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그녀들이 사라지는 이유
(123/173)
123화. 그녀들이 사라지는 이유
(123/173)
123화. 그녀들이 사라지는 이유
2022.09.03.
입술이 마르고 목이 탄 나머지 하녀에게 차를 부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닐라 향이 가득한 홍차가 포트 가득 내어져 왔다. 위너드도 우아한 자세로 앉아 그것을 마셨다.
찻잔을 들었다 내려놓는 간단한 동작 하나에도 기품과 품위가 철철 넘쳐흘렀다.
그의 과거를 알지 못했던 예전에는 그저 의아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납득할 수 있었다. 사랑받고 자란 황태자 위너드라…….
순간 눈이 마주치자 그가 그림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까 보았던 광경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노인이 말을 하려던 순간 징계를 내린 시스템의 덤덤한 태도와 고통에 차 몸부림치던 노인의 모습까지.
지금도 떠올리면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였다.
‘징계’가 있다는 건 위너드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실감해 본 적 없었다. 사실 어쩌면 그간 그런 게 있다는 것 자체도 잊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충격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사실상 주인공 후보에게 제약이란 없다. 그래서 단순히 주식만 많이 팔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내자에게 이 시스템은 그렇게 관대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정말 괜찮을까. 제아무리 주식 판매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위너드의 행동은 규칙을 어긴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선을 넘지만 않으면 된다는 식의 태평한 말이나 하고 있다.
게다가 조금 아슬아슬했었다고?
혹시 조금이 아니라 엄청 위험했던 거 아니야?!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빤히 바라보기만 하자, 그가 슬쩍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했다.
“그렇게 보면 조금 쑥스러운데…….”
그 태연한 모습에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틀렸어. 내 안내자란 사람은 대책이 없어도 너무 없는 인간이야.
혹시 과거 주인공 후보다운 패기를 가지고 있어서 시스템 따위는 무섭지 않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두어 차례 거세게 마른세수했다.
안 되겠어.
이 험한 세상, 나라도 똑바로 정신 차려야지!
“위너드.”
“응?”
“안내자에겐 여러 가지 규칙이 있고, 그걸 어기면 징계를 받는다는 것도 잘 알겠어. 그중 가장 가벼운 벌이 바로 근신이라는 거지?”
“그래, 맞아.”
“근신 말고는 어떤 징계가 있어?”
내 질문에 위너드가 잠깐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글쎄, 징계는 워낙 여러 가지가 존재해서 말이야. 위반하는 정도에 따라 그 강도가 달라지지.”
“……그렇구나.”
내 생각보다 세분화된 체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껏 안내자란 시스템의 일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나도 모르게 소리 내서 중얼거리자, 위너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안내자도 마음이 있고 감정이 있는 인간이니까.”
그러더니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규칙과 징계를 이용해 통제하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욕심에 흔들리거나 얄팍한 유혹에 끌려 그릇된 짓을 저지를 가능성이 커지겠지.”
어리석은 욕심과 얄팍한 유혹.
나는 위너드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안내자는 자신의 후보를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하는 존재다. 특히 후보가 주인공이 되면 커다란 보상이 주어진다고 하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위너드도 상당히 극성(?)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한 사람이 과연 없을까?
어쩌면 욕심이 과한 나머지 절대로 해선 안 되는 짓을 저지를 수도 있다. 성정이 잔혹한 안내자라면 더더욱,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려 들 것이다.
그걸 미리 방지하고자 시스템은 여러 규칙과 징계를 준비한 거겠지.
“위너드. 나 또 궁금한 게 있는데…….”
“내 주인공께서 오늘은 궁금한 게 무척 많으시네.”
위너드는 웃으며 가볍게 농담을 건넸다. 하지만 나는 좀처럼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그럼…… 가장 무거운 징계는 뭐야?”
그 말에 위너드가 찻잔을 집으려던 손을 멈칫했다.
나는 불안과 긴장을 억누르며 조용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가장 무거운 징계는…….”
길고 수려한 손가락으로 찻잔 손잡이를 느릿하게 쓸어내리던 위너드가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좀처럼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침묵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위너드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소멸.’
그 생각을 하자마자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갑자기 참을 수 없이 목이 타 나는 남아 있던 차를 모두 마셨다. 그런데도 갈증은 쉬이 해소되지 않았다.
