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이 여자가 있었지, 참 (124/173)


124화. 이 여자가 있었지, 참
2022.09.07.


띵동!

「징계 완료.」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화면 위로 짧은 문구가 떴다.

이네스는 흐릿한 시선을 들어 자신의 안내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사라지는 않았다. 다만 자리에 서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 댔다.

타다 남은 장작처럼 시커멓게 변한 두 손을 들여다보며.


“도망치지 않고 달려들다니, 끝까지 아무것도 못 했던 그 노인과는 다르군요.”

샬로네즈가 조소 어린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램프의 불빛을 받아 빛나는 칼날 위로 매끄럽게 들린 입술이 비쳤다.


“그 용기만은 칭찬해 주죠.”

“대체 어떻게…….”

주저앉아 있던 이네스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내가 주인공 후보라는 걸 알았지?”

이네스는 차가우면서도 고요한 분노가 느껴지는 눈으로 샬로네즈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안색은 여전했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또렷했다.


“흐응.”

샬로네즈가 흥미롭다는 듯 두 눈을 반짝였다.

목숨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보통은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거나, 이성을 반쯤 놓아 버릴 텐데, ‘주인공 후보’라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예상을 빗나가는 게 재미있단 말이야.

그들은 희망 따윈 조금도 보이지 않는데도 대부분 의연한 태도를 유지했으며, 이 난관을 어떻게든 뚫고 나아가려 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어느 날 나타난 창 때문에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린 사람들이니까.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일을 겪었고, 지금까지 소멸하지 않고 살아남은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 봤자 하찮은 것들이지만.’

샬로네즈는 눈앞의 상대를 보며 더더욱 입술을 끌어 올렸다. 그대로 고개를 까닥하자, 어둠 속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커멓게 타 버린 무언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것이 다름 아닌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건 그녀의 안내자도 마찬가지였다.


“어, 어떻게 저런…….”

청년의 경악에 찬 눈동자는, 저 시커먼 물체가 자신과 똑같은 안내자라는 사실을 좀처럼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듯했다.


“궁금하시다니 보여 드리렴.”

지시가 떨어지자, 라그가 기다렸다는 듯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같은 손을 휘저었다.

허공 위로 창 하나가 떠올랐다.

그 위를 응시하는 날 선 두 사람의 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긴장은 곧 의문으로 변했다.

주식이 떠 있어야 할 창에 사람들의 이름이 줄줄이 적혀 있기 때문이었다.

이네스는 천천히 그것을 읽어 내려갔다.

처음 보는 이름도 있었지만 놀랍게도 바이올렛 에라주리스처럼 사교계에서 유명한 이름도 꽤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내 이름이 왜 여기에…….”

멍하니 중얼거리자 또다시 재미있다는 듯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눈치가 없으시네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더러운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예쁜 구두가 눈에 보였다.


“설마 사교 모임을 가지는 고상한 귀부인과 영애들의 이름을 적어 두었겠어요?”

이네스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저 말을 듣기 전부터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설마’ 하는 불길함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도 꺼내지 않은 건 이 상황이 현실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 미친…… 이런 미친 짓이!”

제정신이 아닌 건 그녀의 안내자도 마찬가지였다.


“주인공 후보의 명단이라니! 이건 완전히 미친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는 자신이 징계를 받았을 때보다 더욱 충격을 받은 듯했다.

이네스는 샬로네즈의 아름다운 얼굴과 그녀의 손에 들린 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방금 그녀가 입에 올린, ‘아이를 없애는 것보다 더 간편한 방법이 있다’라는 말이 다시금 머릿속에 맴돌았다.

최근 아델리움 사교계는 잇따른 실종 사건으로 시끄러웠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살이나, 살인 사건의 수도 적지 않았다.

명단에서 본 바이올렛도 그중 하나였으니, 이네스의 생각이 어디로 향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설마 차례대로 죽였다고……?”

샬로네즈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은은한 미소만 머금었다.

