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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친구가 되고 싶어요 (117/173)


117화. 친구가 되고 싶어요
2022.08.13.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당황한 것도 잠시.


‘와, 예쁘다.’

나는 완전히 넋을 놓은 채 내 손을 꼭 잡고 서 있는 왕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본 샬로네즈 왕녀는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인형 같았다. 두 눈을 깜빡일 때마다 나비가 날갯짓하듯 팔랑이는 풍성한 금빛 속눈썹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 아래 보석처럼 박힌 눈동자는, 가장 아름다운 노을의 색깔만 뽑아 만든 듯 찬란한 주홍빛이었다.

발갛게 홍조를 띤 뺨 역시 여자인 나조차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샬로네즈, 귀빈들을 만나 뵙기 위해 모두 만찬장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는구나. 어서 소개해드리자꾸나.”

그때 뒤에서 애정이 가득 담긴 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잘됐다. 저랑 함께 가요. 로렐라 님.”

샬로네즈가 여전히 내 손을 꼭 잡은 채로 살짝 잡아당겼다.

얼떨결에 그녀를 따라서 움직이긴 했지만, 두 손을 꼭 잡힌 채로는 걸음을 뗄 순 없었다.

맞잡은 두 손을 망연히 바라보고만 있자 샬로네즈가 또다시 앗, 하고 낭패 섞인 목소리를 토해 냈다.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그녀는 비로소 손을 놓고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그 어느 때보다도 예의를 지켜야 하는 자리라고 단단히 주의를 들었는데…….”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손을 꼼지락거리는 것이, 무척이나 풀이 죽은 듯했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붉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엔 친근감을 표시하며 마구 들이대다가 시무룩해진 귀여운 강아지처럼 보였다.


“실례라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웃으며 얼른 손을 내저었다.


“이토록 진심으로 환대해 주시니, 오히려 감사할 따름인걸요.”

“정말이신가요……?”

“네, 그럼요.”

바로 고개를 끄덕이자 한껏 울상이던 그녀의 눈가가 비로소 환하게 펴졌다.


“부디 준비한 만찬이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사실은 로렐라 메이레드 님의 성함이 사절단 명단에 있는 걸 본 후부터 줄곧 만나 뵙길 고대했답니다……!”

왕녀의 발랄한 수다는 만찬장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끊이질 않았다.


“실은 제가 직접 지시한 메뉴가 한 가지 있어요. 다른 분도 아닌 로렐라 님의 방문이니, 이 메뉴만큼은 열심히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덕분에 내 곁에서 함께 걸음을 옮기던 레어넌은 입조차 떼지 못할 정도였다.


“후후, 만찬이 끝나고 그게 뭔지 한 번 맞춰 보시겠어요?”

게다가 어찌나 친화력이 좋은지, 단 한 순간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왕녀님께서 특별히 저와의 만남을 고대하고 계셨다니 무척이나 영광입니다만……. 그 이유를 여쭈어도 될까요?”

이쯤 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아, 그게 그러니까…….”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세실리카의 북부를 다스리는 공작님과의 혼인을 무효로 되돌리셨다고…….”

역시.

내심 짐작했던 바였다. 나라 밖까지 퍼질 만한 가십은 솔직히 그것뿐이니까.


“그 후에 홀로서기에 멋지게 성공하셨다고 들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다 전율이 일었답니다. 정말 대단하세요!”

흔히 사교계의 심술궂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혹시 비꼬는 건 아닐까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이내 괜한 의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순수하고 맑은 눈동자는 물론, 붉게 상기된 얼굴은 일부러 꾸며 낼 수 없는 것이니까.

다소 흥분한 듯, 샬로네즈는 조금 큰 목소리로 주먹을 꼭 쥔 채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사실은 저도 차에 곁들이는 달콤한 과자를 무척이나 좋아하거든요. 제 이름으로 가게를 내는 상상을 해 본 적도 있지만, 언제나 상상에만 그쳐야 했어요. 성공하리란 보장도 없고, 무엇보다 아바마마께서 허락해 주지 않으실 테니까요.”

“아, 네에.”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귀부인들 사이에서 오르내리는 이름이 하나 있더라고요. 세실리카에 가면 꼭 들러야 할 디저트 맛집이라면서 말이에요!”

“그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닌데…….”

요즘 레아의 가게에 부쩍 외국인 손님이 늘어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나라 밖에서까지 그 이야길 들으니, 무척이나 쑥스러웠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데요! 그래서 말인데, 오늘 만찬에 나올 디저트에 대한 감상평을 꼭 좀 들려 주시…… 앗, 이런.”

