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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말할 수 없는 것들 (116/173)


116화. 말할 수 없는 것들
2022.08.10.


세실리카 제국의 사절단이 아델리움 왕국으로 출발하는 아침이 밝았다.

커다란 범선이 정박한 항구에는 구름 같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먼 길을 떠나는 사절단의 안녕과 순항을 기원하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이 염원을 담아 빈 덕분일까.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날씨가 그들을 반겼다.

쉬지 않고 불어오는 순풍에 배는 마치 바퀴라도 달린 것처럼 매끄럽게 나아갔다.

눈 부신 햇살이 잔잔한 파도 위로 쉼 없이 부서져 내렸다. 수면을 따라 낮게 비행하다 간간이 먹이를 찾아 날쌔게 잠수하는 바닷새들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사절단 일원들은 물론, 외국에 나가 본 경험이 풍부한 자들로 구성된 수행원들, 그리고 선원들까지 항해가 평화로워 다행이라며 좋아했다.

모두가 들뜬 기색이 역력한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로렐라는 출발 직후부터 갑판 위에서 끝도 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으로만 가득했다.

친하게 지낸 친구와 밤이고 낮이고 할 것 없이 곁을 지켰던 신하, 그리고 낳아 주신 부모님까지.

그 누구도 나를 조금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건 과연 어떤 기분일까…….

아마도 무척이나 참담하고 절망적인 일이겠지. 아무리 상상하고, 또 상상해 보아도 그녀가 추측할 수 있는 건 단지 단편적인 감상일 뿐이었다.

실제로 그가 어떤 시간을 보내 왔을지, 어떤 고통 속에서 지냈을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로렐라는 멍하니 시선을 위로 들었다. 새하얀 갈매기가 눈부신 창공을 그림처럼 가로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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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렐라.”

그때,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언제나처럼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레어넌 베르하르트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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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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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그럼요.”

얼른 대답하며 생긋 웃어 보였지만, 조심스러운 눈길은 여전히 그녀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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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안 좋은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요. 배를 이렇게 오래 탄 건 처음이실 테니…….”

레어넌은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작은 약병 하나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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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뱃멀미를 하실까 싶어서 준비했습니다. 약을 먹었는데도 계속 울렁거린다면 참지 말고 꼭 말씀해 주십시오. 배에 의원도 타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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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감사합니다.”

로렐라가 감사 인사와 함께 약을 받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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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뱃멀미는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저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 말이 거짓은 아닌지 그녀는 약을 쥐고만 있었고, 자연스러운 미소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제야 레어넌은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며, 그녀의 옆에 서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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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기에 그렇게 집중하고 계셨습니까?”

난간에 팔을 올리고 그녀에게 맞춰 눈높이를 낮추자, 바람에 살랑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그의 뺨을 간질였다.

단지 그뿐인데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가파르게 요동쳤다.

이렇게 바라만 봐도 행복이 느껴지는 사람은 그녀가 유일했다.

눈부신 미소가 레어넌의 입가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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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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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라…….”

잠시 고민하던 로렐라가 이내 쑥스러운 듯 배시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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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긴장했나 봐요. 실은 이렇게 먼 곳으로 가는 게 처음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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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그래서 간밤에 제대로 주무시지 못한 모양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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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티가 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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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조금요.”

일부러 단호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로렐라가 밝게 소리 내어 웃었다. 또다시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그녀의 붉은 머리칼이 흩날렸다.

레어넌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조심스레 넘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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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저도 거의 잠들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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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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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닙니다.”

순간 깜짝 놀라, 그는 얼른 그녀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하마터면 로렐라의 볼은 물론, 입술까지 매만질 뻔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많은 것을 바라게 된 걸까. 이 욕심은 대체 언제쯤 멈출까. 아니, 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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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단장님도 잠을 못 주무셨어요?”

방금 그가 얼버무린 말을 놓치지 않은 로렐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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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실은…… 밀린 업무를 전부 처리하고 와야 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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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큰일이네요.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으니, 그동안만이라도 푹 쉬시는 게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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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괜찮습니다.”

물론 밀린 업무를 처리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밤을 꼬박 샜다는 말은 진짜였다.

밤 동안 정복을 완벽히 갖춰 입은 채 해가 뜨기만을 기다렸다는 것도 비밀로 해야겠지.

뜬눈으로 긴 시간을 보낸 건, 설레었기 때문이다.

