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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안 됩니다 (118/173)


118화. 안 됩니다
2022.08.17.



 
레어넌이 샬로네즈를 밀어 내며 단호히 말했다.


“어서 방으로 돌아가시는 편이 좋겠군요.”

그러고는 곁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왕녀의 하녀에게 눈짓했다.


“왕녀님을 모셔다드리십시오.”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샬로네즈 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녀가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왕녀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잠깐 현기증이 난 것뿐이야. 괜찮아.”

“하, 하지만…….”

“잠깐인데, 뭘.”

“아…… 알겠습니다, 왕녀님.”

하녀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왕녀가 괜찮다는데 따르지 않을 순 없었다. 그녀는 결국 새파란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레어넌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우선 안정을 취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그편이 좋겠어요.”

나 역시 그녀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걱정되어 동조했다.

그러자 샬로네즈는 대답 대신 보석 같은 눈망울을 들어 우리를…… 아니, 정확히 말하면 레어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단장님께서는…….”

이윽고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정말로 다정한 분이시군요.”

말을 마친 샬로네즈의 어깨가 안쓰럽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 작은 움직임에 맞춰, 예쁜 입술을 비집고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가, 갑자기 왜 우는 거지……?

당황한 것도 잠시.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왕녀는 곧 의연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창백한 눈 밑을 쓸어내리는 새하얀 손끝에는 여전히 투명한 물기가 묻어났다.


“밤늦게 실경한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말을 마친 샬로네즈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각도로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복도 창가에 걸린 붉은 휘장 사이로 달빛이 쏟아졌다. 신비로운 백금발이 가냘픈 목선을 따라 나붓댔다.

이윽고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에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샬로네즈의 붉은 입술이 위로 고운 호선을 그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보았다.

작고 무해한 짐승처럼 순하고, 그저 여리게만 보였던 눈동자에 베일 듯 날카로운 섬뜩함이 스미는 것을.

* * *

다음 날.

흰 구름이 떠 있는 파란 하늘과는 달리, 로렐라를 포함한 사절단의 얼굴에는 짙은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살짝 열어 놓은 창문 밖에서 제법 쌀쌀한 바람이 계속해서 불어왔다. 하지만 모두의, 특히 레어넌의 뜨거워진 이마를 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커다란 대리석으로 만든 원탁을 손가락으로 느긋하게 두드리며 아까부터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한 남자 때문이었다.


“과거의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항구를 순찰하는 병사를 배로 늘릴 계획입니다. 아, 물론 해적들의 정보 또한 파악하는 대로 세실리카 제국과 공유하겠습니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날렵한 코, 그리고 유독 다부진 체형을 지닌 남자는 국경 수비와 치안을 맡은 페라로 후작이었다.

하지만 인상과는 달리, 중요한 질문마다 대답을 회피하며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는 능력이 범상치 않았다.


“항구를 단속하기만 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게다가 해적들의 본거지는 보통 멀리 떨어진 섬이나, 험한 해안가 지대에 있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레어넌은 화를 숨긴 채 다시 한번 점잖은 목소리로 의견을 관철했다.


“그러니 세실리카의 기사단이 직접 파렐만까지 순찰하는 것에 대해, 아델리움의 이해와 협력을 구하고자 합니다. 물론 이 배는 순찰 이외에 다른 목적은 조금도 없음을 약속드립니다.”

“하지만 파렐만은 아델리움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곳인데…….”

페라로 후작이 헛기침하며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물론 레어넌 단장님의 말씀만큼은 누구보다 신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 어부들을 해적으로 오인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만약 세실리카의 기사단이 무고한 사람을 해치면요? 그땐 양국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이 되어 버릴지 모릅니다. 전 그게 두려운 겁니다.”

그러자 아델리움의 왕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페라로 후작은 기다렸다는 듯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레어넌은 표정을 숨기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순간적으로 힘을 준 탓에 단정히 놓여 있던 그의 손등 위로 굵은 힘줄이 돋았다.

