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벨레드리안 제국의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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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벨레드리안 제국의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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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벨레드리안 제국의 황제
2022.08.06.
대륙에서 가장 크고 부강한 나라를 꼽으라면, 당연히 로렐라가 살고 있는 세실리카 제국과 넓고 비옥한 영지를 자랑하는 벨레드리안 제국이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벨레드리안 황실은 제국민들에게 언제나 빛나는 하늘이라 불렸다.
그러나 오랜 시간 황실에 새 빛이 들지 않아 황제 부부는 물론 황실의 걱정은 깊어만 갔다. 국민들 사이에서도 우려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모두가 염원하던 태양이 떴다.
적통을 이을 후계자, 위너드 루베헨 벨레드리안이 탄생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무척이나 기쁜 일이건만, 신이 그들을 좀 더 어여삐 여긴 걸까. 위너드는 어릴 적부터 다양한 방면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제왕학은 물론, 경제학이며 수학, 군사학까지도 빠르게 익혔다. 심지어는 그림과 춤, 문학 같은 예술 방면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중 가장 뛰어난 건 뭐니 뭐니 해도 검을 다루는 능력이었다.
‘전하, 정말 훌륭하십니다!’
황궁 연무장에서는 매일 즐거운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의 스승이자, 불과 스무 살의 나이에 소드마스터가 된 에르헨의 웃음소리였다.
그가 위너드를 훈련시킬 때면, 언제나 황궁 소속의 검사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대륙의 최연소 소드 마스터와 그의 뒤를 이을지 모르는 검술 천재 황태자의 수련은 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자랑스러운 황태자는 성격마저 소탈하고 시원시원했다. 고귀하게 태어나 다소 오만할 법도 한데, 그는 신분과 상관없이 모두를 평등하게 대했다.
황궁의 신하들에게도 격의 없이 대해 주어 모두가 그를 좋아하며 따랐다. 하지만 때로 아닌 일에는 어린 나이에도 위엄 넘치는 모습으로 엄벌을 내렸다.
시간이 흘러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황태자는 더더욱 빛을 발했다.
군사학과 외교술은 이미 경지에 오른 지 오래였다. 특히 지략에는 따를 자가 없었다.
마치 군주가 되려고 태어난 사람 같았다. 오랫동안 황실의 교육을 도맡아 왔던 선생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완벽한 황태자에 대한 소문은 널리 퍼졌다. 제국 귀족은 당연했고, 외국 사절단 또한 위너드를 알현하기 위해 줄을 섰다.
그가 벨레드리안 제국 역사에 길이 남을 황제가 될 거라는 걸, 다들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주인공 후보가 된 건 마물 토벌에 참여했던 때였어. 성인식을 치르기도 전이었지만,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지. 마물들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거든.”
이야기를 열심히 경청하고 있던 로렐라가 또다시 눈을 크게 떴다.
“뭐어?! 하지만…… 전장에 나가기엔 너무 어리지 않아?”
그 말에 위너드가 피식 웃으며 씁쓸하게 읊조렸다. 그리운 듯 얼굴이 다소 어두워 보였다.
“……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셨지.”
하지만 그 누구도 위너드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황제가 크게 역정을 내기도 했고, 황후가 눈물로 호소도 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때 유일하게 그의 편에 서 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검술 스승이자, 위너드가 친형처럼 따랐던 에르헨이었다.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황태자 전하의 실력은 뛰어나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고작 마물 따위에게 쉽게 당하진 않으실 겁니다. 그리고…… 만의 하나의 경우엔, 제가 목숨 걸고 반드시 황태자 전하를 지키겠습니다.’
제국 최고의 소드마스터까지 나서니, 결국 황제도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장으로 떠난 위너드는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하루가 멀다고 한 끗 차이로 생과 사를 넘나들며, 그동안 황궁이 얼마나 안온한 온실이 되어 주었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예상하지 못한 강한 마물의 등장에 위너드의 부대가 괴멸 위기에 처했다.
살아남은 것은 스무 명의 병사 중 고작 다섯과 그의 스승인 에르헨뿐이었다. 그들은 최우선으로 황태자를 살리고자 했지만, 그는 도리어 병사들의 앞을 막아섰다.
죽을힘을 다해 대항하던 순간,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위너드의 손에서 난생처음 보는 붉은 빛이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키이이이익!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마물이 그의 목을 잡아 뜯으려 달려들었다. 위너드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검에 덧씌워, 최후의 일격을 휘둘렀다.
그리고 거대한 마물의 몸이 땅을 울리며 넘어진 그때.
「‘지나가던 엑스트라’ 님이 위너드 님의 첫 주식을 삽니다.」
「미친. 개대박 떡상 각.」
“그땐 정말이지……. 내가 전장 생활에 지쳐 머리가 돌아 버린 건가 했어.”
