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그래도 괜찮아 (108/173)


108화. 그래도 괜찮아
2022.07.13.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널 황실에 팔아 버리라는 말이야?”

스산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그, 그게 아니라…….”

카셀이 할 말을 찾는 동안, 로렐라는 점점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평소의 밝은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늘 풍부한 표정을 지닌 얼굴 또한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화가 많이 났나 봐.

카셀이 겸연쩍은 얼굴로 턱만 만지작거렸다.

비록 장난스럽게 말하긴 했지만, 제 목에 걸린 현상금을 이용하라는 건 진심이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로렐라는 그 정도로 가치 있는 사람이니까.

바꿔 말하자면 자신의 전부를 걸어도 괜찮다는 소리였다.

문득 그녀와 처음 만났던 날이 기억났다. 자신을 쫓아온 로렐라를 향해 ‘누나는 누구야?’ 하고 물었던 것이.

그때만 해도 카셀은 그녀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그녀를 둘러싼 흥미로운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얼굴을 찾아볼 정도로 중요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길드에 의뢰하는 사람은 대부분 그만한 재력과 세력을 가진 경우가 많았고, 그 외의 사람을 기억하는 건 불필요한 일이었다.

그들과 비교하면 로렐라는 하룻강아지나 마찬가지였다.

그래, 분명 그랬었는데…….


‘근데도 언제나 나를 놀라게 만들었지.’

카셀은 화를 가라앉히려는 듯 잠시 숨을 고르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로렐라는 늘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여기쯤 있겠지, 하고 돌아보면 오히려 한발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자신의 얼굴만 보고 달려든 철없는 귀족 아가씨라고만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암흑가와 엮이는 걸 꺼리긴커녕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보면 볼수록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돈보다 권력을 좇는 듯했지만, 그게 그녀의 최종 목표가 아니라는 것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뭘 원하는 건지, 대체 어딜 향해 가고 있는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그녀를 더욱더 깊이 알고 싶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만은 그걸 알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거기엔 펠리어트나 레어넌이 절대로 하지 못하는 걸 나만은 줄 수 있다는 자신감도 한몫했고.


“……카셀, 너 말이야.”

로렐라가 양손을 허리에 올리며 조용히 읊조렸다.


“사람에겐 해도 되는 말이 있고, 해선 안 될 말이 있어.”

“누, 누나. 내 말 좀 들어 봐.”

왠지 무릎 꿇고 손을 들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카셀이 다급하게 말문을 열었다.


“설마 내가 평생 감옥에 갇혀 살 거라고 생각했어?”

이게 다 자신의 설명이 부족한 탓이라고 믿은 그는 최선을 다해 말을 이었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검은 뱀 길드’ 길드장의 정체를 밝히는 것만으로도 큰 공을 세우는 거야. 거기다 현상금도 꿀꺽할 수 있고.”

“……그래서?”

“내가 탈옥하더라도 누나가 그걸 책임질 필요는 없잖아. 이름이나 신분은 언제든 바꾸면 그만이고, 원래부터 얼굴을 드러내고 산 건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응?”

“결국 널 이용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올곧은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은은한 분노를 읽은 카셀은 자기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했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카셀.”

“넵.”

“네가 비록 멋대로 일을 벌여서 내 수명을 줄이고, 그마저도 제대로 수습을 안 해서 내 마음을 졸이게 만들어도! 시간이 지나도 발전이란 걸 도무지 할 기미가 없어서 날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들어도!”

“…….”

“그래서 때론 이게 얼굴만 예쁜 쓰레기는 아닐까 생각이 들게 해도!”

차라리 그냥 욕을 해.

카셀이 적나라하게 쏟아지는 비난에 핼쑥해진 얼굴을 문지르던 그때.


“그래도 난 널 친구라고 생각해. 그런 널 이용해서 얻은 힘 따위는 필요 없어.”

차분한데 한편으론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힘 있는 음성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맙고 소중한 사람이니까.”

소중한 사람.

그 말을 가만히 되뇌자 어쩐지 심장이 간지러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카셀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게다가 황실의 권력이라는 게 뭐, 그 정도로 대단한 것도 아니고. 어차피 이 제국에만 영향을 미칠 수 있잖아?”

로렐라는 이렇게 말하며 생긋 웃었다.

진심인가?

카셀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해 놓고도 허세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얼굴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나 결국 아름다운 눈동자를 얼마간 바라보지도 못하고 시선을 떨구었다.

그에게도 ‘소중한 사람’은 있었다. 형제처럼 자란 시드도, 그의 말이라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든든한 길드원들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들과는 다르다. 자신이 가진 모든 걸 이용해 최선을 다해 유혹했는데도 여전히 친구라고 여기는 무감함에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람.

마음속으로 그 말을 한 번 더 되뇐 순간.

카셀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

로렐라가 입술을 연 동시에, 단단한 두 팔이 그녀의 몸을 꽉 껴안았다.


“카, 카셀?”

적잖이 당황했는지 로렐라가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카셀은 그녀를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품 안의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잠깐…….”

“다시는 그런 말 안 할게.”

“이, 이것 좀…….”

