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느낌이 좋지 않아
(119/173)
119화. 느낌이 좋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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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느낌이 좋지 않아
2022.08.20.
마차를 타고 에라주리스 백작저로 향하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뒤를 조용히 따르는 호위의 말발굽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여도 보았지만, 아까 보았던 광경이 뇌리에 엉켜 도저히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어두운 창에 비친 내 얼굴을 우두커니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샬로네즈 왕녀가…… 앞으로 1년밖에 살지 못한다고?”
물론 일국의 왕녀라고 해서 중병에 걸리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하지만 샬로네즈 왕녀‘도’ 바이올렛 영애와 같은 시한부라는 사실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왕녀도 주인공 후보 중 한 명이 아닐까.
레어넌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기묘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감으로 추측한 것뿐이지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언제, 어디서, 누가 주인공 후보가 될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으니까.
나와 세이블처럼 한 나라에 여러 명의 주인공 후보가 살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며, 심지어 아주 가까운 사람과도 함께 주인공 후보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위너드의 과거를 통해 알게 되지 않았나.
생각을 이어 가던 나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야.”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해 봤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까 엿들었던 대화가 자꾸 떠올랐다.
‘사실은 줄곧 꿈꿔 왔습니다.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단장님처럼 다정한 분과 연인이 될 수만 있다면 하고요.’
‘좋아하지도 않는 분과 그런 말도 안 되는 계약을 할 수는 없습니다.’
레어넌의 진중한 목소리가 차례로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저는 진심으로 좋아하는 분이 따로 있습니다.’
또다시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가 말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모를 수가 없는 탓이었다.
다정하면서도 수줍은 고백을 전한 이후에도 레어넌은 변함없이 내게 한결같은 태도로 다가와 주었다.
내게 절대로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는 듯, 그날에 대해 다시 꺼내는 일도 없었다.
늘 한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서 곁을 지켜 주는 배려. 어떤 고민도 거리낌 없이 털어놓을 수 있을 듯한 자상하고 든든한 모습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그는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 있다고 했지만,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도저히 말로는 정의 내릴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마음속을 시끄럽게 어지럽혔다.
나는 가느다란 한숨을 흘리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니, 차가우면서도 선득한 유리의 감촉이 뜨거운 열기를 식혀 주는 듯했다.
‘레어넌과 샬로네즈는 예전부터 서로 알던 사이였구나.’
그러니 ‘단장님처럼 다정한 분과 연인이 되는 걸 꿈꿔 왔다’고 했겠지.
어쩌면 아델리움 왕실에서 레어넌을 이미 신랑감 후보 중 하나로 점찍어 놨을지도 모른다. 그는 일개 기사가 아니라 세실리카 황실의 핏줄이기도 하니까.
보통 황족이나 왕족들은, 타국의 왕실과 혼인하는 경우가 파다했다.
심지어는 서로 동맹 관계를 견고히 다지기 위해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정혼자를 정해 놓는 경우도 있었다.
아델리움 왕은 욕심이 많아 보이니 어지간한 이득으로는 만족하지 못할 테고, 그의 욕망을 만족시킬 만한 혼처는 딱 두 곳뿐이었다.
대륙의 양강, 세실리카 제국과 벨레드리안 제국 말이다.
“레어넌은 세실리카 황제의 조카니까……. 어? 잠깐만. 혹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나는 다급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마음이 급했던 나머지 세게 물어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따끔했다.
“으으, 으프…….”
하지만 덕분에 입 밖으로 내뱉으려던 말을 막을 수 있었다.
‘혹시 샬로네즈 왕녀는 위너드와도 만난 적이 있지 않을까?’라는 말을.
나는 쿵쿵 뛰는 심장을 애써 억누른 채 괜히 잘못한 사람처럼 아무도 없는 마차 안을 두리번거렸다.
‘크, 큰일 날 뻔했네.’
아무도 없는 좁은 마차 안이고 인기척 역시 느껴지지 않았지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아주 높은 확률로, 그 당사자가 듣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부어오른 입술을 손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한숨을 토했다.
아니, 뭐…….
지금은 비록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졌다지만 위너드도 한 나라의 어엿한 황태자였으니까.
틀림없이 아델리움의 왕실과도 교류가 있었겠지. 비록 샬로네즈는 기억하지 못해도…… 위너드는 그녀를 기억하고 있을 거야.
……응, 그냥 그렇다고.
‘내가 왕녀와 인사를 나눈 것도 지켜봤겠지?’
아, 물론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그런데 하필이면 나이까지 비슷해서, 만약 위너드에게 그런 일이 닥치지 않았다면…….’
“으아아!”
나는 괴성과 함께 유리창에 쿵! 소리가 나도록 이마를 박았다.
제발 이상한 생각 그만해!
