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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순수한 고백 (111/173)


111화. 순수한 고백
2022.07.23.


장작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쉼 없이 타올랐다.

조합장의 집은 공작저에 비하면 작고 아담하기 그지없었으나, 그래도 벽난로만큼은 그 못지않게 훈훈했다.

그 앞에 우두커니 앉은 펠리어트의 얼굴이 살짝 빨갛게 익어 있었다. 물론 뜨거운 불길 때문만은 아니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조합장이 직접 찻잔을 들고 나타났다. 그때까지도 두 사람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크흠…….”

그는 헛기침을 하고는 로렐라와 펠리어트 앞에 차를 한 잔씩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러면 두 분…….”

“…….”

“말씀 편하게 나누시길 바랍니다.”

그러고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넨 뒤 그대로 사라졌다.

응접실에 적막이 감돌았다.

펠리어트는 다 젖어 버린 검은 장갑을 벗어 테이블 위에 툭 올려놓았다. 그리고 양손으로 얼굴을 거세게 문질렀다.

손바닥에 가려져 얼핏 보이는 그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붉게 변해 있었다.

어쩐지 펠리어트의 머리 위에 글자가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죽고 싶다. ……죽을까?

로렐라는 안쓰러운 눈으로 그런 펠리어트를 바라보았다.

그가 누구인가.

마치 절벽 위에 서서 아래를 굽어보는 한 마리 검은 늑대처럼 고고한 태도를 잃은 적 없는 전형적인 북부 공작 아니던가.

설령 세상이 망한다 해도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이 눈썹만 한 번 치켜뜨고 말 것 같은 남자인데.

한겨울 연못에 빠진 사냥개처럼 다 얼어붙은 몰골로 쳐들어와선 자신의 기사와 영지민들 앞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다니…….

로렐라는 황급히 생각을 멈추곤 방금 펠리어트가 그랬던 것처럼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왜 내가 다 부끄럽지?

그러나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마치 영혼이라도 빠져나간 사람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그를 가만히 불렀다.


“펠리어트.”

“…….”

“그, 어째서 이런 일을 벌였……. 아니,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그를 배려하여 단어 하나하나를 조심스레 고르던 때였다.


“……베티가 그러더군.”

“응?”

펠리어트가 여전히 눈도 맞추지 못하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당신이 집을 팔고, 아델리움으로 이민을 간다고…….”

“뭐라고? 왜 그렇게 생각…….”

깜짝 놀란 것도 잠시.


“아.”

로렐라가 작게 탄식했다. 베티가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아델리움으로 떠날 준비를 해야 하고’, ‘저택도 내놨다’라는 말을 그녀 멋대로 오해한 게 틀림없다.

아니, 물론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서 조금 헷갈릴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설마 그 얘기 때문에…… 이렇게 정신없이 뛰어온 거야?


“사절단에 선발됐단 이야긴 들었어. 축하해.”

마음을 다잡은 듯 어느새 고고한 모습으로 돌아온 펠리어트가 정중하게 말했다.


“……꼴사나운 짓을 저질러서 미안하군.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거야.”

물론 로렐라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럴 때는 빠른 화제 전환만이 유일한 살길이라는걸. 하지만…….

여전히 어두운 그의 눈빛이 몹시 마음이 걸렸다.

또다시 무거운 적막이 두 사람을 감쌌다.

수많은 생각이 펠리어트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다. 뒤섞이고 헝클어져 마구잡이로 날뛰는 감정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던 그는 참지 못하고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뒤로 돌아 밖으로 나가려는데…….


“그게 왜 꼴사나워?”

어느새 자신을 따라 몸을 일으킨 로렐라가 손을 뻗어 망토 자락을 쥐었다.


“나는 당신이 꼴사납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는 마.”

펠리어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로렐라가 이때다 싶었는지 종알종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어쩐지 살이 많이 빠졌다 싶었는데, 그동안 밥도 안 먹었다며? 그러다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어떻게든 분위기를 환기해 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내내 창백한 그의 안색이 너무 마음에 걸려 조금이라도 마음을 가볍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 덕분인지, 펠리어트가 힘겹게나마 입을 열었다.


