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바쁘다, 바빠
(109/173)
109화. 바쁘다, 바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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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바쁘다, 바빠
2022.07.16.
고풍스러운 의자가 가득한 황궁의 회의실.
공무 회의를 위해 많은 인사가 드나드는 곳이며 제국의 역사와도 늘 함께한 이곳에, 오늘은 고작 여덟 명의 사람만이 모였다.
황제 부부와 황제가 아끼는 재무 대신 브라운베르크 백작, 그리고 앞으로 제국을 대표할 사절단 다섯 명.
귀빈들을 실수 없이 모시기 위해 아침부터 분주하게 뛰어다닌 황실 시종들과 회의실 앞을 지키고 서 있는 병사들의 태도에서도 긴장감이 넘쳐흘렀다.
“이렇게 즐거운 날은 실로 오랜만이오!”
황제는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몸소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듯 밝은 얼굴로 사절단을 살폈다.
“제국의 밝은 미래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군요. 모두 여러분 덕분입니다.”
황후도 평소의 예민하고 날카로운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쉬이 로렐라는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제국의 앞날이 결정되는 장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만큼, 황궁의 회의실에는 제국에서도 가장 힘 있고, 명망 있고, 재능 있는 자들만이 모였다.
아무나 쉽게 드나들 수 없는 곳이다 보니, 가장 말석이라도 좋으니까 한 번만이라도 이 자리에 앉아 보고 싶다는 귀족들이 널리고 널렸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로렐라에게는 텅 비어 있다시피 한 회의실이 더욱 묘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평소에 황후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멜로즈 백작 부인조차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자리는 ‘제국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지극히 신임하며, 사절단과도 긴밀하게 협업해야 할 브라운베르크 재무 대신만이 유일한 예외로서 자리에 참석했다.
“벨레드리안 제국 황실은 물론, 아델리움 왕실에서도 만남을 고대하고 있다는 친서를 보내왔더군.”
황제가 다시 한번 흐뭇한 눈길로 다섯 명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의 영원한 우방이자, 짐의 좋은 친구이기도 한 벨레드리안의 태황제께서도 진심으로 사절단의 방문을 기다리고 계시는 듯하나…….”
그러다 곧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번에는 아델리움 왕국에 먼저 방문해 주었으면 하오.”
위엄 있는 목소리에 레어넌 기사단장과 그레시안 대주교가 즉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폐하.”
“참으로 현명하신 처사입니다.”
덧붙이는 이야기는 없었지만, 로렐라도 황제가 이렇게 명령한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벨레드리안 제국은 그녀가 살고 있는 세실리카 제국와 어깨를 나란히 겨루는, 매우 풍요롭고 번영한 부국이었다.
그러나 현 황제가 즉위한 이후, 벨레드리안 제국은 크고 작은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어질고 현명하기로 소문난 태황제와 태황후에 비해 현 황제의 자질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대놓고 지지를 철회하는 가문들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벨레드리안 황실은 전쟁으로 혼란해진 세실리카 제국을 아낌없이 지원해 주었다. 아들의 미래를 염려한 태황제가 나서서 우방국을 자처하고 협력을 아끼지 않은 덕분이었다.
만약 자신이 죽고 나서 아들에게 큰일이 닥치면, 그간 긴밀한 관계를 맺어 온 세실리카 제국만큼은 하다못해 망명 정도는 받아 줄 테니까.
이유야 어쨌건, 벨레드리안의 태황제가 보여 준 행동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곧바로 발톱을 드러낸 아델리움 왕국과는 상당히 비교되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오히려 아델리움에 먼저 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제국은 여전히 건재하다는 걸, 친구보다는 적에게 먼저 알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제대로 된 사절단을 보내 세실리카 제국이 나라를 안정시켰다는 걸 보여 줄 좋은 기회였다.
로렐라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아델리움 왕국까지는…….’
배를 타고 이틀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이 세계 기준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급작스럽게 외국 순방 명령이 떨어질 줄은 몰랐다.
저택의 일부터 시작해 디저트 가게의 일까지. 돌봐야 할 것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다행히 믿고 맡길 사람이 많이 있었다.
돌아올 때 레아와 집사에게 선물을 사다 줘야지. 아델리움 특산품은 뭐가 있더라…….
“레이디 로렐라.”
그때 황제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 폐하.”
로렐라는 얼른 생각을 정리하고 공손히 대답했다.
“설탕값이 곧 안정될 듯하오. 그대의 묘안이 아니었더라면 어려웠을 테지.”
“황송합니다, 폐하.”
황제는 흡족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황실에서도 관리 차원에서 정기적으로 북부에 사람을 보내야 할 터인데…… 그대가 그 일을 계속 맡아 주면 어떻겠나?”
“네……?”
로렐라는 순간 저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말아 쥐었다. 레어넌 베르하르트 역시 조용히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미 영지민과 신뢰 관계도 쌓지 않았나. 다른 사람이 가는 것보단 그대가 맡아 주는 게 좋을 것 같군. 수확량을 얼마만큼 확보할 수 있는지 직접 가서 알아봐 주게.”