“그치, 맞아!”
위너드의 말에 로렐라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지만 내심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위너드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니.
“갑자기 발현된 힘이 당황스럽긴 했지만, 스승님, 아니 에르헨이 도와준 덕분에 차근차근 체득해 나갈 수 있었지. 물론 그가 지닌 힘과는 결이 달랐지만, 그도 어쨌든 소드 마스터니까. 덕분에 나는 점점 강해졌고,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어.”
전세는 점차 역전되었다. 흉포한 마물들은 모두 버티지 못하고 그의 발아래 하나하나 쓰러졌다.
“마물을 쓰러뜨리고 나면 어김없이 미친 듯이 주식이 팔렸고, 얼마나 많은 주식을 팔았는지 셀 수조차 없었어.”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가득했지만, 로렐라는 굳이 그걸 꺼내지 않았다. 이야기의 흐름을 끊기 싫었으니까.
결국 위너드는 영웅이 되어 귀환했다.
무사히 돌아온 아들을 껴안고, 황제 부부는 펑펑 눈물을 흘렸다.
‘위너드 황태자님이시다!’
‘황태자님 만세!’
그 이후, 그가 나타나는 곳이라면 어디든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제국의 자랑인 황태자를 모든 국민이 사랑하고 응원했다.
‘짐은 이제 그만 물러나야 할 때가 온 것 같구나.’
농담 섞인 말을 하며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에서는 이미 더할 나위 없는 애정과 신뢰가 넘쳐흘렀다.
“그 후로도 몇 차례 토벌에 나섰고, 연승을 거뒀지. 머지않아 주인공이 될 거라 믿었어. 그런데…….”
위너드는 잠시 작게 심호흡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림자 군단을 이끄는 목 없는 기사를 처치한 뒤의 일이었지. 내 곁을 빈틈없이 엄호하던 에르헨이, 갑자기 창백한 얼굴로 덜덜 떨며 그러더군.”
“…….”
‘전하, 미친 소리라고 여기시겠지만 제 눈앞에 자꾸 이상한 창이 뜹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로렐라의 얼굴이 새하얗게 굳었다.
“고민하다 결국 나도 같은 비밀을 지니고 있다고 털어놓았지. 그도 내게 그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쉽지 않았을 테니까.”
위너드는 변함없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었어. 몇 번이고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이자, 스승이었고, 친형이나 다름없었거든. 내겐 형제가 없었으니까…….”
그러고는 잠시 고개를 들어 달이 뜬 밤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런 사람과 함께 후보로 오른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그, 그건…….”
“그가 내게 검을 가르쳐 주었던 것처럼, 이젠 내가 그를 위해 알고 있던 것들을 모조리 알려 줄 차례였어. 내가 먼저 주식을 팔았던 만큼 당연히 경험도 내가 더 풍부했으니까. 끝나기도 전에 소멸하지 않도록 내 주식을 양도해 준 적도 있지.”
줄곧 담백했던 목소리에 처음으로 서늘한 기운이 스몄다.
“……비록 배신당했지만.”
사건은 드래곤 토벌 때 벌어졌다.
아주 오랜 기간 벨레드리안 제국을 위협했던 마물. 제국민은 드디어 그 고통에서 벗어날 거라 기뻐했지만, 실제로 싸움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병사가 죽어 나갔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위너드도, 소드 마스터 에르헨도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다.
싸움은 밤낮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결국, 생사를 오고 가는 격전 끝에 거센 불길을 내뿜던 드래곤의 숨이 멈췄다.
커다란 성을 몇 채나 붙여야 겨우 비슷해질 듯한 커다란 몸이 바닥으로 고꾸라졌을 때는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커다란 희열을 느꼈다.
‘드디어…… 성공했어……!’
위너드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다 서지도 못한 채 크게 휘청이고 말았다. 성한 곳 하나 없는 사지는 비명을 지르는 듯했고,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이 그의 등줄기를 타고 퍼져 내렸다.
그래도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죽지 않고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것.
귓가에 울리는 요란한 종소리가 그 사실을 더욱 여실히 깨닫게 해 주었다.
그는 드래곤의 사체에 몸을 기댄 채, 피로 젖은 얼굴을 훔쳤다.
그제야 비로소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그가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에르헨이었다.
제발, 제발 죽지 않고 살아 있기만을 애타게 바라면서.
산처럼 쌓인 수많은 시체를 뒤지면서도 위너드에겐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정말로 중요한 건, 이 세계의 주인공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한 건 언제나 그를 지탱해 주었던,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언덕에 홀로 고고히 서 있는 고목 같은 삶은 필요 없었다.
그러니…….
‘……절대로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어!’
