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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유일한 변수 (114/173)


114화. 유일한 변수
2022.08.03.


넋이 반쯤 나간 채로 서 있는 로렐라의 손을 잡은 위너드가 조용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두 사람을 둘러싼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새하얀 대리석 손잡이가 달린 고풍스러운 문과 은은한 빛을 내는 램프, 정원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알록달록한 크로톤 화분까지.

메이레드 저택의 현관 앞이었다.

로렐라가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바람을 좀 쐬게 해 줄 생각으로 일단 여기로 데려다준 건데…….


“로렐라.”

“…….”

“다 왔는데.”

역시나 그녀는 대답하긴커녕 우두커니 서 있었다.


“……후보라니.”

이윽고 그녀의 입술 사이로 작게 신음하는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랑 똑같은…… 주인공 후보였다니…….”

허공을 응시하던 눈동자가 또다시 파르르 떨렸다. 위너드가 난감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그의 예상보다 훨씬 더 놀란 듯했다.

위너드는 다시금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정원으로 이끌었다.

자정이 넘은 늦은 시간이었지만, 로렐라의 정원은 불을 환히 밝혀 두었기에 산책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그녀가 생각을 정리할 때 즐겨 찾는 흰색 벤치 근처나, 장식용으로 놔둔 커다란 나무 둥치, 그리고 곳곳에 놓인 정원석 위에도 어김없이 두꺼운 초를 넣은 유리 램프가 놓여 있었다.

이는 모두 로렐라의 지시였다.

아무도 없는 밤의 정원에 굳이 불을 밝히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는 고용인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로렐라가 살다 온 세상은 밤에도 절대로 불빛이 사라지지 않는 희한한 곳이라고 했다.

그래서 밤이 되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어둠이 찾아오는 게 영 적응이 안 된다고.

이는 오로지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겠지.

그 사실을 떠올린 위너드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반면에 로렐라는 여전히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서로 손을 맞잡은 채 정원을 거닐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스치는 옷자락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밤공기는 차갑게 내려앉아 코끝까지 시리게 만들었다.

지금쯤이면 마음을 조금 가라앉혔겠지, 싶어서 위너드가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로렐라.”

“그럼 왜 안내자가 된 건데?!”

갑자기 그녀의 입에서 높다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어, 어?”

위너드는 순간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아직 진정되지 않았나 봐.


“그것도 한 번에 천만 주씩이나 팔아 치우던 후보였는데……!”

로렐라는 두 눈을 부릅뜬 채 그에게로 홱 고개를 돌렸다.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마 주인공 후보라면 모두가 똑같은 반응을 보이겠지.


“그건…….”

말문을 열긴 했지만 위너드는 쉽사리 계속 이야기를 이어 갈 수 없었다.

너무 방대한 이야기라,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탓이었다.


“후우…….”

그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로렐라는 나름대로 진정하려는 듯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위너드 대신, 또다시 먼저 입술을 열었다.


“그 능력은 원래부터 있었던 거야?”

바뀐 질문에 위너드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방금 질문에 내가 곤란해한다고 여기는 걸까.

하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두 눈을 보니, 안내자가 된 사연 외에도 궁금한 게 한두 개가 아닌 듯싶었다.


“능력?”

“그거 말이야, 손에서 갑자기 붉은 빛이 막……!”

“아아, 그거.”

위너드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설명해 주다 보면, 안내자가 된 이야기까지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겠지.


“선천적인 능력이었나 봐. 실제로 발현된 건 한참 자란 뒤의 일이지만.”

“그 순간 주인공이 된 거고?”

“응.”

“혹시…… 지금도 능력을 지니고 있어?”

이건 굳이 말로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위너드는 로렐라의 눈앞에 가만히 손을 들었다. 정신을 집중하자 그의 손끝을 따라 삽시간에 붉은 기운이 모여들었다.


“와아!”

그녀가 또다시 감탄을 터뜨렸다.


“난 그렇게 큰 마물은 처음 봤어. 그리고 그런 괴물을 검 한 자루로 쓰러뜨리는 것도……!”

아까 느꼈던 감흥이 떠올랐는지 그녀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연신 재잘거렸다.

사실 대단하다는 칭찬을 기쁘게 여길 단계는 이미 아주 오래전에 지났다. 그런데도, 로렐라에게서 들으니 쑥스럽게 느껴졌다.

게다가 그녀의 그런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뭐. 검술은 어릴 때부터 배웠으니까.”

위너드는 별거 아니라는 듯 태연자약한 태도로 말했다.

물론, 아까보다 더욱 강렬해진 붉은 오라를 계속 손에 띄운 채.


“그래서 고원에서도 그렇게 검을 잘 다룬 거였구나…….”

역시나 로렐라는 그의 계획대로 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놀라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땐 사실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애쓰느라 정신없었어.”

“실수?”

“아무리 순간이라도 여러 사람 앞에서 오라를 발현하면 큰일 날 테니까. 나름대로 힘 조절을 한 거야.”

“아…….”

허세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이었다.

온 대륙을 통틀어도 이런 능력을 지닌 사람은 없으니까.

그나마 비슷한 경우를 꼽으라면 검에 신성력을 씌울 수 있는 레어넌 단장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결이 좀 다른 힘이었다.


