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로렐라 메이레드 (106/173)


106화. 로렐라 메이레드
2022.07.06.



 
세르하드 후작저의 응접실에서 커다란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 자리에서 어떻게든 손을 썼어야지!”

후작이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을 쾅! 하고 내려치자 위에 있던 찻잔에서 찻물이 넘쳐흘렀다.


“계획은 분명 완벽했다! 사람까지 사서 일을 진행하지 않았느냐? 메비앙과 센우드가 황제 앞에서 드잡이하도록 말이다!”

“수, 숙부님!”

아무리 본인의 저택이라고는 해도 듣는 귀가 많다.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이야기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멜로즈 부인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후작을 말렸다.


“이제 와서 수습한다고 한들,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다급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르하드 후작의 분노는 쉬이 풀리지 않았다.

누가 방해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마음이 급한 후작에게는 일이 틀어졌다는 사실 자체만 중요했으니까.

게다가 황궁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당분간 방문을 삼가라는 멜로즈 백작 부인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따라야만 했던 것도 자존심이 상했다.

가면무도회가 끝난 지 며칠이나 지났는데, 여전히 그가 분노를 느끼는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어쨌든 대책을 강구해 보겠어요.”

이 이상 머물러 봤자 좋은 꼴 볼 일은 없겠다고 판단한 부인이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세르하드 후작도 그런 그녀를 굳이 잡지 않았다.

멜로즈 백작 부인이 돌아간 뒤에도 그의 심기는 여전히 불편했다.

그는 응접실에 혼자 남아 한참을 생각하다가 음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애에게만 맡겨 둬선 안 되겠어.”

황제에게 직접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을 매수해 볼까, 아니면 두 라이벌에 대한 추잡한 헛소문을 지어내 퍼뜨려 볼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후, 후작님……!”

집사가 노크도 없이 응접실 문을 벌컥 열며 헐레벌떡 달려왔다.

평소라면 불같이 화를 냈겠으나, 집사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있어 후작은 분노를 참고 물었다.


“왜 그러지?”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올 사람이 없는데?

의아해한 것도 잠시.

집사의 뒤쪽에서 마치 악마 같은 얼굴을 하고 서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메비앙 남작과 센우드 백작이었다.


“세르하드 후작님. 이 투서의 내용이 사실입니까?”

그들의 손에는 서신이 한 통씩 들려 있었다.


“우리 집에 말고삐와 채찍을 보낸 것도, 메비앙 남작가에 백합을 보낸 것도 모두 후작님께서 꾸민 일이라 들었습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진 못할 겁니다.”

두 사람은 험악하게 얼굴을 구긴 것과는 달리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눌린 세르하드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건 내가 아니라……!”

전부 멜로즈 백작 부인이 꾸민 일이라며 시치미를 떼려던 그는 순간적으로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친척에 대한 의리가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비호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황궁의 의전장이니까 혹여 일이 잘못되더라도 덮을 수 있겠지.


‘만약 혼자 살겠다고 발을 뺀다면, 황실에 이 사실을 전부 폭로하겠다고 협박해야지!’

세르하드 후작은 뒤로 주춤주춤 걸음을 물리며, 속으로 얼른 계산을 마쳤다.

……황궁에도 똑같은 내용의 투서가 갔다는 것은 꿈에도 알지 못한 채.


“이, 이 손님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야겠으니 그만 물러가도록.”

그는 어떻게든 위엄 있어 보이려 가장한 목소리로 집사에게 지시했다.

곧 응접실에는 세 사람만이 남았다.

후작의 손에 억지로 편지가 쥐어졌다.


“읽어 보시지요, 따로 조사할 필요도 없이, 진상이 낱낱이 적혀 있으니까. 이 일을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시겠지요, 세르하드 후작님?”

“센우드와 메비앙 가문을 얕보지 마십시오. 우리가 힘을 합치면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는지 알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보는 눈이 사라진 덕분인지 두 노신사도 거리낌 없이 분노를 드러냈다.

멜로즈, 네가 날 도와주겠지? 응?