갑갑함을 느끼며 찻잔을 내려놓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위너드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한여름의 신록처럼 푸르른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니, 방금 전 느꼈던 목마름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위너드, 만약…….”
“예전에 한 번 말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거의 동시에 입술이 열렸다.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그의 말에 나는 하려던 이야기를 잠시 접어 둔 채 생각에 잠겼다.
언젠가 레아의 가게를 찾았다가, 주인공 후보가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지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주식 판매가 저조한 후보부터 소멸된다는 페널티가 주어진 직후였다.
“물론 네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위너드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볼을 긁적였다. 어쩐지 조금 자신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 조금도 빠지지 않고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큰 충격을 받은 내게, 냉정한 목소리로 건넨 그의 말이 귓가에 생생히 아른거렸다.
‘절대 널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그걸 번복하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으니까.’
“난 절대 널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왜냐하면…….”
그때와는 달리 다정하고 따뜻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너는 내게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이니까.”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오롯이 내 모습만이 담겨 있었다.
* * *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한 석실 안에는, 한 줄기 빛조차 들지 않았다. 벽에 걸린 램프가 없었더라면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할 만큼 어두웠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석실은 허연 입김이 새어 나올 정도로 춥고 음산했다.
희미한 램프 불빛조차도 닿지 않는 깊은 구석에서, 한 여자가 초조하게 서성였다.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그녀의 머리는 온통 헝클어져 있었다. 심지어 살짝 찢어진 입술에는 붉은 피가 번졌다.
누군가에게 위해를 당해서가 아니라 불안과 분노, 그리고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짓씹어 낸 상처였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살짝 바람이 일더니, 어느새 젊은 청년이 불쑥 나타났다.
“이네스 님……!”
청년의 입에서 간절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합니다. 지금 이 상황은 납치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비록 주인공 후보와 안내자로 만났지만, 그는 누구보다 이네스를 존경하고 따랐다.
그 누구보다 영민하고 주위를 밝게 만드는 따듯한 성품을 지닌 그녀에게 반하지 않을 자는 없을 테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동시켜 드리겠습니다.”
청년이 비장한 눈빛으로 팔을 들었다.
“안 돼!”
하지만 손가락을 튕기려는 순간, 이네스가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상대는 어차피 내가 주인공 후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이네스가 짓씹듯 말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주식 창이 요동쳤다.
요란한 종소리와 함께 여기저기 번쩍거리며 눈부신 빛이 쉴 새 없이 터졌다.
하지만 이네스의 눈에 그런 것 따위 들어올 리 만무했다.
“이건 단순한 우연 같은 게 아니야.”
그녀가 분노에 차 속삭였다.
상대는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심지어 제일 소중히 여기는 게 무엇인지도.
대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자신이 주인공 후보라는 걸 알고 있다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담은 첫 서신을 받은 직후, 아이가 납치당했다.
이네스는 각고의 노력 끝에 무사히 아이를 구출해 냈다.
하지만 그 후에 날아든 두 번째 서신은 그녀를 더욱 경악하게 만들었다.
‘이번 일’로 주식을 많이 팔게 되어 좋지 않았냐고 조롱하는 듯한 메시지와 더불어, 다음번에는 납치로만 끝내지 않을 거라는 경고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깨달았다. 이건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는 것을.
악의 고리를 끊으려면, 적의 실체를 알아야만 했다.
결의를 다진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아이를 지켜야 해.”
자신을 주인공 후보로 만든……. 아니, 이젠 그녀의 모든 것이 되어 버린 작고 소중한 존재.
“그러지 못하면 나는 살아도 산 게 아닐 테니까.”
그러니 도망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 어린 목소리에 그녀의 안내자는 결국 비통한 신음을 흘렸다. 이네스가 얼마나 아이를 소중히 여기는지 알기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저 멀리서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으나 한껏 예민해진 그녀의 귀에는 철판을 긁는 것처럼 소름 끼치게 들려 왔다.
간신히 피가 말라붙은 이네스의 입술에서 다시금 붉은 피가 흘렀다. 하지만 그녀는 아프지도 않은지 계속해서 입술을 잘근거렸다.