로렐라와 함께 여정을 떠난다는 사실이.

놀러 가는 게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몰려오는 기대감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단둘이서 오고 싶었다. 갑판에서 서서 함께 바람을 맞는 것도, 여행을 가는 기대감에 들뜨는 것도 일 때문이 아니었으면 했다.

그녀에게 물어볼까. 이번 일이 끝나면, 함께 여행을 가는 건 어떠냐고…….

잠시 고민하던 레어넌은 운을 떼려던 입술을 꾹 다물었다. 로렐라가 잠도 설칠 정도로 긴장한 상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절단 일은 물론, 외국으로 나가는 것도 처음이니 무리도 아니지. 그런 그녀에게 괜한 이야기로 부담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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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단장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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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말씀하십시오.”

그는 절대로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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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벨레드리안 제국의 황제에 대해 잘 아시나요?”

한데 로렐라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예상 밖의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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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레드리안의 에르헨 황제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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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헨 황제…….”

자신의 말을 따라서 되뇌던 로렐라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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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단장님께서는 국제 정세에 관해서도 잘 알고 계시니까 혹시 아실까 싶어서 여쭤봤어요.”

표정이 흔들렸던 건 아주 잠시뿐, 그녀는 곧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왜 그런 걸 묻는 걸까.

묘한 의구심이 들었지만, 레어넌은 일단 그녀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기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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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안다고 하긴 애매하지만, 직접 뵌 적은 있습니다. 그분의 즉위식 때, 사절단 대표로 참석한 적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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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혹시 인상이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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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말수가 적은 느낌이었고…….”

그가 곰곰이 생각한 끝에 계속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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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검술에 굉장히 능통하시다고 들었습니다. 아니, 그냥 능통한 게 아니라 황궁 소속 검사들이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다고…….”

레어넌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문득 위화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베르하르트 가문은 세실리카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중의 명문으로서, 예전부터 타국 귀족들과 잦은 교류를 해 왔다.

심지어 황제의 조카이기도 했으니 외국 황족, 귀족들과의 자리에도 종종 동석했다. 지금 향하고 있는 아델리움의 국왕 부부와도 여러 차례 얼굴을 본 적이 있을 정도였다. 하물며, 가장 가까운 우방국인 벨레드리안 제국은 어떻겠는가.

그런데 어째서 에르헨 황제를 그제야 처음 봤을까.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자의 존재를 즉위식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게다가 그 정도로 뛰어난 검술 실력자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레어넌의 귀에는 그 이름이 들려올 수밖에 없었을 텐데.

물론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해 황태자를 외부에 공표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흔하지는 않지만, 아주 없는 일도 아니라는 뜻이다.

보통은 황위 다툼이 치열하거나, 남에게 비밀로 해야 할 만큼 황태자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있을 때나 그렇게 하는데…….

갑자기 머릿속이 안개처럼 흐릿하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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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후계를 잇는다는 건…… 당연히 몹시 중요한 일이지요?”

로렐라의 말에 레어넌은 얼른 상념을 끊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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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누가 차기 황제가 되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좌지우지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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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 세실리카 제국의 후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황제 폐하께서는 황녀나 황자가 없으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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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가까운 핏줄……. 그러니까, 방계 중에서 가장 알맞은 사람이 뒤를 잇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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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로렐라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금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대체 무엇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여전히 생각에 골똘히 잠긴 얼굴이었다.

처음 떠나는 긴 여정에 설레는 것도, 사절단 임무에 긴장한 것도 아닌 듯했다.

알 수 없는 결연함이 엿보이는 표정.

레어넌은 그녀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함께 수평선 너머를 응시했다.

……여전히 나에겐 허락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구나.

그런 생각에 더 이상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세실리카 제국의 차기 황제 후보 중에는, 자신의 이름도 있다는 말을 끝끝내 할 수 없었다.

단단하게 맞물린 입술 사이로 어느새 쓰디쓴 맛이 감돌았다.

* * *

내내 평온했던 날씨 덕분에, 사절단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아델리움 왕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리 전서구를 보내 놓긴 했지만, 워낙 일정이 당겨진 탓에 왕궁에서는 아직 준비가 한창일 듯했다.

하지만 그 예상을 깨고 그녀가 마주한 광경은 실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항구까지 마중 나온 화려한 마차에는 세실리카 제국과 아델리움 왕국의 상징이 새겨진 커다랗고 휘황찬란한 장식이 달려 있었다.