“이런 모습이 꼴사납지 않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에 가까웠지만, 로렐라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황당하긴 했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사실 난 더한 것도 많이 했거든…….

지금까지 저질렀던 숱한 흑역사가 머릿속에 잔뜩 떠오른 탓에 그녀의 얼굴도 조금 붉어졌다.


“살면서 이불 한번 안 차 본 사람이 어디 있어? 너무 완벽하면 오히려 인간미 없잖아.”

일부러 더 밝은 목소리로 농담 섞어 말하는 로렐라의 얼굴을, 펠리어트는 그저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다.

그녀의 날카로운 말이 자신을 찌른 이후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그 어떤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로렐라가 한 말은 전부 맞는 말이었다. 그때의 자신은…… 해선 안 될 짓을 했다. 용서를 구한다고 해도 그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의 손으로 저지른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녀를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만나고 싶다고 염원하는 것조차 사치 같았다.

하지만, 로렐라를 생각하는 것만큼은 멈출 수 없었다.

내내 괴로워하던 펠리어트는 결심했다.

과거를 돌이킬 수 없으니, 앞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모두 그녀를 위해 써야겠다고.

잠깐 눈을 붙이는 시간을 제외하면 그는 오로지 그 생각에만 몰두했다.

이제 와 그녀를 위해 뭐든지 해 준다고 해서 둘 사이가 변할 거란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다. 이미 저지른 잘못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다만 언젠가 그녀와 다시 한번 진솔한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다시 나눌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족했다.

그래, 분명 그랬는데…….

일이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하녀의 이야기를 듣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눈보라 속에서 미친 듯이 말을 몰고 있었다.

사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했다면 금세 눈치챘을 일이었다.

그녀가 사절단이 되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 아델리움으로 간다는 이야기가 뭘 뜻하는지 쉽게 유추했을 테니까. 오히려 그가 먼저 하녀의 오해를 풀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하녀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머릿속이 새하얘지더니,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이 그를 지배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로렐라를 붙잡아야만 한다.

설령 두 번 다시 그녀가 자신의 손을 잡아 주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았다. 가끔은 우연에 기대서라도 만날 수 있고,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곳에 있어 주었으면 했다.

설마 그 마음이 앞선 탓에, 이런 볼썽사나운 꼴을 그녀에게 보일 줄은 몰랐다.


“하…….”

펠리어트는 일그러진 얼굴을 한 손으로 감쌌다.

보이지 않는데도, 그녀가 걱정을 담은 눈길로 자신을 살피는 게 느껴졌다.

잊기 힘든 기억을 만든 이에게도 로렐라는 여전히 다정했다. 오히려 그래서 스스로가 더 원망스러웠다.


“로렐라.”

“응?”

“미처 몰라서 미안해.”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몰랐던 사람이라서.”

후회는 끊임없이 몰려왔다. 이건 그만큼 잘못한 점이 많다는 뜻이겠지. 펠리어트는 밀려오는 죄책감을 밀어내는 대신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자 자신의 팔을 가만히 끌어내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고 비로소 시선을 천천히 마주한 순간.

자신을 포함해 모두가 손가락질해도, 유일하게 꼴사납지 않다고 말해 주는 사람의 아름다운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이토록 형편없지만…….”

그러자 얼어붙어 있던 펠리어트의 가슴 속에 비로소 한 줄기 따듯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비록 미약한 온기지만, 두껍고 단단했던 얼음을 단숨에 녹였다.

펠리어트는 그대로 그녀의 손을 자신의 가슴께로 아주 조심스럽게 끌어당겼다.


“그래도 로렐라 당신을…….”

뻥 뚫려 커다란 구멍이 생긴 자리에 수도 없이 많은 감정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그 틈을 메우고 채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좋아해.”

입 안을 맴도는 많고 많은 말은 그저 접어 둔 채, 펠리어트는 소박하고 진솔한 단어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막 고치에서 벗어난 나비의 날개처럼 파르르 흔들렸다.


“나는 당신을 아주 많이 좋아해.”

그 어떤 미사여구도 붙지 않은, 푸른 새싹처럼 순수한 고백이었다.