말은 돌려서 하고 있지만, 세실리카의 기사단이 일반 어부와 해적도 분간 못 하는 머저리면 어떻게 하겠냐는 뜻이다.

여태 해적들을 방관해 일을 여기까지 만든 건 본인들인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만 하면서 시간을 끌다니…….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 모든 게 아델리움 왕의 묵인하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왕의 침묵은 곧 긍정이니까.

레어넌은 눈앞의 물을 단숨에 들이켜는 것으로 화를 억눌렀다. 이런 자리에서, 그것도 능구렁이 같은 상대 앞에서 섣불리 감정을 드러내는 건 바보 같은 짓이므로.

그때였다.


“폐하, 그리고 페레로 후작.”

부드러운 목소리가 팽팽한 분위기를 녹이듯 내려앉았다.


“괜찮으시다면 제 의견을 피력해도 되겠는지요?”

“말해 보아라. 샬로네즈.”

줄곧 다물려 있던 왕의 입술이 비로소 열렸다.


“저는 세실리카 제국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네? 와, 왕녀님 그건…….”

페라로 후작은 몹시 당황한 듯 말까지 더듬으며 그녀와 왕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샬로네즈 왕녀는 흔들림 없이 말을 이었다.


“아델리움 어부들 중 상당수는 파렐만에서 조업하여 생계를 꾸려 가고 있습니다. 아델리움의 병사든 세실리카의 병사든 관계없이 누군가가 정기적으로 순찰을 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어부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을 겁니다.”

아름다운 색채를 띠는 그녀의 눈동자가 당당하게 빛났다.

가녀린 어깨를 들썩이며 애처롭게 눈물을 훔치던 어젯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사랑스럽게 웃으며, 누구보다 즐겁게 분위기를 띄우던 만찬 때와도 다른 모습이었다.


“흐음.”

왕이 작게 침음했다. 하지만 왕녀는 굴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대신 순찰선을 꾸릴 때, 저희 병사들을 함께 승선시키면 어떻습니까. 아델리움의 앞마당이라 불리는 곳이니만큼, 그곳 지형에 익숙한 병사들이 많습니다. 해류의 흐름은 물론이고 날씨도 잘 알고 있지요. 순찰 시에 큰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녀의 말처럼 분명 도움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아델리움 병사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도 아예 협상이 결렬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긴 한데…….

레어넌이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로렐라가 슬그머니 말문을 열었다.


“병사들을 승선시키겠다는 아델리움의 제안에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만…….”

로렐라는 콕 집어 왕녀를 거론하는 대신 일부러 ‘아델리움’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며 슬쩍 왕의 눈치를 살폈다. 이번에도 침묵하는 것으로 보아, 이 의견에 어느 정도 마음이 기울었음이 분명했다.


“네. 어떤 것이지요? 제 생각에는 그편이 양국을 만족시키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아델리움에도 아주 유능한 병사들이 많이 있답니다.”

“외람되지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여쭈어도 될까요? 합류하는 병사의 숫자나, 승선 방법 등 생각해 두신 게 있는지 궁금합니다.”

“파렐만에서 멀지 않은 곳에 큰 항구가 있습니다. 그곳에 먼저 배를 정박한 뒤, 저희 병사들을 승선시키면 어떨까요. 병사의 숫자는 세실리카 분들의 의견을 존중토록 하겠습니다. 세실리카의 함선이니까요.”

로렐라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순찰뿐 아니라, 다른 부분에도 도움이 될 수 있겠군요.”

“다른 부분이라 하시면……?”

“무역 교역 말입니다. 이 조건이 체결된다면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그것도 병사들이 잔뜩 타고 있는 안전한 함선이 될 테니까요. 아델리움의 항구까지 가는 길에 수출품을 실어 나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운송 수단은 없을 듯합니다.”

로렐라의 제안에, 이번에는 왕녀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직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이미 솔깃한 기색이 역력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는 듯 차분한 태도로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로렐라를 바라보던 레어넌의 입술 끝이 미묘하게 올라갔다.