사절단을 모시기 위해 동원된 마부와 시종, 그리고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하나같이 값비싼 옷을 잘 차려입고 격식 있는 자세로 서 있었다.

마차의 뒤를 따라 늠름한 검은 말을 타고 따라오는 기사들의 은빛 갑옷은 푸른 하늘이 그대로 비칠 정도로 반짝였다.

왕궁까지 향하는 길도 멋지게 꾸며져 있었다. 잘 정비된 길을 따라 가로수가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 빼곡한 나무들의 꼭대기에는 어김없이 두 나라의 깃발이 꽂혀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도착한 아델리움 왕궁은 세실리카 제국의 황궁에 비하면 조금 아담했다.

하지만 조금 작다뿐이지, 고풍스럽고 우아한 느낌은 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로렐라를 포함한 사절단 일행은 엄청난 환대를 받으며 커다란 알현실에 들어섰다. 백수정과 진주로 벽면을 장식한 아주 화려하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단상에 마련된 의자에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부부와 한 명의 아리따운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로렐라는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신비롭게 반짝이는 백금발과 도자기처럼 흰 피부, 은은하게 빛나는 호박색 눈동자와 복숭앗빛 입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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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여자가 바로 아델리움 국왕 부부가 목숨처럼 아낀다는 샬로네즈 왕녀구나.’

천사 같은 외모도 외모지만, 왕녀는 여러모로 인상 깊은 사람이었다.

천진난만한 눈을 반짝이며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피는 것은 물론, 가끔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먼저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이는 점 등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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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아델리움의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사절단 대표인 레어넌 베르하르트가 앞에 나서서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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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십시오. 우리 아델리움 왕실은 진심으로 세실리카 제국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그 늠름한 모습에, 줄곧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던 국왕 부부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계속해서 우아함과 격식이 깃든 인사가 이어졌다. 이어 사절단이 준비해 온 선물이 안으로 들어왔다.

보석이 박힌 각종 장신구는 물론이고, 엄청난 가격을 자랑하는 값비싼 실크, 세실리카에서만 구할 수 있는 희귀한 차에 이르기까지.

흰 장갑을 낀 시종들이 고급스러운 상자를 끝도 없이 들고 왔다. 줄곧 조용히 앉아 있던 샬로네즈 왕녀가 감탄을 흘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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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리카 제국에서 귀한 선물을 이리 많이도 준비해 주시다니. 바다와도 같이 넓은 마음에 어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소.”

아델리움의 왕, 제하일 아델리움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흐뭇하게 웃었다.

하지만 로렐라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반색하며 선물을 받는 태도와는 달리, 왕과 왕비의 눈은 그다지 웃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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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전쟁 중이던 때, 동쪽 해안에서 해적이 기승을 부렸다고 했지.’

로렐라가 아델리움에 오기 위해 배를 탄 것도 동쪽 항구였다. 해적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불 보듯 훤한 일이었다.

두 나라 사이가 멀지 않은데도 해적에게 피해를 본 건 세실리카 제국뿐이었으니, 의심이 확신이 되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물론 왕실에서 일개 도적 떼에게 일일이 관여하는 건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해도, 그저 모른다고 발뺌만 하는 것도 이상했다.

특히나 상대가 전쟁 중인 민감한 시기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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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였다면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먼저 나서서 해적들을 소탕했을 거야. 하지만 아델리움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것도 모자라 해적들과 결탁했을지도 모른단 정황까지 있어. 분명 외교적인 분쟁 소지가 있는 일이지.’

로렐라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던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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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이렇게 아름다운 색의 실크가 있다니……!”

여전히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듯, 발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샬로네즈 왕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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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리카 제국 사절단 여러분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녀는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흠잡을 데 없는 자세로 예를 표했다. 그러고는 사절단이 선 곳을 향해 사뿐사뿐 걸어왔다.

상냥한 눈빛과 우아한 몸짓, 그리고 사랑스럽게 미소 띤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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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머무시는 동안 아무 불편함 없이 편히 계시길 바라요.”

봄바람처럼 따듯한 음성이 귓가에 스치더니, 이윽고 작고 하얀 손이 내려앉았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곳에 꽂혔다.

바로, 샬로네즈 왕녀가 꼬옥 잡고 있는 로렐라의 손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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