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이 장르는 로맨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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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이 장르는 로맨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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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이 장르는 로맨스니까
2022.07.02.
장미 정원을 벗어나 황궁 안으로 통하는 문 근처에 다다른 나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아휴.”
뛰는 거나 다름없는 빠른 걸음으로 오다 보니 어느새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후우, 여기까지 쫓아오진 않겠지.”
갑자기 본인 아들이랑 결혼해 달라니. 무슨 뜬금없는 말씀을…….
몇 번이고 돌려서 거절해 봤지만, 노먼 미드레이 남작께서는 상당히 끈질겼다.
심지어 나중엔 모른 척 가만히 있던 에이든 미드웨이도 은근하게 거들었다. 다른 의미는 없다며, 거래가 성사된 기념으로 식사하지 않겠냐고 제안한 것이다.
그 말에 남작은 ‘그렇지, 그렇지!’ 하며 기쁘게 손뼉을 쳐 댔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오는 것뿐이었다.
“분위기가 그런데, 다른 의미가 없다니. 그게 말이 돼?”
투덜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띵동!
「‘일처다부제’ 님이 로렐라 님의 주식을 20만 주 구매합니다.」
「언니, 난 진지하게 언니가 이 세상의 모든 영 앤 핸썸 톨 앤 리치 가이들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
“아, 또 뭐래……!”
나는 미간을 찡그리고는 황급히 창을 껐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우아한 선율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저 복도일 뿐인데도 시종들은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시끄러운 곳을 피해 담소를 나누고 있는 손님들도 곳곳에 보였다.
나는 다시 무도회장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레어넌이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탓이었다.
그러다 곧 저 멀리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는 기둥 뒤로 슬쩍 숨었다.
멜로즈 백작 부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무서운 얼굴로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가면도 쓰고 있지 않았고, 연회장 쪽에서 나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무도회에 참석할 기분이 아닌 모양이다.
사실, 참석할 기분이 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분노에 찬 숨소리가 기둥 뒤까지 생생히 들려왔다.
잠시 후, 다시 복도 밖으로 슬쩍 몸을 빼낸 나는 저 멀리 작아진 부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혀를 찼다.
“이를 어쩌나.”
이제 시작일 뿐인데.
곧 뒷목 잡고 쓰러질 일이 닥쳐올 거다. 물론, 그녀가 쓰러지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다시 회장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멈춰서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누군가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정원으로 나가기 전 잠시 가면을 맡겨 두었던 시종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로렐라 님.”
귀찮긴 하지만, 안에선 꼭 가면을 써야 한다니 하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뒤, 얼른 얼굴에 썼다.
연회장 안은 평소와는 다르게 살짝 어두웠다.
은은한 샹들리에 불빛 아래, 사람들은 보석이 잔뜩 박힌 화려한 가면을 쓴 채 우아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풍경을 잠시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았다. 음악에 맞추어 빙그르르 도는 풍성한 치맛자락이며 빛을 반사해 더욱 반짝이는 보석 덕분에 별세계에 온 기분까지 들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곤 안으로 들어섰다.
비록 모두가 얼굴을 반쯤 가린 상태긴 하지만, 레어넌을 찾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곧게 편 단단한 등 뒤에서 하나로 길게 묶어 부드럽게 흔들리는 금발만 찾으면 되니까.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리며 사람들 사이를 헤쳐 걷는데, 누군가가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로렐라.”
“단자…….”
반가운 마음에 활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돌린 것도 잠시.
“……어?”
도무지 믿을 수 없어서 멍하게 벌린 입술 사이로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어라?!”
하지만 손의 주인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데서 다 만나네.”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한 가면 속,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 * *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네가 왜 여기서 나오는 건데?!
나는 이 말을 속으로 삼키며 위너드가 이끄는 대로 따라 걸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타나 반신반의했지만, 이리저리 뜯어봐도 역시 위너드였다. 얼굴의 반을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있어도 확신할 수 있었다.
가면무도회를 위해 화려하게 치장한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도 그는 단연코 돋보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범상치 않은 화려함을 자랑하는 의상과 마치 자신이 무도회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무척이나 당당한 태도.
얼굴을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그를 주목할 정도였다.
“왜 갑자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냐고 물으려던 때였다.
한 곡이 끝나자마자 악단이 새로운 곡을 연주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일 정도로 달콤한 선율이 회장에 가득 퍼졌다.
“로렐라 메이레드 님.”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부른 위너드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응?”
“저와 춤추시겠습니까?”
마치 유혹하듯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그러나 태연한 목소리와는 달리 줄곧 맞잡고 있던 손이 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다.
“하, 하지만…….”
“가면무도회는 흔치 않으니까.”
쉽게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위너드가 자연스럽게 나를 리드했다. 우리는 금세 음악에 맞춰 춤추는 사람들 사이로 섞여들었다.
