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나 때는 말이야
(113/173)
113화. 나 때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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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나 때는 말이야
2022.07.30.
이제 갓 스무 살 정도 되었을까. 아니, 어쩌면 그보다 조금 더 어릴지도 모르겠다.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조각 같은 얼굴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시선을 끄는 건 잘생긴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그에게서는 위풍당당한 기개가 흘러넘쳤다. 반짝이는 눈에는 총명함이 가득했고, 투구를 부하에게 건네주는 작은 동작에서조차 범상치 않은 품위가 흘렀다.
……과거의 그가, 이렇게나 많은 병사를 지휘하는 사람이었다고?
한참이나 혼란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고 있다가, 겨우 진정하고 손을 내렸다.
그때, 어린(?) 위너드가 곁에 있던 병사에게 무어라 지시를 내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절도 있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 안장 쪽으로 다가가 커다란 자루를 들고 왔다.
자루 안에서 꺼낸 건 소나 양의 것으로 보이는, 붉은 살점이 너덜너덜하게 붙은 뼈들이었다. 팔뚝만 한 것부터 주먹 정도 되는 것까지,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병사들은 그걸 사방에 던져 대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다 더듬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너는 지금 여기 있지만…….”
“응.”
“저, 저기 있는 사람도 정말 너인 거지……?”
“말했잖아. 과거를 보여 주는 환상이라고.”
위너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곤,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조심해. 이제 곧 시작이니까.”
“시작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
쿠웅!
말을 끝까지 잇기도 전에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가 들리더니 발밑이 마구 흔들렸다.
“뭐, 뭐야! 지진이야!?”
거센 진동에 발밑의 돌들이 낭떠러지 아래로 투두둑 굴러떨어졌다. 나는 겁에 질려 옆에 있는 위너드를 꽉 붙잡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진동은 잦아들긴커녕, 똑바로 서 있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심해져만 갔다.
“으……!”
무슨 일인지 가늠조차 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기만 하던 때였다.
스스슷!
어디선가 섬뜩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윽고 병사들이 있는 땅이 갈라질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타났다!”
“모두 대열로……!”
병사들은 격양된 목소리로 소리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대형이 갖춰졌다.
쾅! 쾅!
굉음과 함께 땅속에 박혀 있던 커다란 바위들이 포탄처럼 위로 솟구쳤다. 매캐한 흙먼지가 사방을 뒤덮었다.
심지어는 커다란 바윗덩이가 내 눈앞까지 튀어 올랐다가 다시 아래를 향해 곤두박질쳤다.
“안 돼!”
밑에 사람들이 있는데……!
순간 끔찍한 참상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래에 있던 병사들은 이미 흩어진 뒤였다.
“집중해서 조준해라!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바로 내 옆에 서 있던, 일반 병사보다는 지위가 높아 보이는 남자가 명령했다. 그러자 낭떠러지 위의 병사들이 일제히 커다란 석궁을 빼 들었다.
다들 긴장감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두려움이나 공포에 떠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윽고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진 땅 한가운데서 검은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끼에에에엑!
흉포한 울음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검은 형체가 움직일 때마다 크고 둥근 표면을 따라 자갈과 흙들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지네처럼 생긴 마물이었다.
집채만 한 거대한 몸통이 땅속에서 끝도 없이 기어 나왔다. 양옆으로 달린 수십 개. 아니, 수백 개는 되어 보이는 징그러운 다리는 웬만한 통나무보다 굵었다.
“흐으……!”
마물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거리가 제법 되는데도 나는 두려움에 차 작은 신음을 흘리는 게 고작이었다. 아득한 공포가 몰려와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때.
파아아앗!
눈부신 섬광이 대지를 뒤덮었다. 동시에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거센 돌풍이 아래쪽에서 솟구쳐 올랐다.
그 바람을 타고 한 줄기 붉은빛이 번뜩였다. 이윽고 바람이 잦아들자 마물의 위에 올라탄 남자가 보였다.
