다는, 같은 주인공 후보인 저를 수족으로 쓰시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겁니다. 저는 왕녀님이 왜 이런 일을 벌이시는지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샬로네즈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잠시 침묵했다. 기회였다.


‘약속하겠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왕녀님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드릴게요. 대신 주인공이 되시면…….’

 
레이나는 최선을 다해 그녀의 마음을 흔들려 노력했다.


‘널 살려 달라 이거니?’

‘그렇습니다.’

 
시퍼렇게 빛나는 검을 쥔 채, 샬로네즈는 음산하게 웃었다.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저 날 돕겠다는 말뿐이었다면 바로 죽이려고 했는데.’

 
그렇게 레이나는, 왕녀의 수족이 되었다.

그녀는 샬로네즈와 마지막으로 주고받았던 편지를 떠올렸다.


‘집 지키는 개처럼 구는 레어넌 베르하르트는 잘 떼어 놓았다. 지시를 받은 자들이 이미 배에 잠입했으니, 계획대로 진행하도록. 그 여자가 사절단이니만큼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해라. 정체를 들키는 일이 없도록 하렴.’

 
세실리카 제국의 주인공 후보, 로렐라 메이레드라…….

레이나는 그녀의 이름을 소리 없이 되뇌며 자루에서 천천히 발을 떼었다.


“흐으……!”

자루 속 여자가 고통에 찬 울음을 터뜨렸다.


“예쁜 아가씨가 꽤 사납군, 그래.”

얼굴에 칼자국이 가득한 선원들이 킬킬대며 다가왔다. 음흉한 눈길이 달라붙었다.


“……더럽고 천한 것들.”

레이나는 경멸이 가득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여자’를 태운 배가 곧 나타날 테니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만약 실패한다면…….”

서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선원들의 귀를 후벼팠다.


“너희들의 같잖은 목숨을 전부 바쳐야 할 테니까.”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부하들을 바라보던 두목이 혀를 찼다.

이 여자는 보통의 귀족 영애와는 다르다.

명확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시퍼런 물속으로 밀어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악랄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거친 바다에서 살아온 해적들이 고작 젊은 여자한테 눌려서 움츠러들다니.


“그런 걱정은 접어 두시지.”

자존심이 상한 두목이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댔다.


“우리는 전문가거든.”

남자는 일부러 손에 든 커다란 검을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아주 날카로운 칼에 거무스름한 얼룩이 묻어 있었다.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깊게 스민 그것은, 다름 아닌 핏자국이었다.

그 역시 숱한 사람들의 피로 바다를 붉게 물들인, 잔인무도한 남자였다. 귀족 영애의 협박에 굴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좋아. 그 말이 부디 거짓이 아니길 바라.”

남자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레이나는 오싹한 미소를 지었다.

* * *

세실리카의 사절단이 떠나는 항구에는 수많은 사람이 몰렸다. 커다란 두 척의 범선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두 배에는 각각 다른 색깔과 문양을 지닌 거대한 휘장이 걸렸다. 하나는 사절단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배였고, 하나는 레어넌과 아델리움 병사들이 탈 순찰선이었다.

사람들이 한참 배를 구경하는데, 어디선가 웅장한 나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서 깃발을 든 병사들이 배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뒤로는 화려한 마차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마차를 발견한 사람들이 순식간에 양옆으로 갈라졌다.


“저 분홍색 마차 좀 봐! 왕녀님이 분홍 마차를 아낀다고 하지 않았어? 왕실 문양이 새겨진 걸 보니 저 안에 왕녀님이 타고 계신 게 분명해!”

“그럼 그 뒤에 있는 게 사절단의 마차겠군. 허어, 저 문에 달린 장식은 정말 금으로 만든 건가? 아니, 그런데 웬 마차가 이리도 많지?”

“자넨 그것도 모르나? 보나 마나 진귀한 선물들이 실려 있겠지.”

관중 사이에서 감탄과 함께 아는 체하는 목소리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환호성과 사람들의 말소리가 거리에 가득했다.

그 소리는 창문을 꼭꼭 닫은 마차 안까지 들려왔다. 모두가 그들에게 환호했지만 정작 마차에 탄 레어넌의 눈빛은 그저 어둡기만 했다.


“……무사히 도착하실 때까지 모쪼록 몸조심하십시오.”