순간 로렐라의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펠리어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칼에라도 찔린 사람처럼 고통스러워하던 표정.
“저, 저는…….”
다시 마주하면 대체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지만…….
“그대에겐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무려 황제의 명인데, 감히 못 하겠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로렐라는 온 힘을 다해 거절할 만한 명분을 생각해 내려 애썼다.
“……무한한 영광입니다, 폐하. 그렇지만 폐하께서 명하신 대로 사절단은 곧 떠날 예정…….”
“그전에 일을 마무리하면 되지 않는가?”
황제는 큰 선심을 쓰듯이 말을 이었다.
“추가로 더 가동할 수 있는 공장 목록도 시종을 시켜 알아 두었네.”
아, 네. 그러시군요.
……말은 쉽지, 말은!
펠리어트를 만나는 것도 만나는 거지만, 이대로라면 미치도록 일만 하다가 눈 뜨면 아델리움 왕국이겠다고!
끄응.
“을긋습느드.”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로렐라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고작해야 이를 꽉 문 채 대답한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황제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 한 가지 더…….”
또, 왜! 뭐, 뭐!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떠넘기려고!
옷깃을 어루만지며 고민하는 듯한 황제의 모습에, 로렐라가 남몰래 쌍심지를 켜던 때였다.
“펠리어트 공작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지. 그에 대한 상을 내리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네. 그런데 그것을…… 그대에게 대신 주라는군.”
“네?”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에 로렐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에 보답하기라도 하려는 듯, 황제의 입에서 놀라운 이야기가 이어졌다.
“원래대로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하지만 공작이 일전에 짐을 직접 찾아와 간곡히 부탁하더군. 그렇게만 해 준다면, 원당 생산을 위해 북쪽 영지의 모든 지원과 힘을 아끼지 않겠다면서.”
“폐, 폐하.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다소 무례하게 비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로렐라는 황급히 입술을 뗐다.
“펠리어트 공작님과 언제 그런 말씀을 나누셨는지요?”
그 말에 잠시 생각하던 황제는 곧 확신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그대가 짐을 찾아와 설탕 문제를 안정시킬 방법이 있다고 말한 직후였지.”
……그렇다면 그의 저택에서 함께 식사한 뒤가 틀림없다. 그때의 일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라 로렐라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러니 무얼 받고 싶은지 생각해 두게.”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그녀는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 *
길었던 회의가 끝나고, 황후는 그레시안 대주교를 비롯한 다른 사절단 사람들과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차도 마실 겸, 로렐라 메이레드가 진상한 다이아몬드 펜던트를 구경시켜 주겠노라고 제안한 덕분이었다.
사람들의 눈빛은 반짝거렸고, 얼굴엔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거의 전설로나 취급되던 황실의 보물을 직접 보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황후와 사람들이 물러간 뒤, 로렐라가 한숨과 함께 나지막이 입술을 열었다.
“……폐하, 아까 말씀하셨던 시종을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 죽어 가는 사람처럼 핼쑥한 얼굴을 하고선.
“응?”
“공장들의 현황부터 먼저 파악해 두려고 합니다. 원당을 계획적으로 배분하려면…….”
“아아, 그렇지.”
조곤조곤 이어지는 로렐라의 말을 듣던 황제가 밖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장을 불러 주었다. 황제의 몇 마디 명령에 시종장은 곧장 그녀를 어딘가로 안내해 주었다.
회의실에 남은 건 브라운베르크 백작과 레어넌 베르하르트, 그리고 황제뿐이었다.
자리를 뜨는 그 순간에도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는 로렐라의 붉은 머리칼이 문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던 황제는 답지 않게 옅은 신음을 흘렸다.
“허으음.”
펠리어트 공작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떠오른 탓이었다. 그가 황궁에 직접 방문해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한 부탁이 그런 내용일 줄이야.
‘모든 지원과 힘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폐하.’
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가장 큰 공로자 중 한 명이자, 북부 대영지를 다스리는 공작이다.
게다가 제국의 물가를 안정시키려면 그의 협력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황제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에게 무엇을 바라냐 물었다.
한데, 돌아온 대답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원하는 건 뭐든 주시겠다던 그 약속을 저 대신 로렐라 메이레드 백작 영애와 해 주십시오. 그녀가 가장 바라는 것을 주고 싶습니다.’
황제가 직접 내리는 포상을 다른 이에게 양도하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상을 받은 뒤 선물하는 것도 몇 달씩 사교계에 오르내릴 얘기인데, 상 자체를 그녀에게 주라니. 평소였다면 크게 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황제는 그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절실한 눈빛과 큰 병을 앓고 있는 사람처럼 초췌한 얼굴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아프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세상에.
다른 사람도 아닌 펠리어트 공작이 저렇게 절절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니.
더군다나 두 사람은 이미 혼인이 무효가 되어 남남이 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펠리어트 공작의 마음속엔 그녀를 향한 짙은 미련과 후회가 가득해 보였다.
그러고 보면, 노먼 미드웨이 남작도 다짜고짜 그녀에게 아들과 혼인해 달라며 졸랐었지.