너무 세게 끌어안은 탓에 숨이 막혀 로렐라가 바르작댔지만, 카셀은 그마저도 눈치채지 못했다.


“절대로.”

소중한 사람.

그저 마음속으로 계속 이 말만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 * *

드높은 하늘 위에 뜬 눈 부신 태양 덕에, 황궁을 이루는 수십 개의 탑이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

제국의 황실을 대표할 이들의 행보가 시작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순간이었다.

여러 명의 기사가 굵은 손잡이를 빠르게 돌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마에서 구슬땀이 배어 나올 때쯤 비로소, 육중한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이윽고 문이 활짝 열리고 나서야 대기하고 있던 마차 다섯 대가 안쪽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하나같이 화려하고,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아름다운 마차였다.

황궁에서 최고의 예우를 갖춰 직접 모셔 온 사람들이 타고 있기 때문이었다.


“와아! 저것 좀 보세요!”

“엄청난 광경이네요. 보러 오길 잘했어!”

성문 주위에 몰려 있던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 환호성을 터트렸다.


“저 푸른색 문양은 베르하르트 가문이야! 저 마차에는 레어넌 단장님이 타고 계시겠지?”

“흰색 바탕에 금빛 날개! 그레시안 대주교님이시다!”

사람들은 마차에 달린, 가문과 출신을 상징하는 커다란 문양을 보고 그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를 맞추었다.

그것 또한 행렬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라는 걸 알고 있는 마부들은 일부러 천천히 말을 몰았다. 하지만 고작해야 겨우 다섯 대의 마차가 지나갈 뿐이라, 사람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침부터 나와 기다린 시간에 비해 너무나도 짧은 행렬.


“저, 저기 계신다!”

“그래, 바로 저분이야!”

그런데도 마지막 마차가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의 입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고대하던 인물이 타고 있는 마차였기 때문이었다.


“아, 밀지 말아요……! 더 이상 앞으로 갈 수가 없다고요!”

“아빠! 나 아무것도 안 보여요, 흐어엉!”

조금이라도 앞에서 보기 위해 밀어 대는 통에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마차 가까이로 가지 못하도록 경비를 서고 있는 기사들조차 쩔쩔맬 정도의 인파였다.

아버지는 우는 아이를 번쩍 들어 목말을 태웠고, 보다 자세히 보기 위해 근처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는 사람도 있었다.

유달리 화창한 햇빛 속에서, 붉은 장미 문양이 반짝였다. 마차에 난 창문으로 언뜻 보이는 붉은 머리가 모두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저 분위기에 고무되어 마구 손뼉을 치고, 의미 없는 함성을 지르던 자들마저 입을 다물 정도였다.

당연했다. 그녀는 가장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사람이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에 비해 떨어지는 조건을 딛고 자신의 손으로 저 자리까지 올라간 그녀의 이야기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의 입방아에 올랐다.

평소 어차피 귀족들끼리의 이야기라며 황실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사람들조차도, 한 번쯤은 그녀의 이름을 들었을 정도였다.

로렐라가 타고 있는 마차는 문을 통과해 점점 안쪽으로 멀어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리를 뜨지 못한 채, 멀어지는 마차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 * *

스르륵, 쿵.

커다란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오늘 구경 오길 정말 잘했어!”

“이대로 들어가긴 아쉬운데 광장 쪽에서 차 한 잔 마실까?”

여기저기서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한편, 황궁 담벼락 근처 가장 높이 솟은 나무 위.

어두컴컴한 그늘 속에 몸을 숨긴 채 앉아 있던 남자는, 마치 그곳에 몸이 붙기라도 한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풍선이 터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흐음.”

이미 단물이 다 빠진 과자를 무의식적으로 우물거리던 카셀이 저도 모르게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다섯 대의 마차에서 줄줄이 내리는 사람들.

워낙 거리가 멀어서 누가 누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로렐라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누군가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환한 빛을 받아 빛나는 눈부신 금발이 남자의 등 뒤에서 흔들렸다.

내가 저 빛 속에 함께 서 있을 일은, 영원히 없겠지.


“……그래도.”

괜찮아.

카셀은 마지막 말을 입 안으로 삼키고는 손에 칭칭 동여맨 스카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젯밤 로렐라가 하고 있던 스카프였다.

보드라운 천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코끝에 옅은 장미 향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래.”

빛이 돋보이려면 어둠이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그러니 로렐라를 위해 평생을 암흑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해도, 그래도 괜찮았다.

레어넌 베르하르트가 로렐라의 손을 잡고 황궁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희한하기도 하지.

분명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가 손에 잡힐 것처럼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맑은 웃음소리 또한 귓가에 울렸다.

카셀은 스카프를 동여맨 손을 얼굴에서 떼지 않은 채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그 광경을 모조리 지켜보았다.

마치 심장을 저미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마저도 금세 잊었다.

오로지 멀어지는 로렐라만을 눈에 아로새길 뿐이었다.

그녀 대신 위험하고, 잔인하고, 지저분한 일을 도맡아 어둠 속에만 있게 되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로렐라가 그렇게 말해 주었듯, 그녀 또한 제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