위너드는 핏발 선 눈으로 시체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주인공이 된다면 가장 먼저 무슨 일을 해야 할지도 명확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에르헨의 소멸을 막을 것이다. 만약 이미 전사했다면, 반드시 되살리겠다. 주인공은 뭐든 할 수 있는 존재라고 했으니까.
설령 이룰 수 있는 소원이 그것뿐이라 해도, 망설임 없이 그것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푸욱!
어느 순간, 가슴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불에 뜨겁게 달군 무언가가 자신을 꿰뚫은 듯한 격통이었다.
위너드는 떨리는 손끝을 들어 천천히 자신의 가슴에 꽂힌 물체를 매만졌다.
그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검이었다.
동시에 뒤에서 흐느끼는 듯한 에르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 나, 나는……. 죄송……합니다. 전하.’
……살아 있었구나. 다행이다.
우습게도 그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제일 처음 느꼈던 건, 다름 아닌 안도감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전하께서는 분명…… 주인공이 되시겠지요. 그리고 나는…… 소멸해 버릴 테고.’
그런데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당신이 후보 중에서도 압도적인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내게 없는 능력까지 지녔으니까. 그래, 당신은 처음부터 나와는 다른 존재였다. 난 부모도 없이 자라나 천신만고 끝에 겨우 소드 마스터가 되었지만, 너는…… 제국의 황태자로 태어난 것도 모자라 검술 천재라는 칭송마저 독식했어……!’
흐느끼던 소리는 어느새 악귀처럼 변해 있었다.
‘같은 주인공 후보? 그것도 웃기는 얘기지. 출발선이 같지 않은데 어떻게 우리를 같다고 할 수 있지? 이 모든 게…… 너무 비참하지 않으냐? 너는 어째서 나를 끝까지 비교당하게 만드느냔 말이야!’
위너드는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푸우욱!
검이 더 깊이, 그의 몸으로 들어왔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왈칵 피가 터져 나왔다.
‘너만 없으면, 너만 사라지면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이 정도 주식이라면 나 역시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그러니 절대…… 이대로는 소멸될 수 없다.’
이내 비릿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아니, 너를 돋보이게 하는 도구로 쓰이는 건 더 이상 사양이다.’
쑤욱!
검이 뽑히자마자 구멍이 뻥 뚫려 버린 가슴으로 뜨거운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 뿜어져 나왔다.
결국, 힘을 잃은 두 다리가 땅 위로 무너졌다.
누구보다 살리고 싶은 사람에게 목숨을 빼앗기다니. 이런 최후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띵동!
「아.. 엔딩 개연성 뭐임? 맥락은 개한테 줘서 개연성임?」
「내 쿠키 돌려줘, 망할 새끼들아ㅡㅡ」
「용두사망잼ㅋㅋ」
「XX. 장난 까냐? 장난 까냐? 장난 까냐? 장난 까냐? 장난 까냐?」
점점 어둡게 흐려지는 시야에 번쩍거리는 불빛이 보였다. 시스템 창에서는 그야말로 난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마지막이다.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
손쓸 틈도 없이 전부 끝나 버렸다.
「시스템은 무슨, X 까라 그래! XX, 그 새끼들이 이 더러운 기분을 대신 떠안아 주는 것도 아니잖아!」
적나라한 욕설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최후는 그야말로 한편의 우스운 희극 같았다. 멋진 죽음이라는 건 역시, 주인공한테나 허락된 일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으려던 때였다.
쿠르릉.
차디찬 땅바닥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눈이 시릴 정도로 강렬한 빛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띵동!
「시스템 해킹이 완료되었습니다.」
이상했다.
죽으면 소리를 들을 일도, 그리고 빛을 느낄 일도 없을 텐데.
띵동!
「이건 명백한 규칙 위반이다. 하지만 나는 너를 포기할 수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저 메시지는 뭘 뜻하는 건지 조금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곧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실낱같은 숨을 가만히 몰아쉬기만 했다.
「안내자로서 다시 한번 삶의 기회를 가져 보겠느냐?」
짧은 문장에 핏발선 두 눈이 번쩍 뜨이기 전까진.
* * *
비록 두 번째 삶을 손에 쥘 수 있게 되었다 해도, 위너드는 원칙적으로 소멸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 눈엔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일부러 모습을 드러낸다 해도 그 누구도 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말이라면 죽음도 불사하던 용맹한 병사들부터 함께 제국의 앞날을 논하던 수많은 신하들, 마음이 잘 맞아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던 귀족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위너드의 얼굴은커녕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원래부터 세상에 없던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벨레드리안 제국의 황태자가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그 사실을 아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그를 사랑해 주었던 부모님은, 갑자기 뒤바뀐 아들에게 제위를 내어 주고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즉위식이 있던 날,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도 그를 열렬히 환호하며 맞이했다.
한때는 그의 좋은 스승이자, 친구였던 에르헨은 그렇게 벨레드리안 제국의 현 황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