왕녀가 화들짝 놀라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내 입으로 먼저 말하면 안 되는데…….”

눈썹을 추욱 내려뜨린 채 또다시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는 모습이 몹시 귀여웠다. 한 나라의 왕녀인데도 무척이나 소탈한 사람이었다.

나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왕녀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준비하셨다니, 꼭 감상평을 들려드릴게요.”

“와아, 정말요?”

“그럼요.”

실망한 얼굴에 다시 생기가 차올랐다. 두 눈이 마주치자 예쁜 입술 사이로 귀여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어여쁘고 착한 동생이 한 명 생긴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어느새 그녀와 손을 꼭 맞잡은 채, 만찬장 안으로 들어섰다.


 

* * *

만찬장에는 이미 왕실에서 중요 직책을 맡고 있거나, 혹은 왕족들과 친분이 깊은 귀족들로 가득했다. 덕분에 또다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인사가 시작되었다.

제국과는 조금 다른 예법에 신경 쓰랴, 또 사람들 이름과 직책을 외우랴……. 그야말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왕국을 주름잡는 수많은 귀족을 알게 되었다.


‘혹시 실종되었다는 바이올렛 영애에 관한 단서가 나올지도 몰라. 모든 이야기를 주의 깊게 귀 기울여 봐야겠어.’

나는 아델리움에 오기 전, 세이블에게서 부탁받은 일을 떠올렸다.

비록 진짜 시한부는 아니지만, 시한부인 척 인생을 즐겼다던 바이올렛 에라주리스에 대해 알아봐 달라던 부탁을.

소멸된 것도 아닌데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 버렸다는 그 말이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하지만 오래 다른 생각에 빠져 있을 수 없었다. 은쟁반을 든 시종들이 등장한 탓이었다. 쟁반 위에는 마치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아름다운 요리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앞으로 공사다망한 일정이 있겠지만, 오늘만큼은 복잡한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마음 편히 즐겨 주면 고맙겠소.”

제하일 아델리움 왕의 말을 신호로, 만찬회가 시작되었다.

분위기를 주도한 건 놀랍게도 샬로네즈 왕녀였다.

그녀는 사람들의 말에 잘 웃어 주었고, 두루두루 화제를 끌어가는 능력 또한 대단했다. 게다가 살짝 소외되는 듯한 사람이 있으면 바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도록 이끌어 주는 배려심까지 엿보였다.

덕분에 나 역시 다소 편안한 마음으로 만찬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즐거운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사람들의 대화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던 제하일 왕이, 나를 비롯한 다른 사절단 사람들을 한 번 살피는가 싶더니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세실리카 사절단 여러분.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이렇게 찾아와 주어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리겠소.”

그러자 그의 곁에 앉아 있던 레어넌이 즉각 화답했다.


“저희야말로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허허, 별말씀을. 다만 다음부터는 두 손 가볍게 와 주시오. 서로의 사정을 모르는 바도 아닌데, 제국에 큰 부담을 지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

제하일 왕이 너그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세실리카의 시국을 과인도 익히 잘 알고 있는데, 괜히 신경 쓰이게 한 것 같아 죄송스럽군. 이런 물질적인 것들이 없어도, 우리 아델리움은 세실리카 제국을 진정한 친구로 생각한다는 말도 전해 주시오.”

인자한 미소와 함께 내뱉는 말은, 얼핏 들으면 마음 씀씀이가 퍽 상냥하다고 착각할 만했다.

하지만 속뜻은 달랐다.


‘전쟁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무리해서 선물을 준비한 게 아니냐고 빈정거리는 거네.’

게다가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마치 우리가 아델리움과 긴밀한 우호 관계를 맺고 싶어서 선물을 싸 들고 찾아온 것처럼 비칠 여지가 충분했다.


“따듯한 배려 감사드립니다, 폐하.”

레어넌에게도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였을 것인데, 그는 여전히 선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덧붙였다.


“하오나 제국은 작은 전쟁을 치르고, 이미 예전의 위상을 되찾았습니다. 그 기쁨을 나누고자 소박하게 준비하신 것이오니, 부디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의 대답에도 역시 뼈가 느껴졌다. 순간 제하일 왕의 입가에 떨떠름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 와중에도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여전히 끊이지 않았지만, 이 또한 왠지 모르게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이 자리는 아무래도 즐거운 만찬이 아니라, 이제부터 겪게 될 팽팽한 기 싸움의 서막인 듯했다.