이윽고 물기가 가득한 미끄러운 땅을 밟는 소리가 이어졌다. 아롱거리는 불빛에 가장 먼저 드러난 것은 풍성한 분홍빛 드레스였다.
더럽고 추운 석실에 봄처럼 따듯한 빛깔의 드레스라니.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 이네스가 멍한 얼굴로 드레스 자락만 바라보던 그때였다.
“후훗.”
귓가에 짧은 웃음소리가 스쳤다. 그제야 고개를 든 이네스가 두 눈을 부릅떴다.
“샤…….”
핏방울이 맺힌 입술 사이로 혼란이 가득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샬로네즈 왕녀……?”
“이네스 님. 평안하셨는지요.”
유령이라도 본 듯 굳어 있는 이네스를 향해 샬로네즈가 치맛자락을 들고 우아하게 인사했다.
그러더니 두 눈을 천진난만하게 반짝이며 물었다.
“아이를 위해 이렇게까지 희생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진짜로 배 아파 낳은 아이도 아닌데.”
“이, 무슨……. 어떻게 이런…….”
이네스의 입에서 정돈되지 않은 단어가 흘러나왔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해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바닥에 주저앉지 않도록 힘주어 벽을 잡고 있는 게 전부였다.
샬로네즈는 아랑곳하지 않고 경쾌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고아원에 버려져서 누구도 따르지 않던 아이가 세르시안 후작가의 후계자였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대, 대체 네 정체가 뭐야!”
“그게 중요하신가요?”
그녀는 상냥하게 눈을 접어 웃었다.
“아이는 이네스 님만 따른다죠? 스스럼없이 엄마라고 부른다니. 대체 무슨 수로 아이의 마음을 여신 거예요? 그 덕분에 젊고 잘생긴 후작과 약혼까지…… 아, 아니지.”
샬로네즈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이내 조소 가득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주인공 후보가 되실 수 있었잖아요.”
이네스는 그 어떤 말도 섣불리 꺼낼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어떻게든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저도 이네스 님처럼 계모 노릇을 하면 많은 주식을 팔 수 있을까요?”
짐짓 고민하던 샬로네즈는 이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역시 무리일 것 같네요. 전 아이는 질색이거든요. 시한부 주인공이라면 어느 정도 따라 할 수 있지만.”
이네스의 텅 비어 버린 눈동자 안에, 악마처럼 아름답게 미소 짓는 샬로네즈의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계모의 주식을 사 준다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던 샬로네즈의 눈동자에 섬뜩한 빛이 서렸다.
“그 말은 즉, 아이가 없어지면 지금처럼은 주식이 팔리지 않는단 소리겠지요?”
그 순간 애써 지키고 있던 이성이 무너졌다.
“뭐, 뭐라고……?”
결국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네스는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어머, 놀라게 해 드렸다면 죄송해요.”
“만에 하나 아이에게 손대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어!”
악에 받쳐 외치자 샬로네즈가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배시시 웃었다.
“걱정 마세요. 아이를 없애는 것보다……”
하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주홍빛 눈동자는 전혀 웃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은 그때였다.
“……더 간편한 방법이 있거든요.”
스르릉.
오싹하리만치 차가운 소리가 귓가에 휘감겼다.
샬로네즈 왕녀의 손에는 어느새 날카로운 검이 들려 있었다.
두 주인공 후보의 눈앞이 쉴 새 없이 번쩍였다. 각자의 화면 위로, 마치 해일처럼 수많은 메시지가 쏟아졌다.
하지만 샬로네즈와 이네스 누구도 그것을 읽고 있지 않았다.
“안 돼!”
그때 이네스의 안내자가 양팔을 활짝 벌려 앞을 막아섰다.
“이네스 님이 주인공 후보라는 걸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건지는 몰라도…… 더러운 수작은 여기까지다.”
그는 핏발선 눈으로 샬로네즈를 쏘아보았다.
“나는 징계 따윈 무섭지 않으니까!”
그러고는 스스로 다짐하듯 크게 외치며 급히 손가락을 튕긴 순간이었다.
띵동!
「경고! 규칙 위반이 감지되었습니다.」
어두운 지하를 무너뜨릴 기세로 커다란 종소리가 울려 퍼진 것과 동시에, 청년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멍청하긴.”
샬로네즈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