하지만 침묵이 가장 명확하고 확실한 대답이 될 때도 있는 법. 이네스의 혀끝에 마치 쇠를 핥은 듯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그녀는 이내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어떻게 그런…… 잔인한 짓을……!”

이네스에겐 어떻게 명단을 손에 넣었는지보다, 어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가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하하하하핫!”

그때, 샬로네즈의 입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잔인한 짓이라. 후후훗……!”

그녀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검을 쥔 손을 허리께에 올린 채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것참 재미있는 소리네.”

그러다 불현듯,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차가운 검 끝이 이네스의 가느다란 목에 닿았다.


 
그대로 찔러 죽일 것처럼 날 선 눈빛으로, 오로지 입꼬리만을 찢어져라 들어 올리는 모습은 무섭다 못해 기괴했다.


“이네스 님!”

청년의 안타까운 외침이 허공에 맴돌았다.

능력을 써서라도 이네스를 구하려 했으나, 시도는 또다시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능력이 발동되기는커녕, 이번엔 그의 다리마저 땅에 박힌 듯 굳어 버리고 만 것이다.

종소리와 함께 화면 위로 또다시 ‘징계 완료’라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뜩잖다는 듯 혀를 찬 샬로네즈는 청년을 바라보다가 검지로 턱을 받친 채 눈동자를 살짝 굴렸다.


“하긴. 그럴 수 있지. 다른 후보를 죄다 죽이면서까지 살아남으려는 모습을 잔인하다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것도 잠시.


“하지만 내게 가장 잔인한 일은, 주인공이 되지 못해 삶이 끝나는 거야. 난 살아남기 위해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겠지. 소중한 아이가 있다고 했으니까.”

샬로네즈는 상냥하게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그러니 지금 네가 날 죽여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단다. 만약 그걸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딱 한 가지 말로 지칭할 수 있겠지. ‘위선자’라고.”

호박색 눈동자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잔혹함이 서려 있었다.


“생각해 봐. 그토록 아끼는 아이를 놔두고 소멸된다면 어떨 것 같아? 그때 가서도 과연 후보를 죽이면 안 된다는 말 따위를 할 수 있을까? 응?”

이네스가 흠칫, 몸을 굳혔다.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지켜본 샬로네즈가 다시금 어깨를 들썩이며 박장대소를 했다


“아하하하하하!”

이네스는 아래턱이 아릿할 정도로 이를 콱 물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긴 했지만, 왕녀의 질문에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키득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져만 갔다.

진심으로 즐거운 듯 한참을 웃던 샬로네즈는 이윽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손을 들어 가느다랗고 예쁜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쌍둥이 언니와 쏙 닮다 못해 점이 난 곳까지 비슷했지만 유일하게 다른 게 있다면 바로 이 손가락이었다.

조금 짧고 통통했던 ‘원래 그녀’의 손과는 달리, 언니의 손은 이토록 길고 아름다웠다.

샬로네즈는 쭉 뻗은 섬섬옥수를 홀린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한날한시에 태어났건만, 한 사람은 사랑받는 왕녀가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왕녀의 저주를 풀기 위한 제물이 되었다.

모두가 축복해야 마땅할 스무 번째 생일. 그녀는 자신이 그 제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지하 석실의 제단에서 희생당함으로써.

어릴 때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취급받은 건 오히려 그녀였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피해야 한다는 이유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방 안에만 갇혀 있을 때도 그녀는 그게 자신을 위한 것이라 철석같이 믿었다.

부모님과 쌍둥이 언니는 물론, 왕실의 모든 사람이 공주님을 사랑해 마지않지만, 혹시나 병을 옮길 수도 있어 찾아오지 못하는 거라는 유모의 말 또한 의심한 적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제물로서의 최후를 위한 준비였을 뿐이다.

언니인 샬로네즈가 데뷔탕트를 위해 아름답게 치장하는 동안, 그녀는 석실에 갇혀 목구멍에서 피가 나오도록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공포에 질려 절규하는 그녀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검은색 투구와 갑옷으로 온몸을 두른 기사들에 의해 사지가 묶일 때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은 그저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 한 번 쓰고 버리는 하찮은 존재였다는 사실을.