후작은 감히 편지를 읽어 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소리쳤다.

……제발 도와줘!

한편, 황궁에 도착한 멜로즈 부인은 시종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걸음을 옮겼다.

이 상황에서 멜로즈 백작 부인이 그나마 비벼 볼 만한 언덕은 황후뿐이었다.

물론 황후의 성정을 생각해 보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위험한 도박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달리 택할 만한 선택지는 없었다.

만찬장을 지나 아무나 섣불리 들어갈 수 없는, 황궁의 깊숙한 곳까지 바삐 걸어 들어가는데, 어느 순간 그녀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평소라면 매우 조용히, 발걸음 소리 따윈 조금도 내지 않은 채 그림자처럼 황궁 복도를 오갔을 시녀들이 오늘따라 자기들끼리 쑥덕대는 게 아닌가.

멜로즈는 자신의 옆을 지나가던 시녀 한 명을 급히 잡았다.


“무슨 일이길래 오늘따라 궁이 소란스러운 거지?”

“아, 손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손님? 누구?”

“메이레드 백작가의 로렐라 메이레드 님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이 튀어나오자, 멜로즈 백작 부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젊은 영애가 단독으로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알현하겠다고 찾아오시다니, 흔치 않은 일이라 소란스러운 모양입니다. 주의를 주도록 하겠습니다.”

단독 알현이라니.

게다가 ‘찾아왔다’는 건, 이미 황제가 허락했다는 건가?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황제 부부의 최측근, 그래. 적어도 레어넌 베르하르트쯤은 되어야 가능한 이야기다.

물론 가면무도회 때 로렐라가 센우드 백작과 메비앙 남작을 상대로 어떤 거래를 제안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멜로즈도 직접 지켜보았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단독 알현을 성사시킬 수 없을 텐데…….

다시금 입을 연 멜로즈 백작 부인의 목소리에서는 숨길 수 없는 당황이 묻어났다.


“지금 폐하께서는 어, 어디에 계신가?”

“에넨의 방에 계십니다.”

심지어 일반 알현실도 아닌, 황후가 가장 아끼는 장소라고?!

‘에넨의 방’이라면 내부에 황가의 보물이 잔뜩 진열되어 있어 평소에도 삼엄한 경비를 유지하는 곳이 아닌가.

그런 곳에서 고위 귀족도 아닌, 일개 지방 귀족가 영애의 알현을 받고 계시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멜로즈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거의 뛰다시피 해 걸음을 옮겼다.

알 수 없는 불안이 몰려와 말아 쥔 주먹 안에서 자꾸만 땀이 배어 나왔다.

* * *



“로렐라 메이레드, 고개를 들라.”

평소처럼 딱딱하고 엄중한 어투였으나, 목소리만큼은 부드러웠다.

그녀는 황제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순간을 함께 지켜봐 주면 좋겠군.”

“무한한 영광입니다, 폐하.”

더할 나위 없이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로렐라가 대답했다.

황제가 눈짓하자 시종장이 재빨리 다가왔다.

그는 황제 앞에 있는 작은 단상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고는 새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그 위에 놓인 나무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목함에는 붉은 실크로 싸인 주먹만 한 크기의 물건이 들어 있었다.

시종장은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고급스러운 천을 아주 조심스레,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황제와 황후를 보필하기 위해 곁에 선 전담 시종들과 사방을 지키는 병사들까지. 알현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천이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오랜 시간 어둠 속에서 꽁꽁 숨어 있던 보물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순간.


“아……!”

“오오!”

모두의 입에서 일제히 탄성이 터졌다.


“대단하군!”

황제가 흡족한 미소를 띠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너무나 아름답네요!”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황후조차 상기된 얼굴로 감탄할 정도였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펜던트가 시종장의 손에서 반짝거렸다.

시종장이 매우 조심스럽게, 천천히 손을 움직일 때마다 펜던트 가운데 박힌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가 시시각각으로 다른 빛을 발했다.

정말로 수많은 별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광채에, 사람들은 홀린 듯이 펜던트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것이 그동안 전설일 뿐이라고 치부되었던 ‘황실의 심장’이라 불리는 보물이었다.