전쟁으로 인해 중단되었던 무역로를 다시 뚫는 것. 그건 세실리카 황제가 몇 번이고 입에 올렸던 가장 중요한 안건 중 하나였다.


‘손가락을 내주고 대신 다리를 얻자는 거군.’

그래, 본디 협상이란 그런 것이니까.

덕분에 날 서 있던 신경을 무던하게 가라앉힐 수 있었다. 레어넌은 여전히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로렐라를 따라 느긋하게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살랑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을 바라보다 무심코 고개를 드니, 파란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 * *

가장 중요한 실무 회의에 이어, 미리 약속된 오찬 및 오후의 티 파티까지. 사절단 공식 임무를 시작한 첫날일 뿐인데 로렐라는 그야말로 진이 다 빠져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저녁 만찬은 상대적으로 온화했다는 사실이었다. 손님들을 배려한 건지, 아니면 자신들도 체력을 아끼기 위해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

뭐, 둘 다겠지.

로렐라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고급스러운 케이프를 조용히 챙겨 들었다. 방금 전담 하녀로부터 마차가 준비되었다는 말을 들은 터였다.

아델리움에 도착하기 전, 로렐라는 바이올렛 에라주리스가 살고 있던 저택에 미리 서신을 보내 놓았다.

사라진 딸을 애타게 찾고 있던 그녀의 부모님은 즉시 답신을 보내왔다. 언제든지 좋으니 부디 꼭 방문해 달라면서 말이다.

일면식도 없는 자신을 환영한다는 답신에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로렐라는 곧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편지 서문에 미리 세이블의 이름을 밝혔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답신 곳곳에선 뭐든 좋으니 실종된 딸에 관한 실마리를 잡아 보려는 애타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에라주리스 백작가는 다행히 왕궁 수도에 있었다. 사절단 일정은 후반으로 갈수록 빡빡했기에, 로렐라는 바로 오늘 밤 찾아가기로 했다.

물론 방문하기엔 조금 늦은 시각이긴 했지만, 백작 부부도 최대한 빨리 와 주길 바란다고 했으니 괜찮겠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게 아무래도 석연치 않단 말이야.’

함께 가겠다는 하녀를 만류하고 홀로 복도를 가로지르며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들을 조용히 정리하던 그때였다.


“……레어넌 단장님.”

어디선가 훌쩍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렐라는 순간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바로 샬로네즈 왕녀의 목소리였다.


“늦은 시각에 갑자기 이런 곳으로 모신 점, 죄송합니다.”

목소리는 오른편에 있는 작은 응접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로렐라는 잠시 고민하다 살짝 열린 문 쪽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평소 쓰지 않는 곳인지, 다른 곳에 비해 조촐한 장소였다. 벽지를 비롯한 커다란 소파는 왕궁의 것답게 화려하고 고급스러웠지만 그뿐이었다.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은 테이블 위로 은은한 달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 너머로 기다랗게 늘어진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림자를 좇아 시선을 위로 올리니, 레이스 커튼을 친 창가에 레어넌 단장과 샬로네즈 왕녀가 서 있었다.


“간절히 부탁하셔서 응하긴 했지만, 확실히 늦은 시간입니다. 단둘이 보기엔 적절하지 않은 시간이고요. 대체 무슨 부탁이시기에 절 여기까지 부르신 건지요?”

애처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왕녀와는 달리, 레어넌의 말투는 사무적이고 딱딱했다.


“그게, 그러니까…….”

왕녀는 연신 드레스 자락만 만지작거리며 쉬이 입을 떼지 못했다.

로렐라 역시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몰래 숨어서 훔쳐보는 게 얼마나 무례한 행동인지는 물론 잘 알고 있었다. 혹여 이러다 들키면, 저뿐만 아니라 레어넌 역시 곤란해질 거라는 것도.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고 머릿속으로 재차 생각만 하던 그때, 레어넌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샬로네즈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단장님께서도 아델리움 왕국에 내려오는 저주에 관해 알고 계시지요? 왕녀가 태어나면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하고 목숨을 잃게 된다는…….”