……근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깜짝 놀란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얼얼한 이마를 문지르며, 앞쪽까지 들릴 리 없는 작은 목소리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는 이를 악물고 자꾸만 다른 쪽으로 뻗어 나가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러는 새, 바퀴가 멈췄다.
다소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마부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자, 값비싼 대리석과 진짜 금으로 잔뜩 장식된 으리으리한 현관이 나타났다.
그 앞에는 수척한 얼굴에 눈물을 매단 한 쌍의 노부부가 서 있었다.
하루아침에 딸이 실종되었다는, 에라주리스 백작 부부였다.
* * *
안내를 받아 응접실에 들어선 순간, 나는 잠시 자리에 멈춰 서서 표정을 관리해야만 했다.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은 건, 벽과 천장을 휘감은 붉은색 실크 벽지였다. 그 위에 수 놓인 옅은 핑크빛 장미 무늬와 어디선가 은은하게 풍기는 장미 향기로 인해 진짜로 커다란 장미꽃 안에 들어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다이아몬드와 커다란 루비가 주렁주렁 달린 커다란 샹들리에며, 대리석 위에 보석을 붙여 만든 인어 조각상 또한 시선을 잡아끌었다.
한쪽 벽면에는 각종 악기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장식인 듯한 것도 있었고, 실제 악기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띈 것은 산호색의 커다란 하프였다.
‘엄청난 재력을 자랑하는 명문 귀족가의 시한부 아가씨’라는 설정이 피부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바이올렛이 취미로 켜던 악기랍니다.”
내 시선이 어디 닿아 있는지 눈치챈 에라주리스 백작이 말했다.
“아, 네.”
나는 얼른 눈길을 거둔 채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자리에 앉자 테이블에 차를 비롯해 각종 케이크와 쿠키, 초콜릿과 캐러멜 과자 따위가 그득 차려졌다.
“모두 바이올렛이 좋아하던 과자들인데……. 드셔 보십시오.”
내가 선뜻 손을 대지 못하자 백작이 직접 나서서 권유하긴 했지만, 나는 그저 홍차를 홀짝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모두 맛있어 보이는 것들뿐이었지만, 깊은 수심에 잠겨 초췌해진 백작 부부 앞에서 뭔가를 먹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비단 백작 부부뿐만이 아니었다.
시중을 드는 고용인들의 얼굴에도 커다란 슬픔이 가득했다.
음울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저택의 구석구석에 빠짐없이 배어 있었다. 그녀가 모두에게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였는지 여실히 느껴졌다.
“로렐라 영애께서는 세이블 영애와 돈독한 사이시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백작님.”
“그렇다면 혹시 우리 바이올렛과는…….”
편지에 이미 밝혔는데도, 그의 목소리에서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행여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자그마한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적당히 둘러댈 수도 있겠으나, 실낱같은 희망조차 버리지 못하는 분들 앞에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제 친구인 세이블이 예전에 바이올렛 영애께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더군요. 그 후로도 계속 교류하곤 했는데, 근래 소식이 끊겨 무척이나 걱정된다고 했어요. 제가 마침 아델리움에 오게 될 기회가 생겨, 어떻게 된 일인지 직접 알아봐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내밀었다.
다름 아닌 세이블과 바이올렛이 주고받은 서신들이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짧은 편지일 뿐이지만, 이거라면 내가 세이블에게 부탁받았음을 증명할 수 있을 거다.
백작 부인은 편지를 보자마자 펑펑 눈물을 쏟아 냈다.
“흐으윽…… 바, 바이올렛! 내…… 딸, 바이올렛……!”
보고 있는 나 또한 눈시울이 뜨거워질 만큼 서러운 절규가 이어졌다.
“대체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니, 응? 흐윽, 내 딸아! 제발…… 소식만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흐으으윽!”
에라주리스 백작은 흐느껴 우는 부인의 어깨를 말없이 토닥였다. 이내 오열하다 지친 백작 부인이 어깨만 들썩일 즈음,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바이올렛은 레트너 남작가의 장녀인 엘레나 레트너와 유독 친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서로의 집을 오가며 자랐으니까요. 바이올렛이 사라진 그날…… 남작가에서 ‘밤의 정원’이라는 테마의 작은 만찬을 열었습니다. 평소 별을 보는 걸 좋아하는 엘레나 영애가 기획한 야외 파티였지요. 절친한 바이올렛 역시 초대받았습니다.”
“…….”
“잘 다녀오라고 웃으며 배웅까지 해 주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우리 딸은 나타나지 않았다더군요.”
“그럼 남작가에 가던 길에…….”
