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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그게 무슨 소리야 (107/173)


107화. 그게 무슨 소리야
2022.07.09.


맑고 잔잔한 햇살이 기분 좋게 쏟아지는 상쾌한 아침이다.

하지만 저택은 이른 시간부터 크고 작은 음성들로 몹시 소란스러웠다.


“아가씨,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활짝 열어 둔 서재 문밖에서 흥분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또 선물이라고?”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던 나는 괜히 놀란 척하며 허겁지겁 들어오는 집사를 바라보았다.


“네! 블루길 남작님께서 보내신 것 같습니다. 여기 편지에 ‘총명하고 아름다우신 로렐라 메이레드 님께’라고 적혀 있습니다.”

“어머나, 그런…….”

당연하신 말씀을.

자꾸만 위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아래로 내리며, 건너편의 소파 테이블을 손으로 가리켰다.


“일단 저 노란색 상자 위에 올려놔 줘.”

이미 테이블 위는 빈틈없이 꽉 차서 펜 한 자루 놓을 곳조차 없었다.


“네, 아가씨. 떨어지지 않도록 잘 쌓아 놓겠습니다.”

“응, 고마워.”

집사는 산더미처럼 쌓인 상자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조심하며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내게 인사를 건넨 뒤,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재를 빠져나갔다.


“로렐라 아가씨!”

그가 사라진 뒤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에는 조이가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를 나를 불렀다.

헉헉대며 들고 온 것은 그녀의 허리께까지 오는 거대한 꽃바구니였다.


“아이리스 영애께서 이런 것을 보내셨어요!”

“세상에, 아이리스 영애께서 내게 꽃을?”

“네! 여기 카드가 꽂혀 있는데, 읽어 드릴까요?”

“응, 부탁할게.”

가능하면 엄청 큰 소리로.

나는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두 눈을 살짝 감은 채 귀를 기울였다.


“친애하고 존경하는 로렐라 님께!”

역시 우리 저택에서 제일 목소리가 큰 조이답게 서재는 물론이고, 열어 놓은 창문 밖까지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영롱한 이슬을 머금고 피어난 아름다운 꽃들의 자태를 보니 로렐라 님이 떠올라 보내 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 더!

더 큰소리로!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빠른 시일 내로 큰 파티를 열 계획인데 명사 중의 명사이신 로렐라 님께서!”

크으, 라임 좋고!


“……참석해 주신다면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조이는 흥분으로 붉어진 얼굴을 하고는 끝까지 큰 소리로 외쳤다.


“이히힛!”

결국 내 입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아차.

나는 얼른 입가를 가린 채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리 조이 앞이라지만, 그래도 체통을 잃어선 안 되지.

이제 겨우 사절단의 일원이 되었을 뿐이니까.

그것이 제아무리 파격적인 인사라고 해도.

그래서 아우레아는 물론이고 수도가……. 아니, 제국의 사교계가 발칵 뒤집혔다 해도 말이지!


“후…….”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주먹을 꼭 쥐고 깊게 숨을 들이쉬어도 보았지만, 여전히 기쁨이 멈추질 않았다.

오히려 눈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선물 상자며 꽃바구니를 보니 더더욱 벅차올랐다.

이것들은 모두 주위의 귀족들이 보내온 것이었다.

나와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보낸 선물도 있고,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 보낸 것도 적지 않았다.

‘모두의 예상을 깬 전대미문의 대사건’, 혹은 ‘황제의 마음을 돌린 대단한 수완가!’ 등의 소문이 대체 어디까지 퍼졌는지, 또 얼마나 빠르게 퍼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일종의 척도라고 할까.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그렇지 아직 정식 임명장을 받기도 전인데, 이렇게 앞다투어 내게 잘 보이려 하다니 하여튼 참 빠른 사람들이다.

그대들의 이름은 잘 기억해 두겠습니다……. 기억만 하겠다고.


“후후훗.”

품위를 잃지 않겠다는 마음도 잠시,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또다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가씨!”

그래, 그래. 또 누군가가 나를 목 놓아 부르는구나.

이번엔 또 뭐가 왔을까 하는 기대감에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쓸어 넘기며 문 쪽으로 다가갔다.

서로 자신들이 가져가겠다며 옥신각신했는지, 조이와 집사가 둘둘 말려 있는 묵직한 천을 들고 있었다.


“응? 그건 뭐야?”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 큰 것 같은데.


“레아 님이 보내신 거예요!”

“레아가?”

디저트 가게라면 분명 어제저녁에도 들렀었다. 꼭 파티를 열자며 진심으로 좋아해 주던 얼굴이 눈에 선하다.