그는 로렐라와 함께 돌아가지 못하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별다른 이유 없이 아델리움 병사들과 함께 순찰선에 오르라는 황제의 명을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한 번 간곡히 청해 볼 것을.

레어넌이 후회 섞인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단장님.”

로렐라는 그의 앞에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별일 없을 테니까요.”

또 다른 사절단인 갈리테아 후작 역시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단장님도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저희는 세실리카에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사절단의 모두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로렐라만은 어색한 웃음을 유지한 채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레어넌이 걱정하는 만큼, 그가 곁에 없어서 불안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계속 함께 있었기에 더욱 그런 느낌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의 애틋한 눈길이 로렐라의 얼굴 위에 오래오래 머물렀다.


 
마차들은 배 앞에서 멈추어 섰다. 기사들이 도열해 주변을 삼엄하게 지켰고, 사절단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마지막으로 기사단장의 손을 잡고 샬로네즈 왕녀가 내리자 사람들은 지축을 뒤흔들 만큼 큰 소리로 환호를 내질렀다.

자신에게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상냥한 미소로 인사한 그녀는, 로렐라의 곁으로 사뿐사뿐 다가왔다.


“벌써 떠나신다니 너무 아쉽습니다.”

그러고는 로렐라의 손을 꼭 잡은 채 눈물을 글썽였다.


“다시 뵐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왕녀님도 건강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로렐라도 예의를 갖춰 화답했다.

황실 시종들이 수많은 선물을 바삐 나를 동안, 사절단 역시 배 위에 올랐다.

로렐라를 비롯해 다른 사절단 사람들이 배에 오르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레어넌은 마지막 한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몸을 돌려 다른 선박으로 향했다.

이윽고, 해초가 가득 낀 닻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커다란 돛이 기다렸다는 듯 촤악 펼쳐졌다.


“와아!”

시선을 빼앗는 광경에 또다시 환호성이 터졌다. 아델리움의 병사들은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배를 바라보며 절도 있게 경례를 붙였다.

로렐라는 갑판에 서서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마치 한 송이 꽃처럼 서서, 계속 손을 흔드는 샬로네즈 왕녀의 모습이 작아지다 못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기까지.

* * *

항해가 시작되고, 어느덧 수평선 위로 붉은 해가 가라앉고 있었다. 푸른 물결을 타고 금빛 노을이 눈부시게 퍼져나갔다.

수면은 노을빛을 받아 온통 강렬한 색채로 물들었다.

노을을 구경하러 갑판 위로 나온 사람들의 입에서 경외에 찬 감탄사가 터졌다.

하지만 아름다운 광경은 잠시뿐이었다. 태양이 빠르게 자취를 감춘 덕분에 주변이 삽시간에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 대신 성질 급한 별들이 일찍 떠서 머리 위에서 반짝거렸다.

바람은 점점 거세지고, 파도가 커다랗게 일었다.


“이제 그만 안으로 드시지요.”

제복을 입은 한 남자가 사절단 근처로 다가왔다. 누구보다 세심하게 사절단을 보살펴 주는 그는, 호위 병사들을 관리하는 아델리움의 지휘관이었다.

로렐라의 곁에 서 있던 대주교가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공기가 꽤 차가워졌군요.”

“바다 위에서는 금세 기온이 떨어집니다. 식전주와 함께 따듯한 수프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다른 사람들도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며 기쁘게 한 마디씩 보탰다.


“제가 에스코트해 드리겠습니다.”

주교를 따라 걸음을 옮기려는 로렐라에게 지휘관이 손을 내밀었다.

화려한 푸른색 장갑을 낀 그의 손을 조심스레 맞잡으려던 순간.

쿠웅!

갑자기 커다란 굉음과 함께 선체가 좌우로 거칠게 흔들렸다.


“아……!”

로렐라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지휘관이 급히 그녀를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대로 넘어졌을 것이다.

지휘관 역시 당황한 듯 신음을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게 무슨…….”

당장 소리가 난 쪽으로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는 자리를 지킨 채 사절단들의 안위를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어둠 속에서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는 듯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때였다.


“지, 지휘관님! 크, 큰일 났습니다!”

선원 하나가 황급히 뛰어오며 외쳤다.


“무슨 일인가!”

“배에 구멍이 났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인지 되묻기도 전에, 끼이익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선체가 또다시 요동쳤다.

아래층에 적재한 짐들이 무너진 듯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어디선가 기분 나쁘게 들려오는 세찬 물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으, 으아악!”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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