“레어넌 단장과 펠리어트 공작, 거기다 수많은 용병까지. 다들 이골이 날 정도로 전투에 익숙한 데다 전장에 나간 것도 한두 번이 아니잖아. 그런데 그런 사람들 앞에서 잘못 능력을 보였다간 어떻게 되겠어?”

발칵 뒤집힐 게 뻔했다.

단순한 호위 기사라고 둘러대 봤자, 믿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거는?”

로렐라는 아직도 궁금한 게 많은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래. 또 뭐가 궁금해?”

위너드에게는 이제, 팔짱을 낀 채 그녀의 질문에 느긋하게 대답할 여유도 생겨났다.

하지만…….


“똑똑히 들었어. 병사들이 너한테 분명…….”

로렐라는 잠시 입술을 한 번 꾹 깨물었다 놓았다. 그러고는 누가 들을까 봐 걱정하듯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작게 말했다.


“화, 황태자라고…….”

“아, 그거.”

……드디어 이 질문이 나오고야 말았군.

위너드는 멈춰 서서 얼굴을 훔쳤다. 곧장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그녀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 자신의 모든 걸 보여 줬으니, 이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그것만 숨기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하나.

그녀에게 직접 말하는 게 어쩐지 쑥스럽고, 심장을 간질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솔직하게 이야기해야겠지.

결코 없는 이야기도, 거짓도 아니니까.


“그래, 맞아.”

위너드는 로렐라를 마주 보고 선 채로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진지하게 말을 이으려던 그때, 로렐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를 만난 이래로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놀란 얼굴이.

……처음 주식 창이 떴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정말이야……?”

“…….”

휘이잉.

어쩐지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시린 바람이 불어왔다.

안내자라는 존재에게 신분 따위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위너드는 자신이 황족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평정을 잃을 만한 상황이 닥쳐도, 그는 로렐라 앞에서 언제나 교양 있는 태도와 품위 있는 행동을 고수했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했다.

외양도 마찬가지였다. 의상은 물론이고 커프스와 브로치, 장갑에 이르기까지 장신구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썼다.

명망 높은 황실의 적통 황태자라는 자부심과 자존심은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있었으니까. 황가의 일원이라면 당연히, 몸가짐을 단정하고 아름답게 가꿔야 하는 법 아닌가.

물론…… 지금은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사심이 더욱 앞서 있긴 하지만.

그때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어왔다.


“평소 옷차림이 범상치 않다고 생각하긴 했어. 아니, 가끔 지나치게 화려할 정도였지.”

“…….”

“안 그래도 자기 할 말만 하고 싹 사라지는 얄미운 태도가 가끔 사람을 열 받게 해서 말이야. 마치 세상에서 본인이 제일 잘났다는 듯한 오만함이…….”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 마구 손을 내저었다.


“……아주 나쁘다는 건 아니고!”

위너드는 또다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기를 수차례.

그는 입가에 가만히 손을 얹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그녀가 생각하는 나는 뭘까.

내 이미지는 과연 어디까지 떨어져 있는 걸까.

자업자득이라지만, 이건 너무 가혹한 거 아니냐고!

하지만 위너드는 곧, 두 눈을 꾹 감았다 뜨는 것으로 몰려오는 절망과 실의를 떨쳐 냈다.

그래. 떨어졌다는 건, 달리 말하면 올라갈 것밖에 안 남았다는 소리지.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회복하고 말 테다, 젠장!

마음을 다잡은 위너드는 손을 뻗어 그녀의 두 손을 꼭 잡고는 천천히 소리 내어 말했다.

자신의 모든 것이었지만, 두 번 다시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 할 일은 없을 거라 믿었던 그 이름을.


“나는 위너드 루베헨 벨레드리안. 벨레드리안 제국의 유일한 적통 후계자이자…….”

붉은색 눈동자가 그의 모습을 온전히 담았다.

그래서 더욱 아름답게 빛나 보였다.


 


“주인공이 되는 데 실패해 소멸했던 후보였지.”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안개처럼 낮게 내려앉았다.

그래, 이전 삶에서 그는 실패한 후보에 지나지 않았다.

제아무리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승승장구했더라도, 배신으로 인해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하더라도.

결국, 실패했다는 결과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운 좋게 안내자로 다시 살아났고, 덕분에 내 진짜 모습을 탈환할 마지막 기회를 얻었지.”

하지만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원래의 자리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어그러진 인생을 돌려놓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자신뿐이므로.

그걸 위해서라면 뭐가 되든 좋았다.

그래 봤자 실패한 후보일 뿐이라는 초라한 수식어도 상관없고, 주식을 사 주는 존재의 편애 덕에 겨우 되살아난 운 좋은 놈이라고 손가락질당해도 괜찮았다.


“후보가 주인공이 되면, 그 대가로 안내자도 보상을 하나 받게 돼.”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수많은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더욱 위너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줄곧 염원하던 소망을 드러냈다.


“나는 잘못된 걸 반드시 바로잡겠다고 각오했어.”

이를 악물고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했다.

그에겐 자신의 후보가 주인공이 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어떻게든 누구보다 많은 주식을 팔게 하는 것만이 그의 목표이자, 목적이었다.

그래, 분명 시작은 그랬다.

한데 그의 다짐을 흔드는 유일한 변수가 바로 자신이 사활을 건 주인공 후보, 로렐라 메이레드였다.

정확히는 그녀를 사랑하게 된 자신의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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