그런 레아까지 뒤늦게 선물을 보내왔다고? 우린 이런 선물을 주고받을 사이가 아닌데.


“네! 레아 님도 자기 일처럼 기뻐하셨거든요. 그래서 동참하셨답니다.”

조이가 열심히 설명했지만, 오히려 더 알쏭달쏭할 뿐이었다.


“그게 대체 무슨…….”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조이와 집사가 외쳤다.


“하나, 둘…….”

셋!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동시에 둘둘 말린 천을 양쪽에서 쫙 잡아당겼다.


“악!”

 
[★경 아우레아의 자랑, 로렐라 메이레드 님! 사절단 임명을 축하드립니다. 축★]

무지개색 반짝이까지 뿌려진 지나치게 화려한 현수막을 보는 순간 내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내가 기쁨의 비명을 지른다고 생각했는지 집사가 신나서 외쳤다.


“어떻습니까, 아가씨. 문구는 마음에 드시나요? 저희가 식견이 짧아서 이거 하나 정하는 데도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모릅니다.”

“하, 하지 마!”

내 절규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이번에는 조이가 잔뜩 흥분해서는 발을 동동 굴렀다.


“멋지죠? 이걸 우리 저택 담장이랑 레아 님의 디저트 가게 앞, 그리고 아우레아 시가지 곳곳에 걸기로 했어요!”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제발 살려 줘! 나를 수치사 시킬 셈이야?!

나는 사색이 되어 천을 잡은 채 빙빙 돌며 춤까지 추는 두 사람 사이로 다급히 뛰어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말리고 또 말려도 조이와 집사의 신명 나는 춤은 멈출 줄 몰랐다.

* * *



“후우…….”

밤늦도록 서재의 불을 밝히고 앉아 있자니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아침의 들뜬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가득 쌓인 선물들을 봐도 이젠 그저 피로감이 몰려왔다.

시가지와 디저트 가게 앞이 싫다면 저택 담벼락에라도 걸자는 조이와 집사를 말리느라 진이 다 빠져 버렸다.

결국 나의 갖은 회유와 눈물 서린(?) 읍소에 그들이 포기해 주었다.

조이는 마지막까지 입술을 삐죽삐죽 내밀었지만 말이다.


“저 별은 대체 뭐냐고…….”

‘경축’이라는 글자에 붙은 별 무늬를 보니 다시금 얼굴이 화끈거렸다.

바닥으로 반짝이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급히 천을 둘둘 말았다.

이 끔찍한 물건을 영원히 봉인하기 위해 책상 아래 가장 큰 서랍을 비우던 그때였다.

띵동!

「‘이 구역 주접킹’ 님이 로렐라 님의 주식을 30만 주 구매합니다.」

「현수막 멘트가 넘 약함. ‘로렐라. 그 짐 좀 내려놔! 멋짐★’ 정도는 써야…….」
 


“아, 쫌……!”

주접 멘트 가르치지 마!

나는 항의의 표시로 얼른 창을 끄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달아오른 볼을 식히려 활짝 열어 놓은 창가로 다가갔다.


“누나!”

세상에.

순간 귀를 의심했다.


“잘 있었어?”

오랜만에 듣는다고 해서 도저히 헷갈릴 수 없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카셀?!”

반가운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쪽으로 후다닥 달려간 것도 잠시.

나는 창문을 통해 넘어오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는 많이 선선해진 바람에 눈부신 은발이 흩날렸다.

사람을 홀리는 붉은 눈동자도, 때로는 천진난만한 소년처럼, 때로는 작은 악마처럼 보이는 미소도 그대로였다.

익숙해지면 시선을 빼앗기는 일도 좀 덜 하겠지 싶었는데, 아무래도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자 카셀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더니 싱글벙글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들었다.


“떼부자.”

다짜고짜 이게 무슨 소리야?


“응?”

“제국에서, 아니 대륙에서 제일가는 갑부!”

의문은 곧 풀렸다. 카셀이 펼쳐 든 여러 장의 서류 덕분이었다.


“봐, 길드가 이번에 새로 찾아낸 보물들이야.”

“이것들을 전부……?”

말도 안 돼.

빽빽한 글자들을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갖가지 보석들은 물론 수많은 금화와 진귀한 원석, 심지어 나는 쓰임새조차 짐작할 수 없는 고대 물건들까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많은 걸 어디서 찾아낸 건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알 것 같으니까.


“길드원들 전부 데리고 가서 고원을 아주 싹 쓸어 왔지.”

내 예상대로였다. 카셀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 그래서 얘가 이렇게 된 거구나…….

애가 왜 이렇게 탔나 했더니, 하루 종일 땡볕에서 삽질만 했겠구나. 이제야 이해가 갔다.