“네. 만찬은 밤에 열린다고 했지만, 바이올렛은 노을이 질 때 집을 떠났습니다. 먼저 가서 친구를 돕겠다고 했거든요. 인적이 좀 뜸해지는 시간이긴 하지만, 어둡지 않았으니 위험할 만한 때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거기다 시녀는 물론 호위와 마부도 있었으니…….”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람들은 물론, 마차의 행적조차 묘연하다는 게 사실인가요?”
“예……. 왕실에서도 이례적으로 적극적인 수사를 해 주셨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다들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그때, 에라주리스 백작 부인이 울먹이며 토로했다.
“혹시…… 바이올렛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던 건 아닐까요? 우리에게 차마 말하지 못한 끔찍한 비밀이 있었다든지…… 흐윽.”
“당신,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바이올렛이 얼마나 솔직하고 착한 아이인지는 누구보다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잖아.”
‘비밀’이란 단어가 귀에 꽂힌 순간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어 찻잔을 꽉 쥐었다.
백작은 나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그의 주름진 눈가엔 커다란 슬픔과 좌절이 짙게 배어 있었다.
나는 이미 차갑게 식어 버린 차를 말없이 들이켰다.
꺼져 가는 희미한 오렌지 꽃향기가 코끝에 스쳤다.
* * *
어느새 시간이 흘러 자정이 다 되었다.
나는 늦은 밤에야 백작 부부의 배웅을 받으며 현관을 나섰다. 크게 알아낸 것은 없지만, 이 이상 깊게 파고들어도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없는 듯했다.
아니, 너무나도 괴로워하는 그들의 얼굴을 마주 보고 이것저것 캐묻기가 힘들었다고 해야 맞으려나…….
“로렐라 님. 오늘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백작님. 저야말로 만나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에게 최대한 공손하게 예의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자마자, 또다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백작 부인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저택에 젊은 아가씨가 찾아와 준 것만으로도 우리에겐 크나큰 위로가 되었답니다. 꼭 딸이 돌아온 것 같아서…….”
맞잡은 손위로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콧등이 또다시 시큰해졌다.
“로렐라 님, 염치없는 부탁일 수도 있지만…….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라도 우리 바이올렛의 소식을 듣게 된다면…….”
“물론입니다, 백작 부인. 반드시 알려 드리겠어요.”
나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바이올렛이 후보에서 탈락해 소멸한 게 아닌 이상, 그녀가 존재했다는 흔적은 반드시 남아 있을 테니까. 다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발견하게 되느냐가 관건일 뿐.
마치 돌을 삼킨 것처럼 명치끝이 답답했다.
마차에 오르자마자 바퀴가 빠르게 움직였다.
어두운 정원을 지나 커다란 문을 나선 뒤, 조금 더 달리자 대로가 나타났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마부석 쪽으로 나 있는 작은 창문을 열었다.
“미안한데 부탁이 있어요.”
“네, 말씀만 하십시오. 로렐라 님.”
“혹시 서 트레비아 1번가에 잠시 들러 주실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마부는 씩씩하게 대답하고는 더욱 힘차게 고삐를 잡아당겼다. 호위를 맡은 병사도 조용히 곁을 따라왔다.
서 트레비아 1번가. 그곳은 바이올렛 영애가 탄 마차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이었다.
다시 창문을 닫고는 푹신한 좌석에 깊게 몸을 기댔다.
대체 바이올렛 영애는 어디로 간 걸까.
아무리 고민해 봐도 떠오르는 건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는 확인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소설 속 주인공이라고 해서 모두가 꽃길을 걷는 건 아니다. 뭐, 마지막에는 꽃길을 걷겠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어떤 키워드든 온갖 고생과 각종 사건에 연루되는 경우가 허다하고, 심하게는 목숨을 위협받기도 했다.
그러지 않으면 독자들이 흥미를 갖지 않을 테니까.
호수처럼 평온하고 잔잔하기만 한 삶에 열광하는 독자들은 없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로 그런 편이었다.
아마 우리의 ‘주식’을 사는 그들도 마찬가지겠지.
세이블만 해도 복수에 성공했을 때 가장 많은 주식을 팔았다고 했다. 실패했다면 동생에게 살해당했을, 그야말로 목숨을 건 도박에서 승리한 덕분이었다.
그러니 바이올렛에게도 ‘주인공 후보’다운 해프닝이 생겼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아…… 근데도 뭔가 좀 찝찝하단 말이야…….”
갑자기 실종이라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던 그때였다.
“그만둬. 로렐라.”
문득 건너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너드?”
반색하며 고개를 든 나는 순간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화려한 정복 차림이었다.
다만 비스듬히 상체를 숙이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얼굴에는…….
“더 이상 파고들지 마.”
여태까지 본 적 없는 어두운 눈빛과 무섭도록 굳은 표정뿐이었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아.”
한밤중 깊은 숲에 깔린 안개처럼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스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