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전부 다 내 것이다
(121/173)
121화. 전부 다 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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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전부 다 내 것이다
2022.08.27.
붉은 루비로 만든 석류 알갱이와 자수정으로 만든 작은 포도송이가 화려하게 장식된 은세면기 위로 맑은 물이 가득 부어졌다.
찰랑거리는 따뜻한 물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작은 병에 든 화장수를 그 위로 몇 방울 떨어뜨리자, 방 안에 금세 부룬펠시아 꽃향기가 가득 퍼졌다.
누구보다 특별하고 고귀한 그녀의 하루가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편안한 밤 보내셨습니까, 샬로네즈 님.”
남빛 드레스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고개를 숙이자, 뒤에 일렬로 늘어선 하녀들이 그녀를 따라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잠시 후, 가느다란 팔이 아름다운 레이스 캐노피 안에서 위로 쭈욱 올라갔다.
따듯한 햇살 아래 늘어진 고양이처럼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켠 그녀의 입에서 나른한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윽고 매끈한 다리가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하얗고 작은 발에 기다렸다는 듯 보드라운 양털 안감을 덧댄 붉은 덧신이 신겨졌다.
“오늘도 날씨가 아주 화창합니다.”
치장을 담당하는 레시아 자작 부인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샬로네즈는 그녀를 향해 가볍게 미소 짓고는 한쪽 팔을 올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하녀들이 다가왔다. 실크로 만든 잠옷이 가느다란 어깨를 타고 스르륵 아래로 떨어졌다.
신이 심혈을 기울여 빚은 듯한 아름다운 몸이 아침 햇살 속에서 새하얗게 빛났다. 매일 아침 보는 광경인데도, 몇몇 하녀들은 여전히 눈이 부신 듯 감탄을 터트렸다.
하녀들은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공예품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벨벳 의자에 앉혔다.
어깨 위로 새하얀 천이 둘리자 왕녀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알맞은 온도의 세숫물이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 위로 살살 끼얹어졌다.
세안이 끝나면 치장을 할 차례였다.
하녀들은 최고급 실크로 만든 속옷과 드레스 맵시를 살려 주는 여러 보정 장치를 차례차례 왕녀에게 입혀 준 뒤, 드레스를 들고 양쪽에 놓인 작은 스툴 위로 올라가 화사하면서도 우아한 분홍빛 드레스를 머리 위에서부터 조심조심 씌웠다.
아름다운 왕녀의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해 줄 화장과 머리 손질이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드레스에 맞춘 값비싼 보석 장신구들을 매치했다.
마치 하얀 진주 같았던 샬로네즈는 봄의 정원에 핀 한 송이 꽃으로 변했다.
그동안 그녀가 한 것이라고는 세안을 위해 고개를 한 번 살짝 숙인 게 전부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샬로네즈 님.”
우아한 발걸음으로 밖으로 나가자,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라트리아 백작 부인이 웃으며 다가왔다. 샬로네즈의 일정을 담당하는 고위 시녀 중 한 명이었다.
“오늘도 무척이나 아름다우십니다.”
샬로네즈는 미소를 머금은 채 머리가 희끗희끗한 귀부인이 자신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델리움의 유서 깊은 가문 중 하나인 라트리아 백작가의 안주인. 하지만 왕녀에게는 그저 밟으면 밟는 대로 쓰러지는 잡초나 다름없었다.
웃는 얼굴로 그 사실을 떠올린 샬로네즈의 볼에 더더욱 깊은 보조개가 파였다.
“오늘 착용하신 루비 목걸이는 용의 심장이라 불리는 왕실의 보물 아닌지요?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백작 부인의 감탄에 샬로네즈는 겸연쩍은 얼굴로 목걸이를 매만졌다.
“이런 걸 정말 제가 하고 다녀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폐하께서 허락하셨다지만, 혹시나 세간에서 흉을 보진 않을까 걱정입니다. 특히나 세실리카의 사절단분들에게 왕녀가 모범을 보이긴커녕, 사치스럽다는 인상을 주게 되면…….”
그러자 라트리아 백작 부인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왕녀님만큼 나라와 국민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분이 어디 있다고요!”
라트리아 부인이 수줍게 미소를 띤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왕녀와 보폭을 맞추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아름답고 현명한 왕녀님은 왕국의 자랑이십니다. 폐하께서는 물론, 왕국의 사람이라면 모두 그리 생각하는걸요. 늘 좋은 것만 드리고 싶어서 다들 안달이랍니다.”
“어머, 그런 과분한 말씀을…….”
“저는 그저 사실만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사절단분들도 왕녀님의 호의와 깊은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하더군요. 이 역시 제가 직접 들은 이야기랍니다.”