“굉장하지?”

카셀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으스대며 싱글벙글했다. 그 변함없는 모습이 반갑기도 하고, 고원에 정말로 많은 보물이 묻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정말 잘됐다, 카셀.”

그래서 마치 내 일처럼 함께 기뻐할 수 있었다.


“이제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은 없어.”

그는 턱을 치켜들고는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딱 한 가지만 빼고 말이야.”

갑자기 그의 음성이 위험할 정도로 낮게 가라앉았다.


“응?”

정신을 차려 보니, 내 몸이 어느새 벽을 짚은 그의 두 팔 안에 갇혀 있었다.

으, 으응?


“누나의 활약은 잘 들었어. 고원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굳이 보고받지 않아도 사방에서 누나 이름이 들려오던걸.”

“…….”

“황실의 새 사절단이라니, 정말 대단해. 누나.”

비아냥거린다거나 위협하는 듯한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풀로 붙인 것처럼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카셀이 황실에 얼마나 큰 반감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도 그럴 게, 무려 그의 목에 커다란 현상금을 내건 사람들 아니던가.

그러니 내가 이번 일로 황실 측 일원이 된 걸 카셀이 그다지 환영하지 않는 건 당연했다.

특히 결정적인 역할을 해 준 다이아몬드 펜던트는, 그가 도와준 덕분에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껄끄러울 만도 했다.

나는 다급히 입술을 열었다.


“카셀, 나는…….”

“설탕 사건으로 황제가 다시 보게 만들었다지? 그런데 그걸 해결할 수 있었던 건 북부의 원당 덕분이라며?”

그러나 카셀이 먼저 내 말을 잘랐다.


“사이가 좋지 않았던 다른 후보들을 화해하도록 도와줬다고도 들었어. 그자들이 사절단 후보였다는 건 아마 레어넌 베르하르트가 알려 줬겠지.”

그의 입에서 뿌드득 이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듣는 순간 엄청 분했는데, 이젠 괜찮아졌어. 왜냐하면 내겐…….”

나보다는 살짝 채도가 밝은 편인,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붉은 두 눈이 아찔하게 빛났다.


“그 두 사람은 절대로 줄 수 없는 게 있으니까.”

뒤로 걸음을 물리고 싶어도, 사방이 막혀 있으니 불가능했다.


“……누나한테 날 줄게.”

뭐라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새, 카셀이 손을 뻗어 내 목에 두른 스카프를 풀어 냈다. 쌀쌀한 가을 밤 기온에 대비해 매고 있던 거였다.


“지금에야말로.”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는 듯, 카셀의 붉은 혀가 입술 끝을 천천히 핥았다.

그저 그뿐인데도 지독하리만치 숨이 막혔다. 사랑스럽던 모습은 이내 달콤한 신기루를 선사하는 악마처럼 보였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왔다.


“카셀. 자, 잠깐. 그게 무슨 소리…….”

만류하려 했지만, 카셀은 고개를 젓고 내 팔을 잡아 자신의 양어깨 위로 올렸다.

아주 정중하고도, 조심스럽게.

나를 가로막거나, 억지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건 아니라는 듯이.

그런데 왜 굳어 버린 것처럼 팔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걸까.

이윽고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허리를 감쌌다.


이대로 허락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나도 나를 놓고 짐승처럼 굴게 되겠지.

겨우 마음을 다잡고 고집스레 두 눈을 뜨고 있는데, 그래서 오히려 더 어지러웠다. 눈앞에 아름다운 카셀의 웃음이 계속 보였으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카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나는 누나가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 그래서 말인데…….”

따듯한 숨결이 입술을 간질였다.

카셀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움직이는 게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황실에서 제일 탐내는 게 바로 여기 있잖아. 이건 레어넌 베르하르트나, 펠리어트 체임버스는 절대로 해 줄 수 없는 거라고.”

이윽고 그의 커다란 손이 천천히 내 뒤통수를 감싸더니, 그대로 조심스럽게 당겼다.

나는 그대로 카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누나는 현상금 50억 골드짜리. 아니, 100억 골드짜리 목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그새 두 배로 올랐더라고.

머리 위에서 장난스러운 속삭임이 들려왔지만.


“……뭐?”

오히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날 바치면 분명, 더욱 높이 올라갈 수 있…….”

“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참지 못하고 그의 가슴팍을 확 밀어 냈다.

천진난만하게 두 눈을 깜빡이던 카셀이 내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라 굳었다.


“누, 누나?”

“다시 한번 말해 봐.”

“…….”

“지금 그게 무슨 소리냐고 했잖아.”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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