“어?”
방금 혹시 날아오른 건가?!
눈까지 비비며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그가 뽑아 든 은빛의 기다란 장검 위로 마치 불길처럼 새빨간 오라가 일렁였다.
그는 갈색 머리를 휘날리며 갑옷처럼 단단한 마물의 표피에 오라를 박아 넣었다. 그러고는 빠르게 마물의 등 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끄그그극!”
적이 붙은 걸 눈치챈 마물이 몸을 마구 비틀어 대며 사납게 울었다. 철판을 손톱으로 긁는 것처럼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하지만 위너드는 그런 것 따윈 들리지 않는다는 듯 요동치는 몸 위를 여유롭게 달렸다.
허공을 가르듯 유려한 선을 그린 검이, 이윽고 마물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끼에에에엑!
망설임조차 없던 일격에 마물이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커다란 몸통이 쥐어짜듯 비틀렸다.
“지금이다!”
“돌격!”
“와아아!”
아래에 있던 병사들이 함성과 함께 일제히 달려들었다.
“황태자 전하를 엄호하라!”
낭떠러지 위에서도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궁을 든 병사들이 마물의 몸에 일제히 화살을 쏘아 댔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버티지 못한 마물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러나 위너드는 여전히 검을 꽂아 넣은 채 그 위에서 차분하게 버텨 냈다. 검에서부터 퍼지는 눈 부신 빛의 물살이 급류처럼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나는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이 모든 광경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키에에에엑!
마물의 거센 몸부림에 지면 여기저기에도 커다란 구덩이가 파였다. 어떻게든 떨쳐 내고 싶은지 마물은 어느 때보다 강한 움직임으로 마지막 발버둥을 쳤다.
“아앗!”
나는 행여나 그가 떨어질까 봐,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위험해……!”
하지만 위너드는……. 그러니까, 마물과 싸우고 있는 위너드는 검을 뽑아내더니 가벼운 몸놀림으로 땅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바닥을 내려찍는 마물의 공격을 날쌘 몸짓으로 피하며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유려한 손짓으로 검을 휘두를 때마다, 마물의 몸에서 검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와!”
손에서 땀을 쥐게 만드는 긴장감에,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그를 응원했다.
“대단하다……! 조금만 더 힘내!”
그러자 내내 말없이 곁을 지키던 위너드가 흠, 흠 하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딱, 손가락을 튕겼다.
“어라?”
순식간에 바뀐 주위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분명 낭떠러지 끝에 있었는데, 어느새 아래로 내려와 커다랗고 너른 바위 위에 서 있었다.
아까보다 훨씬 낮은 위치였지만, 대신 마물과의 전투가 아주 가까이에서 보이는 곳이었다.
바로 눈앞에서 검이 날아들었다.
마물의 공격을 피해 바삐 움직이는 위너드의 눈동자까지 또렷하게 보일 정도였다.
마치 끝내주는 액션 영화를 특등석에서 관람하는 기분이다.
나는 또다시 집중해서 빠져들었다.
“앗, 이제 끝인가 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는지 마물의 몸이 힘없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놈이 하늘로 목을 치켜든 순간.
위너드는 검을 곧추세우고 소리쳤다.
“다들 비켜라!”
그 소리에 바로 근처에서 공격하던 병사들이 재빠르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윽고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 그의 검 끝에 모였다.
순간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의 동작에 집중한 그때.
휘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사선으로 내리그은 검날을 따라 붉은 기운이 흩날렸다.
깔끔하게 베어진 마물의 목이 옆으로 미끄러졌다.
냉철한 심판자처럼 차갑고도 준엄한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 모습을 좇았다.
머리가 땅으로 떨어지고, 잘린 단면에서는 검은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병사들은 재빨리 방패를 들어 머리 위를 막았다.