백작 부인은 마치 애지중지 하는 딸을 바라보듯 흐뭇하게 웃었다.
왕녀는 대답 대신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걸었다.
‘늘 좋은 것만 드리고 싶다’라.
그 말을 다시 한번 떠올린 순간, 왕녀의 입꼬리가 아름다운 호선을 그렸다. 수줍은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도도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럼. 난 언제나 좋은 것만 가져야 하고말고.
과거엔 조금도 누리지 못했던 것들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자신의 쌍둥이 언니,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샬로네즈 왕녀의 몸을 차지한 이상 그녀는 이 모든 달콤함을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었다.
애정을 담뿍 담아 자신을 바라보는 부모님과 존경이 가득한 가신들의 눈빛, 그리고 딸이 왕좌를 승계받는 것이 가능한 아델리움의 유일한 후계자로서의 권력까지.
이젠 전부 나의 것이다.
“영원히.”
샬로네즈는 고개를 들어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읊조렸다.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백작 부인의 물음에 샬로네즈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 멈추었다. 그 앞엔 커다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왕녀가 하루에도 몇 번씩 즐겨 찾는 이곳은, 다름 아닌 기도실이었다.
“아, 네.”
라트리아 백작 부인은 왕녀의 말뜻을 눈치채고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두 여인의 뒤를 따르던 하녀들도 마찬가지였다.
“문안 인사를 드리기까지 시간은 충분하니 서두르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샬로네즈 님.”
배려 가득한 말에 왕녀는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기도실 안으로 들어갔다.
왕과 왕비에게 아침 인사를 드리러 가기 전 홀로 기도를 드리는 것은 샬로네즈 왕녀의 습관이었다.
‘매일 아침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한 후, 신께 먼저 인사를 드리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나라의 안녕과 부모님의 건강을 기원하는, 제게는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고도 소중한 시간입니다.’
의젓한 태도로 말하던 왕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렸다.
백작 부인은 자리에 서서 조심스레 닫히는 문틈 사이로 사라지는 샬로네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가 남긴 은은한 잔향이 코끝에 스쳤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완벽한, 마치 신의 선물 같은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 * *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방으로 들어서자 발밑에 깔린 푹신한 카펫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위에 놓인 가구라고는 네모난 테이블과 의자가 전부였다.
소박하면서도 검소한 기도실의 표본 같은 공간.
무서우리만치 고요한 적막이 그녀를 감쌌다.
잠시 주위를 둘러본 샬로네즈는 창가로 다가가 잠금장치를 풀고 손잡이를 돌렸다.
조그마한 틈이 생기자마자, 짙은 회색빛을 띤 새 한 마리가 기다렸다는 듯 날아들었다.
그녀의 말이라면 뭐든지 따르는 이들이 보내온 전서구였다.
발목에 묶인 쪽지를 펼쳐 들고 천천히 읽어 내려가던 샬로네즈가 서늘하게 웃었다.
“……후훗.”
그저 선하게만 보였던 평소의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눈동자에서는 귀기가 흘러넘쳤다.
이윽고 가녀린 어깨가 들썩거렸다.
예쁘게 손질된 손톱을 질끈 깨물며 참아 보았지만, 결국 붉은 입술 사이로 섬뜩한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아하하핫!”
동시에 어디선가 음산한 바람이 불었다. 뒤를 돌자 기괴한 모습을 한 여인이 구석에 조용히 두 손을 모은 채 서 있었다.
“샬로네즈 님.”
우물거리는 입술 사이로 타다 만 재를 들이마신 것처럼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숯처럼 검은빛의 형체는,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와 반짝이는 두 눈동자가 없었더라면 그 누구도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사람‘이었던’ 흔적이 남아 있어 더더욱 공포심을 주었다.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만약 심약한 사람이었다면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릴 정도로 흉물스러운 모습.
바로 샬로네즈의 안내자인 ‘라그’였다.
라그도 한때는 샬로네즈 못지않게 아름다웠던 때가 있었다.
‘규칙’을 어겨 ‘중징계’를 받기 전까지는.
안내자의 능력을 빼면 그저 걸어 다니는 괴물에 불과한 모습으로 변해 버린 건, 시스템에서 금지하고 있는 몇몇 커다란 금기사항 중 하나를 어긴 탓이었다.
그것은 애초에 일종의 비극이었는지도 모른다.
안내자가 되기에는 다소 부적절할 수 있는 비열한 사람이 하필이면 태생적으로 악독한 ‘샬로네즈’라는 주인공 후보와 손잡은 것부터 비극은 예정되어 있었다.