주변의 쟁쟁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니, 이는 분명 보석임에 틀림없다. 탐이 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왜 짐에겐 아들이 없는가…….”
황제의 입에서 시무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때 그 옆에서 누군가가 낮게 헛기침했다.
“저는 아들이 있습니다만…….”
뭐?
황제가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보았다. 브라운베르크 재무 대신이 어쩐지 우쭐한 표정으로 흰 수염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것도, 결혼 적령기에 막 들어선 스물한 살짜리 아들이…….”
어?
이놈 보소?!
발끈한 황제는 괜히 말꼬리를 잡았다.
“허어, 스물한 살이면 결혼 적령기라고 말하기엔 아직 좀 이르지 않은가?”
“별말씀을요. 한 가정을 이루기엔 충분하지요. 벌써 여러 가문에서 혼담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백작은 슬그머니 고개를 수그린 것과는 달리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게다가…… 요즘 제국에서 인기가 많다는 연하이고요.”
“…….”
이, 이놈이?!
체통을 잃고 큰 소리를 낼 뻔한 자신과는 달리 백작은 그저 모른 척 수염만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얄미워 짜증이 났지만, 마땅히 할 말이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찰나였다.
“……백작님, 안 나가십니까?”
등 뒤에서 낮고 스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순간 뒤를 돌아본 백작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어째서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어넌이 여태 본 적 없는 무서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만…….”
레어넌은 한 자 한 자 씹어 먹듯 말을 이었다.
“나가 보시지요.”
“아, 예…….”
다른 곳도 아니고, 황실 회의실에서 축객령은 오로지 황제만이 내릴 수 있었다.
평소라면 기가 막혀서라도 한마디 했겠지만, 브라운베르크 백작은 아무런 토도 달지 못하고 주춤주춤 뒷걸음질로 문을 향해 물러갔다.
그 모습을 본 황제가 작게 감탄했다.
‘오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내겐 레어넌이 있었지!
자세한 사정까지는 모르지만, 황제도 레어넌이 로렐라를 유독 살뜰히 챙기고 보살핀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둘 다 사절단으로 임명되었으니 앞으로 함께할 시간 또한 더욱 늘어나지 않겠는가!
“내 자랑스러운 조카……!”
둘만 남았으니, 특별히 애정 어린 호칭도 문제 될 게 없었다.
황제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짐에게 좋은 생각이 있……!”
하지만 그 말은 불행히도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브라운베르크 백작에게 보여 줬던 것보다 더욱 살벌하고 원망스러운 눈빛이 그를 향해 있었다.
그 순간, 본인이 직접 나서서 로렐라 메이레드에게 북부의 일을 맡겼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
사나운 눈길을 온몸으로 받으며 황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조카야. 너…….
잘하면 짐을 한 대 치겠구나?
……아주 한 대 치겠어, 응?
* * *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다.
물론 여기 올 땐 한 번도 평탄한 적 없긴 하지만…….
“마님!”
“마니임……!”
펠리어트의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전갈을 받고 나와 있던 고용인들이 일제히 나를 목 놓아 부르며 우르르 달려왔다.
왜인지는 몰라도 고용인들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심상치 않았다.
“왜 이제야 오셨어요……. 흐으윽.”
나를 유독 따르던 베티의 입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그래, 응? 무슨 일 있었어?”
걱정되는 마음에 다정스레 물었지만, 베티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몸만 떨 뿐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몇 번이고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답답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진 그때.
“……아무 일 없어.”
나지막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고개를 든 나는, 우두커니 선 남자를 보고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안 그래도 차가워 보이는 눈매가 더욱 예리하게 변해 있었다. 눈빛 또한 어둡다 못해 피폐하게까지 느껴졌고, 조각 같던 턱선은 이젠 마치 살도 베어 낼 수 있을 것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심하게 앓고 일어난 사람처럼 창백하고 파리한 안색과 어두운 낯빛에 걱정이 차올랐다.
혹시…… 어딘가 크게 아팠던 걸까.
“펠리어트……?”
상처 입고 다쳐서 천천히 죽어 가는 커다란 짐승 같은 남자를 가만히 부르자…….
그가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싸늘하게 굳은 공허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움찔.
펠리어트는 뿌리치지 않았다. 대신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의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들어올 건가?”
그가 낮게 신음하듯 물었다.
황제의 명을 이행하기 위해서라도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그리고…… 황제와 대체 왜 그런 약속을 한 건지도 묻고 싶었고.
“그래.”
그 때문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물론 저택의 주인이 그래도 괜찮다고 한다면.”
행여나 거절의 답이 돌아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걱정은 기우라는 듯, 말이 끝나자 그의 텅 빈 눈동자에 비로소 희미한 온기가 도는 듯했다.
“들어가자.”
그저 살짝 닿아 있었을 뿐인 내 손을 그가 조심스레 잡았다. 쉽게 깨지는 유리 공예품을 쥔 것처럼.
조금도 흠집 나서는 안 될 아주 소중한 물건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