 

* * *

황제는 사람을 닦달하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듯했다. 틈만 나면 사람을 시켜 진행 상황을 묻는 통에 로렐라는 밥 먹는 시간까지 쪼개 가며 일에 몰두해야만 했다.

몸은 무척 피곤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 펠리어트의 말이 떠오를 것 같았으니까.

그날 그녀는 결국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도망치듯 자리에서 벗어났다. 지금도 여전히 그 말에 어떤 대답을 돌려줘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고도 하루 더 북부에 머물러야 했는데도 펠리어트는 그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최선을 다해 성심성의껏 도와줬을 뿐이다.

일을 끝내고 다시 아우레아로 돌아온 지 겨우 이틀. 오늘은 저택에 손님이 한 명 방문했다.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흑발이 그녀의 등 뒤에서 찰랑거렸다.

눈동자 색깔과 맞춘 영롱한 보라빛의 보석 목걸이는 가늘고 우아한 목을 더더욱 돋보이게 했다.

로렐라는 멍하니 넋을 놓은 채, 은은한 푸른색 광택이 맴도는 드레스를 입고서 차를 홀짝이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세이블은 어딘가 모르게 달라져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자리에 앉아 있는 것뿐인데도, 당당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에게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눈빛은 예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 우아하기 그지없는 아름다운 미소 속에는 차분한 여유가 넘쳐흘렀다.

예민하게 날이 선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복수에 성공하고, 릴리 후작가의 실권을 잡아서 그런 걸까?

로렐라가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그때, 세이블이 찻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그러자 로렐라는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야.”

“아델리움으로 출발하시는 날짜가 벌써 코앞이네요.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많이 바쁘실 텐데 괜히 찾아뵌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바쁘긴. 사실 떠나기 전에 꼭 만나고 싶었어. 왜, 우리 여러 가지 일이 많았잖아.”

로렐라는 찻잔에 다시 차를 채워 주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오랜만에 보는 친구를 만날 시간조차 없을까 봐?”

세이블은 ‘친구’라는 말을 소리 없이 되뇌었다. 그녀의 입가에 핀 미소도 더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곧, 로렐라의 시선을 느끼고는 모른 척 얼른 화제를 돌렸다.


“원당 일이 잘 진행되어서 다행이에요. 폐하께서 보고를 받으시고 크게 흡족해하셨다죠?”

“으응, 그랬지.”

“대단하세요. 사절단 일만으로도 정신없이 바쁘실 텐데, 그 와중에 다른 일도 해내다니.”

세이블은 진심을 담아 칭찬했다.


“다 네 덕분이야.”

“아녜요. 공장을 소개해 드린 것 외에 한 게 없는걸요. 개인적으로 바쁘지만 않았더라도, 더 도와드릴 수 있었을 텐데.”

다른 사람을 대하는 자리였다면 잔뜩 예의를 차려 몇 차례 더 겸양의 말을 주고받았을 테지만, 그런 건 두 사람에게 필요치 않았다.


“……가문의 일은 어때? 원하는 대로 해결했어?

눈을 빛내며 묻는 로렐라를 향해 세이블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이에요.”

아주 우아하고 부드러운 미소였다.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누군가는 사신의 그것처럼 오싹한 공포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로렐라 님께는 깊이 감사드리고 있어요.”

“아니야. 나야말로 아무것도 한 게 없는걸.”

로렐라는 세이블의 말투를 그대로 따라 하며 손을 내저었다.

시선이 맞부딪히자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기분 좋게 회포를 푸는 시간.

제법 차가워진 날씨인지라 더욱 따스하게 느껴지는 햇살이 테이블 위로 환하게 내려앉았다.

잠시 별거 아닌 이야기를 나누던 세이블이 문득 조금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로렐라 님.”

“응?”

“개인적인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그럼. 당연하지.”

로렐라는 그 부탁이 무엇인지 듣지도 않고 시원스레 대답했다.

그러자 세이블은 말없이 그녀의 앞으로 작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그 안에 든 건 아름답고 젊은 여자의 초상화였다. 로렐라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림 하단부에 적힌 글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바이올렛 에라주리스?”