왜 하필 나지?

어째서 내가 이런 끔찍하고도 개 같은 최후를 맞이해야 하는 거냐고!

어둠에 짓눌린 채 한없이 오열하고 모든 것을 저주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했다.

커다란 검에 심장을 꿰뚫리기 직전.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빛 하나 없는 어둠을 바라보며 간절히 빌었다.

어떤 모습이 되어도 좋으니 살고 싶다고.

제발, 딱 한 번만.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내 말을 좀 들어 줘……!’

 
짐승처럼 울부짖던 그 순간.

띵동!

아름다운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눈앞에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다. 마법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녀에게만 보이는 창과 소리.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들.

혹시 지옥에서 온 악마의 현혹이 아닐까?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살 수만 있다면, 이것이 지옥문을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거라고 해도 오히려 기꺼울 따름이었다.

그 후 눈을 떴을 땐…….


“전부 내 것이었어.”

이 몸은 물론, 언니가 가진 모든 게.

샬로네즈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한번 손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그래, 거기까지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주식’이란 것을 많이 팔아 ‘주인공’이 되지 못하면 소멸된다는 메시지를 보기 전까지.

어떻게 손에 넣은 기회인데, 이대로 소멸한다고?

그녀의 마음속엔 두려움과 불안함이 뿌리를 내렸다. 그걸 더욱 단단하게 키운 것은 안내자인 라그였다.

죽음 끝에서 겨우 거머쥔 삶을 절대로 빼앗길 수 없는 샬로네즈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후보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원하는 보상을 받아내고 싶은 안내자.

두 사람의 야망과 욕심은 동시에 빚어낸 그릇처럼 딱 맞아떨어졌다.

후보의 명단을 빼낸 대가로, 라그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잔혹하고 무거운 징계를 받았다.

동시에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 또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흉측한 몰골로 변하고 말았다.

하지만 기밀은 이미 샬로네즈의 손에 들어간 뒤였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후보들을 제거하는 일에 열중했다.

하나같이 쉽지 않은 상대들뿐이었다. 게다가 주위에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들을 보호하려 드는 쟁쟁한 남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렇지만 그 무엇도 샬로네즈의 의지를 꺾진 못했다. 하물며 그녀에게도 왕녀라는 막강한 지위가 있었으니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리는 없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권력을 이용해 처음으로 경쟁자를 납치하는 데 성공한 그 날.

다른 후보의 목에 겨눈 검 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샬로네즈에게도 위험한 도박이었다.

‘주인공 후보’를 죽이면 안 된다는 말은 없었지만, 이 신비한 창을 만들어 낸 누군가가 자신에게 벌을 내리면 어쩌지?

걱정과 공포가 그녀를 망설이게 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수는 없었다.

결국 검을 높이 들고 휘두르던 그때.

띵동!

놀랍게도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군가 자신의 주식을 사 준 것이었다.

그 사실에 뛸 듯이 기뻐하던 것도 잠시, 후보들을 하나씩 제거하면 제거할수록 샬로네즈의 화면 위에는 ‘하차’라는 단어가 줄을 이었다.

그 말이 정확히 뭘 의미하는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실로 뼈아픈 경험이었다.

가끔은 주식이 팔리기도 했지만, 이미 썰물처럼 빠져 버린 것을 보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고민 끝에 샬로네즈는 한 가지 묘안을 떠올렸다.


‘내 손으로 죽인 경쟁자들을 따라 하면 되지 않을까?’

그녀들이 왜 자신보다 많은 주식을 팔았는진 알 수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누군가’의 눈에 들어 주인공 후보가 된 사람들 아닌가.

꼬리를 잡히지 않고 납치하기 위해 그들이 무얼 했고, 또 어떤 배경을 지니고 있는지 뒷조사하는 건 필수였다. 그걸 활용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비슷하게 보여 주면, 모두가 되돌아와 주식을 사 주겠지.

그러나 기대와 현실은 달랐다.