비처럼 쏟아지는 핏방울 사이로, 거대한 몸체 역시 땅으로 고꾸라졌다.
“끝났다!”
“드디어 해치웠다!”
병사들은 주먹을 휘두르며 환호성을 질렀다.
낭떠러지 위에서 석궁을 쏘며 보좌하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와아, 멋지다!”
절로 박수가 터지는 광경이었다.
“흠흠.”
또다시 나지막한 헛기침 소리가 들려 슬쩍 옆을 돌아보니, 위너드가 뿌듯하다는 듯 묘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
그 만족스러운 미소는 뭔데.
황당한 마음에 무어라 대꾸하려던 찰나, 병사들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황태자 전하 만세!”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이던,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호칭이 또다시 들려왔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나는 궁금한 걸 물어볼 수 없었다.
“어……?”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는 위너드의 앞에 뜬 시스템 창 때문이었다.
그는 여유롭게 팔짱을 낀 채 자신이 쓰러뜨린 마물의 사체에 기대어 눈부신 화면을 들여다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비록 멀리 있어 무슨 내용인지는 안 보였지만, 무언가 숫자 같은 것이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번쩍번쩍 빛나는 테두리까지.
“저, 저거 설마…….”
잘못 보려야 잘못 볼 수가 없었다.
경악한 나머지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그저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쪽을 가리키고만 있던 때였다.
띵동!
귀에 익숙한 소리와 함께, 내 눈앞에도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그런데…….
「‘30분 뒤에 출근 실화냐’ 님께서 위너드 님의 주식을 200만 주 구매하셨습니다! 신기록입니다!」
「크으, 오늘도 어김없이 모가지를 잘라 버리는 시원한 퍼포먼스!」
“어라?”
……내 것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엑스트라’ 님께서 위너드 님의 주식을 300만 주 구매하셨습니다! 또다시 신기록입니다!」
「능력치도 사기급으로 쩌는 거 맞는데, 젤 개사기 같은 게 뭔지 알려 줌? 바로 저 존잘남이 모솔이라는 거다.ㅋㅋㅋㅋㅋㅋ 히로인은커녕 저 얼굴에 애인 한 명 없다니. 이거야말로 판타지의 완성 아니냐?ㅋㅋㅋㅋㅋㅋ」
「‘연애하는 새끼들 다 대가리나 깨져라’ 님께서 위너드 님의 주식을 500만 주 구매하셨습니다! 계속해서 신기록을 경신합니다!」
「지랄 노. 주인공이 연애하면 노잼 루트 탐, 수고링.」
“어, 어?”
주식이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두 눈을 비비고, 또 비벼 보았지만 화면 속 이름은 분명 위너드였다.
“줄곧 애를 먹이던 마물이었거든. 그래서 다들 저렇게 열광하는 거야.”
내 옆에 선 위너드가 겸연쩍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이미 마물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니, 뭐 이런…….”
어마어마한 숫자가 다 있지?
무려 천만 주다.
한 번에 천만 주라니!
나는 입이 떡 벌어진 채로 그저 화면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게다가 뭐?
‘저 새끼 남주 아니죠’가 아닌, ‘30분 뒤에 출근 실화냐’?
‘이 구역 주접킹’ 대신 ‘연애하는 새끼들 다 대가리나 깨져라’라고?
누, 누구세요들?!
“예전엔 나도 주인공 후보였거든. 뭐, 장르는 다르긴 하지만 말이야.”
위너드가 차분하게 덧붙였다. 무언가로 머리를 맞은 듯 눈앞이 아찔했다.
“후, 후보였다고? 네가?!”
놀란 나머지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후우.”
그러자 위너드가 옅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두어 차례 끄덕였다.
“그래. 나는 한 번에 천만 주는 우습게 팔아 치웠었지.”
그러고는 아련한 눈빛을 화면에 고정한 채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나 때는 말이야…….”
“…….”
꼭 누구더러 들으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