“네. 가문의 일로 신세 진 적이 있는 지인이에요. 아델리움 왕국에 사는 에라주리스 백작가의 외동딸이죠.”

세이블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가엽게도 몇 년 전에 시한부 선고를 받았고요.”

“시한부?”

“네. 쭉 건강하셨는데, 날벼락 같은 이야기였죠.”

“…….”

“하지만 바이올렛 님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어요. 이왕 죽는 거, 하고 싶은 걸 다 해 보고 죽겠다더군요. 그녀의 가문인 에라주리스 백작가는 무척이나 엄격하지만, 워낙 재력이 뛰어나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로렐라가 슬쩍 맞장구를 쳤다.


“하나뿐인 외동딸의 부탁이니 돈을 아주 물 쓰듯 펑펑 쓰셨겠네.”

“네, 맞아요. 그리고…….”

“혹시 엄청난 연애 스캔들은 안 일으키셨어?”

세이블은 대답도 잊은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가 봐도 놀란 게 틀림없는 그녀의 모습에 로렐라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혹시 엄청난 비밀을 하나 가지고 있지는 않아?”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로렐라가 살며시 손짓하자 세이블이 몸을 기울여 그녀와 몸을 바짝 붙였다.


“바이올렛이란 사람, 진짜 시한부 아니지?”

그러자 세이블이 곧바로 아연실색한 얼굴이 되었다.


“그걸 어떻게…….”

그건 아주 극소수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세이블은 아주 입이 무겁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 판단했다면서 바이올렛이 그녀에게만 남몰래 귀띔해 준 것이었다.


“나를 속일 바에는 차라리 귀신을 속이고 말지.”

로렐라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누가 봐도 주인공 후보잖아.”

“네?”

세이블이 답지 않게 눈을 휘둥그레 떴다. 차를 마시려던 것도 잊고 멍하니 들고만 있을 정도로 놀란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로렐라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뭐야, 설마 몰랐어?”

“주인공 후보라니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로렐라가 먼저 말하라는 듯 몸을 뒤로 기대며 살짝 손짓했다. 그러자 세이블이 기다렸다는 듯 되물었다.


“그게 정말인가요? 아니, 그보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는 거죠?”

세이블이 ‘지인’이라고 하기에 후보인 걸 알고 교류를 나눈 줄 알았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설명하긴 좀 복잡한 이야기라서……. 그보다 개인적인 부탁이라는 게 뭔데? 일단 전부 다 이야기해 줘.”

“실은 그녀가…… 행방불명이 되었어요.”

“뭐?”

“무슨 일인가 싶어 사람도 보내 봤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어요. 그래서 말인데, 로렐라 님이 한번 알아봐 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세이블은 얼른 덧붙였다.


“물론 시간이 나신다면요. 왕실에서 여러 가지 행사를 준비할 테니, 무척 바쁘실 거라는 건 알아요.”

“아무리 바빠도 그런 시간쯤은 낼 수 있지. 그런데, 행방불명이라면……. 역시 그거밖에는 없지 않아?”

“그거라뇨?”

“……소멸.”

입에 별로 담고 싶지는 않은 단어였지만, 달리 설명할 방법도 없었다. 게다가 로렐라는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주인공 후보가 틀림없으니까.”

하지만 세이블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랬더라면 제 기억에서도 지워졌겠죠. 그런 규칙이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렇네.


“게다가 그녀의 가족들도 바이올렛 님을 애타게 찾고 계세요.”

“흠.”

가족들도 기억하고 있구나.

그렇다면 후보가 아닌가? 혹시 내가 잘못 짚은 건가?

하지만 돈을 펑펑 써 가며 화끈한 연애를 즐기는 가짜 시한부 아가씨. 누가 봐도 여주감 아니던가.

이건 헷갈리려야 헷갈릴 수도 없었다.


“가까이 지내는 영애가 여는 야외 티 파티에 참석하겠다고 나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군요. 마차도, 마부도 함께요.”

조곤조곤 설명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로렐라의 마음속에, 왜인지 모를 불길한 기운이 차올랐다.


“좋아.”

바이올렛의 초상화를 가만히 응시하던 로렐라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 한 번 알아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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