잠시 침묵하던 그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네. 하지만 낭설이라 들었습니다. 그 증거로 왕녀님께서는 이미 예전에 스무 살을 넘기셨지 않습니까?”

이는 나라 안팎으로 알음알음 퍼진 이야기였다. 왕녀가 무사히 스무 살을 넘긴 것을 축하하기 위해, 세실리카의 황제 역시 큰 선물을 보냈다는 소문을 로렐라 역시 들었다.


“……아뇨.”

처연하게 고개를 저은 샬로네즈의 어깨가 덧없이 들썩였다.


“그 저주 자체는 피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듣기만 해도 가슴이 미어질 듯한 절절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불행한 운명에 대한 예언은 맞아떨어졌습니다. 저는 앞으로 1년 정도밖에 살지 못하니까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놀란 건 레어넌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는 다소 높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단장님께서 놀라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사실이랍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저와 제 측근인 주치의뿐이지요.”

왕녀는 눈물로 양 뺨을 적신 채 처연하게 미소 지었다.


“아버님과 어머님조차도 모르고 계시니 부디 비밀로 해 주시길 부탁드려요.”

레어넌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 진단이 사실이라면, 하루빨리 주위에 알리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대륙 전역에 유명한 명의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델리움 왕실의 일이니만큼, 모두 기꺼이 협조할 겁니다.”

보통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레어넌처럼 반응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로렐라는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이 조금 복잡했다.

샬로네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이리된 이상 운명을 받아들이려 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딱 1년만, 제 약혼자가 되어 주실 수는 없으실까요?”

“네?”

……응?

레어넌은 놀란 목소리였고, 로렐라 역시 두 눈을 크게 떴다.


“제 삶은 앞으로 1년뿐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시는 부모님께선 요즘 부쩍 다른 귀족들과 제 혼담을 나누고 계십니다. 물론 두 분을 비롯해 많은 분의 눈을 가리는 건 죄스러운 일입니다만…….”

“…….”

“그래도 얼마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숨기고 이대로 원치 않는 혼인을 치를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딱 1년 동안만 저와 계약 연애를…… 해 주지 않으시겠어요?”

말을 마친 왕녀는 살포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윽한 달빛에 드러난, 양 뺨에 홍조가 가득한 얼굴은 마치 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인형처럼 아름다웠다.


“아니. 사실은 줄곧 꿈꿔 왔습니다.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단장님처럼 다정한 분과 연인이 될 수만 있다면 하고요.”

순수한 눈망울에 또다시 맑은 눈물이 가득 고였다. 화장도 거의 하지 않은 수수한 모습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매혹적으로 빛났다.

더 이상 몰래 엿듣고 있을 수 없었던 로렐라가 조용히 몸을 돌리려던 그때였다.


“죄송하지만 거절합니다.”

곧장 거절이 떨어졌다. 조금도 고민하지 않은, 단호한 대답이었다.


“네……?”

왕녀는 두 귀를 의심하는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왕녀님의 치료와 회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돕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명의를 수소문해 보내드리지요. 남의 시선이 절대로 닿지 않는 곳에 따로 치료실도 마련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부탁은……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거침없이 이어졌다.


“무, 물론 갑작스러운 제안에 무척 당황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짜로 연인이 되어 달라는 게 아니라, ‘그런 척’만 해 주시면 되는…….”

“아뇨. 그것도 어렵겠군요. 좋아하지도 않는 분과 그런 말도 안 되는 계약을 할 수는 없습니다.”

왕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당황한 듯했으나, 레어넌은 끝까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뒤로 조금 더 물러났다.


“저는 진심으로 좋아하는 분이 따로 있습니다.”

올곧은 눈동자가 달빛을 꿰뚫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제 마음에 거짓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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