다소 끔찍한 모습에도 샬로네즈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라그.”
손을 들어 얼굴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천천히 어루만지자 여인이 눈을 깜빡였다.
“오늘, ‘왕녀’로서의 일정은 취소할 거야.”
“그렇군요.”
“그래. ‘주인공 후보’로서 할 일이 생겼으니까.”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커다란 검은 눈동자 위에 희미한 이채가 서렸다.
“아델리움에 살고 있는 마지막 라이벌을 손에 넣었단다.”
살로네즈는 자신의 안내자가 가장 기뻐할 만한 마지막 말을 조용히 속삭였다.
그러자 라그가 조용히 말했다.
“마지막은 아니지요. 아직 처리하시지 않은. 아니, 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살려 두고 있는 후보가 한 명 더 있으시잖아요?”
언제나 그렇듯 깐깐하긴.
“라이벌이라고 했잖니.”
샬로네즈가 나지막하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름다운 백금발이 등 뒤에서 살랑거렸다.
“수족이 되어 주는 벌레는 라이벌이라고 지칭하는 게 아니지. 쓸모를 다하면 언제든 죽일 수 있으니까.”
“후훗. 지당하신 말씀이에요.”
깃털처럼 가벼운 웃음과는 달리 라그의 입술은 위로 찢어지듯 들려 있었다.
비록 얼굴이 검은 진흙덩이 같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으나, 그녀는 누구보다 환희에 차 웃고 있었다.
“불쌍한 내 안내자, 라그.”
샬로네즈는 그린 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 해골같이 툭 불거진 그녀의 광대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절대로 네 희생을 잊지 않으마.”
그 말에 마치 애교라도 부리는 것처럼 기다란 손톱이 그녀의 팔뚝을 살살 긁었다.
가만히 손을 내어 준 것도 잠시. 샬로네즈는 이내 매정하게 팔을 빼냈다.
그러고는 싸늘하게 얼굴을 굳힌 채 그대로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밖으로 나가기 전, 흘끗 뒤를 돌아보자 긴 머리를 거미줄처럼 늘어뜨린 라그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번뜩이는 눈빛에 더더욱 음산한 기운이 실렸다.
미간을 찌푸린 것도 잠시.
이윽고 샬로네즈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더할 나위 없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고는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기괴하고 섬찟한 미소였다.
* * *
“나는 분명 괜찮다고 말했는데.”
위너드에게 팔을 맡긴 채 앉은 채로,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방금 왕실의 시종이 찾아와, 오늘 일정이 대부분 취소되었다고 안내해 주었다. 샬로네즈 왕녀의 지시라면서.
아마도 나 때문인 듯했다. 어제 무도회 도중, 피곤하다는 핑계로 방에 돌아왔으니까.
불과 며칠 전이었다면, 나를 걱정해 주는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 됐어.”
나는 위너드의 말에 문득 시선을 내렸다.
언젠가 내게 해 주었던 것과는 달리 아주 깔끔하고 완벽한 솜씨로 붕대가 팔에 매어져 있었다.
샬로네즈 왕녀가 남긴 자국은 붕대를 감아야 할 정도로 거창한 건 아니었다. 다만 옷감에 닿는 자리에 난 상처라 쓸릴 때마다 계속해서 따끔거렸다.
붕대를 매고 나니 드레스 소매가 닿아도 아무렇지 않았다. 줄곧 거슬리던 따끔거림이 사라지니 한결 움직이기가 편했다.
나는 팔을 쭉 뻗었다 접으며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와, 웬일로 예쁘게 매 줬네?”
심각하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한 얼굴로 내 팔을 바라보고 있는 위너드 때문이었다.
“원래 이런 거 되게 못했잖아.”
다시 한번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붙이자, 그가 낮게 속삭이듯 대답했다.
“……연습했으니까.”
“연습?”
“응.”
다른 것도 아니고, 붕대 감는 걸 연습하다니?
“왜…….”
이유를 물으려던 입술이 나도 모르게 멈췄다.
화살에 맞아 팔을 다친 내게, 위너드는 형편없는 솜씨로 붕대를 감아 주었다. 그건 감았다고 하기보단 둘둘 둘렀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이런 것도 제대로 못 하냐며 그를 한참이나 놀렸었는데…….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국 내 모든 사람의 사랑을 듬뿍 받던 황태자가, 붕대 같은 걸 스스로 감아 본 적이 있을 리 만무하니까.
“네가 불편하지 않도록, 뭐든 다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건 맞지만…….”
위너드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시선을 내리깐 채,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렇다고 이런 걸 다시 매어 주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