첫 희생자가 되었던 후보처럼 남몰래 엄청난 신력을 지닌 행세를 하다가, 바이올렛 영애를 죽인 뒤 시한부인 척을 했던 그 순간.

‘캐붕’이라는 알 수 없는 단어와 욕설이 쏟아졌다.

그게 뭘 뜻하는 건지는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다시 불러 모으긴커녕, 오히려 몇 안 되는 이들마저 전부 떠나게 했다는 것.

대체 내가 뭘 잘못했지?

그들을 만족시키려면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초조해 잠 못 드는 날도 늘어났고, 어떻게든 만회해 보려 온갖 애를 써 보았으나 모두 허사였다.

그 끝에, 그녀는 결국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생각했다.


‘……상관없어. 단 한 명도 남겨 두지 않으면 해결될 문제야.”

그렇게 되면 나를 이길 사람 또한 없을 테니까.


“이제 곧, 이 왕국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게 나의 것이 될 거란다.”

더 이상 발톱을 숨길 필요가 없는 샬로네즈는 천천히 검을 고쳐 쥐며 섬뜩한 미소를 머금었다.


“별 볼 일 없는 후보는 그만 사라져 줄 시간이지.”

“……그 별 볼 일 없는 후보의 눈에, 당신은 어떻게 보이는지 알려 줄까요?”

줄곧 침묵하던 이네스가 천천히 입술 한쪽을 끌어 올렸다.


“아주 비열하고 저급한 조연.”

“……뭐?”

샬로네즈가 눈살을 찌푸린 동시에.


“주인공이라니.”

어림도 없다는 듯 이네스가 피식하고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너 같은 사람이?”

그리고 그때였다.

휘익!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샬로네즈가 검을 매섭게 치켜들었다.


“안 돼! 제발…… 안 돼……!”

안내자의 처절한 비명과 함께 이네스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푸욱!

곧이어 선득한 감촉이 손끝으로 그대로 전해져 왔다. 펄떡거리던 심장이 순식간에 얼음처럼 차갑게 변해 갔다.


“조연? 아하하하하핫!”

소름이 돋을 정도로 경쾌한 웃음소리가 석실에 가득 퍼졌다.

이리저리 비틀대던 이네스의 고개가 결국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는 걸 지켜보던 샬로네즈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조연은 여기서 사라진 너겠지.”

“아아아악! 죽여 버릴 거야! 죽일 거라고!”

그런 그녀를 향해 이네스의 안내자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연신 무어라 울부짖었다.

하지만 샬로네즈의 귀에는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완벽한 평화 속에서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네스에게 보여 주었던 창을 다시 눈앞에 띄웠다.


“자, 이제 누가 남았더라?”

평소 동경해 마지않던 사교계의 유명인사들을 마주한 듯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는 사라진 사람이 남은 사람보다 많았다. 고맙게도 알아서 소멸해 준 후보들도 있었지만, 샬로네즈가 처리한 사람의 수도 만만치 않았다.


“흐음. 이 여자도 얼른 제거하고 싶지만, 아직 조사가 충분치 않아. 사람을 더 풀어야겠어. 그리고 이 사람은…… 아, 그 애가 처리한댔지.”

‘작업’에 놀라울 정도로 속도가 붙은 건 그녀의 수족을 자처한 조력자가 있는 덕분이었다.

이용가치가 사라진다면, 가차 없이 버릴 테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세이블 릴리…….”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녀는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 사람도 당장은 힘들겠지.”

정보를 모으고는 있지만,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지라 쉽지 않았고 철두철미한 성격인지 좀처럼 틈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제거하려면 아직은 때를 기다려야만 했다.


“어머? 잠깐.”

다시 명단을 천천히 들여다보던 샬로네즈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 여자가 있었네!”

반짝거리는 눈동자에 어울리는 기쁨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이블 릴리처럼 정보는 충분치 않지만, 성공 확률은 무척이나 높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누구보다도 가까이에 있으니까.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아름답게 흔들리는 붉은 머리가 눈에 선했다.

샬로네즈는 마치 작고 귀여운 초식 동물처럼 입술을 오물거리며 웃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