“내내 텅 비었던 마음이 비로소 채워지는 것 같군.”

가장 큰 유리 장식장의 정중앙, 아주 오랫동안 비어 있던 그 자리에 ‘황실의 심장’이 장식되는 걸 지켜보던 황제가 감격에 차 외쳤다.


“로렐라 메이레드! 그대가 정말 큰일을 해 주었다!”

이걸 어디서, 어떻게 찾았는지는 지금 당장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잃어버린 황실의 보물을 되찾게 되자 앓던 이를 뺀 것처럼 속이 후련했다. 선대의 보물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드디어 씻게 된 황제의 마음에 기쁨이 파도처럼 몰아쳤다.


“과찬이십니다, 폐하.”

로렐라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담백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도 빛났다.

아름다운 얼굴에는 당당함이 넘쳐흘렀고, 품위 있는 자세는 조금의 삐뚤어짐도 없이 반듯했다.

본인이 직접 가지고 온 보물만큼이나 빛나는. 아니, 그보다 더 고귀하고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감히 눈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난날의 내 태도가 무척이나 후회되는군요. 그대 같은 보물을 알아보지 못하다니. 나를 용서해 주겠어요, 로렐라 메이레드?”

심지어는 가차 없고 냉혹하기로 유명한 황후마저도 진심을 담아 사과를 하게 만들 정도였다.


“황송하옵니다. 부디 말씀을 거둬 주시옵소서, 황후 폐하.”

로렐라는 다시 한번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그저 그뿐인데도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권좌에 앉아 있을 때면 누구보다도 근엄한 얼굴을 하던 황제 부부의 얼굴에도, 다시금 커다란 웃음이 피어올랐다.

* * *

예로부터 청색과 보라색은, 제국에서는 가장 위대하고 높은 권위를 상징하는 색이었다.

그렇기에 황제의 집무실은 온통 푸른빛이 가득했다.

바닥에는 사파이어 원석이 군데군데 박힌 청색 대리석이 깔렸고, 벽지 또한 쉽게 구할 수 없는 파란 실크였으며 천장의 벽화마저도 바다와 하늘을 형상화한 그림이었다.

한쪽 벽면에는 정교하고 화려한 금빛 술이 수도 없이 달린 커다란 보랏빛 휘장이 달렸는데, 그 아래에는 이글대는 태양을 움켜쥔 웅장한 사자상이 놓여 있었다.

그 한가운데 묵직하고도 웅장한 마호가니 책상에 앉아 황제는 한동안 우두커니 생각에 잠겼다.

단숨에 골치 아픈 일을 해결했고, 신뢰를 얻었고, 공을 세웠다.

많은 사람이 평생에 걸쳐 도전하는 일이건만, 그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모든 일을 해냈다.

게다가 모든 과정이 아무 막힘 없이 물 흐르듯 매끄럽기까지 하다.

혹시 수작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해도, 보여 준 결과가 이 정도로 훌륭하다면 그것은 능력이라 불러야 함이 옳지 않은가.

황제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서기관.”

“네, 폐하.”

멀찌감치에서 대기하고 있던 서기관이 부름에 즉시 일어섰다.


“오랫동안 미뤄 두었던 제국 사절단의 명단을 지금 확정해야겠군.”

“말씀만 내려 주십시오.”

이미 서기관은 고급스러운 양피지와 잉크를 찍은 펜까지 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에크레투스 성기사단의 단장인 레어넌 베르하르트와, 대주교 에리다누스 그레시안.”

사각사각. 펜촉이 매끄러운 표면 위를 거침없이 움직이는 소리가 고요한 방안에 울려 퍼졌다.


“갈리테아 후작가의 에드나 갈리테아와, 오베론 백작가의 벨페어 오베론. 그리고…….”

여기까진 황실에 적을 둔 사람이라면 대부분 예상했을 이름이었다.

서기관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 가만히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메이레드 백작가의 로렐라 메이레드.”

한 점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고요를 뚫고 비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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