“로렐라 메이레드 님은 사절단에 발탁된 건 처음이라지요.”

당연히 내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습니다. 왕비 전하.”

“그뿐만 아니라 영애께서는 황실 일을 하는 게 처음이라고 들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대단하네요. 각국을 대표하는 얼굴이니만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 방면에 두루 능통한 자에게 어울리는 자리이지요.”

그녀 역시 변함없이 자애로운 눈빛이었지만, 내게 던지는 말엔 가시가 잔뜩 박혀 있었다.


“능력 있는 귀족들이 수도 없이 많았을 텐데, 그들을 제치고 뽑히다니 대단하군요.”

아, 그러니까 너는 초짜인 주제에 어떻게 사절단으로 뽑힌 건진 모르겠지만 앞으로 겁 없이 나대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거지?


“감읍할 따름입니다, 왕비 전하.”

그럴 수야 없지.

나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세실리카 황제 폐하의 빛나는 안목 덕분에 크나큰 영광을 입었사오니, 그 이름에 폐를 끼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웃는 얼굴에 침 뱉어 봐, 어디.


“모쪼록 왕비님께도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하나하나 배우다 보면 분명 언젠가는 ‘세실리카 제국’을 위해 커다란 힘이 되리라 믿습니다.”

특정 단어를 일부러 힘주어 발음하자 아니나 다를까, 왕비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애써 입꼬리를 위로 올리곤 있지만, 괘씸해하는 티가 역력했다.

하지만 나는 위축되긴커녕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그동안 별의별 일들을 다 겪다 보니, 솔직히 말해 이런 기 싸움 같은 건 내게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와인 잔을 집어 든 찰나,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니 무려 양쪽에서 두 사람이 내게 열렬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한 사람은 레어넌이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바로…… 샬로네즈 왕녀였다.

* * *

만찬회가 끝난 건 깊은 밤을 앞둔 시점이었다.

미리 배정된 방에는 전속 하녀까지 미리 대기 중이었다.


“편히 잠자리에 드실 수 있도록 차를 준비할까요? 아니면 목욕물을 먼저 가져다드릴까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나중에 부탁드릴게요. 일정 문제 때문에 레어넌 단장님과 상의할 게 있어서요.”

개인 시간 동안 무얼 할 건지 전부 보고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말도 없이 계속해서 밖을 돌아다니면 레어넌이 걱정할 게 분명하니 어느 정도 귀띔해 줄 생각이었다.

뭐, 세이블과 친분이 있는 바이올렛 영애의 안부를 알아보려 한다는 걸 굳이 비밀로 할 필요도 없고.


“그러시군요.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레어넌의 방이 바로 내 옆방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순순히 그녀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문을 열자 한층 어두운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말은 바로 옆방이라고 했지만, 거리가 꽤 멀었다.

나는 하녀가 든 램프 불빛을 따라 레어넌의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 앞에 도착해 조심스럽게 노크하려던 순간이었다.


“로렐라 님.”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어?”

다름 아닌 샬로네즈 왕녀였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와, 왕녀님? 왜…… 여기 계세요?”

소리를 들었는지 레어넌 역시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왔다.


“로렐라?”

그 역시 순간 왕녀를 보고는 발을 멈칫했다.


“그게…….”

샬로네즈는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푹 고개를 숙였다.


“……실은 사과를 드리고 싶어서요.”

“사과요?”

“네. 만찬장에서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서 다소 무례하게 느끼실 수 있는 발언을 하신 점,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그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물론 불쾌한 건 사실이었지만, 알력이 존재하는 자리라면 어디에서나 벌어지는 일 아닌가.

오히려 이 일을 마음에 담고 일부러 사과하러 온 왕녀가 특이한 경우였다.


“저는 로렐라 님과 진심으로 친한 친구가 되고 싶거든요. 부디 이 마음만큼은 믿어 주셨으면 해요.”

왕녀는 떨리는 숨을 내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레어넌 님.”

그녀는 기품 있는 발걸음으로 한 발, 한 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까는 떨려서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이렇게 다시 만나 정말…… 기, 기뻐요. 사실은…….”

파르르 떨리는 고운 속눈썹에 물기가 서린 그때였다.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그녀가 비틀거렸다.


“좀, 어지러워서……!”

그러고는 이마를 감싸 쥐더니, 레어넌의 품에 안기듯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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