“너와 정식으로 춤출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자, 잠깐. 나는 춤은…….”
“걱정 마. 네가 춤을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어.”
위너드는 다정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던 사람이라는 사실도.”
그 말에 뻣뻣하게 굳어 있던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마찬가지로 힘이 잔뜩 들어가 있던 다리도 어느새 그의 리드에 이끌려 어색하게나마 움직였다.
“그래, 잘하네.”
비로소 위너드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곧 웃음기를 빼고는 진지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로렐라, 내 앞에선 연기할 필요 없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편한 대로 너를 보여 주면 돼.”
그 말을 듣자 가슴 속이 묘하게 뜨거워졌다.
동시에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해지고, 즐거운 기분이 차올랐다. 그래, 그는 나의 본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어디 그뿐이랴. 내가 되려 하는 ‘주인공’이라는 목표를 유일하게 이해해 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개를 들자, 다정다감함을 잔뜩 담은 눈동자가 천천히 부드럽게 시선을 맞춰 왔다.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머릿속에 쉼 없이 소용돌이쳤다.
무도회의 분위기는 무르익어 주변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나는 해선 안 되는 행동을 한 사람처럼 급히 생각을 지우려 애썼다.
경쾌한 음악을 따라 몸을 움직이면서도, 한편으론 가득한 사람들을 보며 불안감이 차올랐다.
얼굴을 가렸다고 해서 안심해도 되는 걸까? 그동안 위너드의 정체를 숨기느라 무척 고생했는데…….
“혹시 이러다 레어넌 단장님이 보시면 어쩌지…….”
근심 어린 혼잣말을 중얼거린 찰나.
“……보라지.”
“얼굴을 가리긴 했지만, 머리나 체격에서 티가 날 수 있으니까…… 뭐?”
불퉁한 대답에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가면을 썼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 집중해.”
위너드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능숙하게 몸을 움직였다.
나는 다른 곳에 눈을 돌리는 것조차 잊게 되었다. 그의 유려하고 그림 같은 리드에 그저 감탄만이 흘러나왔다.
정식으로 춤을 배운 적 없는 나를 데리고, 이 정도로 문제없이 춤을 추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위너드 앞에선 내가 춤에 서툴다는 걸 숨기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편해서 그렇게 느끼는 건가 싶었는데, 주변을 조금 살펴보고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도회장에 있는 귀족들은 다들 능숙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기본 소양으로 춤을 배웠을 테니까.
그런데 위너드는 그들 사이에서도 뒤처지지 않고 오히려 더 돋보였다.
레어넌도 춤을 잘 췄는데, 어쩌면 위너드는 그보다 더 잘 추는 게 아닐까?
“위너드.”
“응?”
“왜 이렇게 춤을 잘 춰? 혹시 배운 적 있어……?”
네 정체는 대체 뭐냐고 묻고 싶은 걸 꾹 참고 물었다.
“물론 배웠지. 지겨울 정도로.”
그러고 보니 펠리어트가 검술을 배운 적이 있냐고 물었을 때도 위너드는 똑같은 대답을 했다.
“검술만이 아니라 춤도 배웠다고? 왜?”
“배워야 해서 배웠지. 어쩔 수 없으니까.”
또다시 알쏭달쏭한 대답이 돌아왔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위너드, 대체 넌…… 누구야?”
나는 자리에 우뚝 선 채 물었다. 그러자 그의 몸짓도 나를 따라 그대로 멈췄다.
“알고 싶어?”
신록 위로 태양 빛이 내려앉은 듯, 그의 녹안이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밝게 빛났다.
“응.”
그 눈동자에 가만히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어머, 미안합니다.”
갑자기 멈추었기 때문인지 곁에서 춤을 추던 한 여인이 그와 가볍게 부딪혔다.
“혹시 제가 발을 밟진 않았나요?”
당황한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그제야 우리가 있는 곳이 이런 대화를 나누기엔 썩 좋지 않은 장소라는 걸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위너드는 그녀에게 정중히 사과하고는 나를 조심히 이끌었다.
“로렐라, 저쪽으로 가자.”
그 뒤를 따라 자리에서 벗어나려는데, 저 멀리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레어넌 단장이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걸 보니 나를 찾고 있는 듯했다.
“위너드, 난 이제 가야겠어.”
주변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말을 방해했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여태 나를 기다렸을 것이 생각나 얼른 그에게로 가려는데, 위너드는 여전히 내 손을 놓아 주지 않았다.
“왜?”
“왜냐니, 저기에…….”
나는 순간 급히 목소리를 낮췄다. 레어넌이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불안과 당황이 차올랐다.
레어넌은 누구보다 날카로운 눈썰미를 지닌 사람이다. 가면을 쓰고 있다고 해서, 그가 위너드를 알아보지 못할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위너드의 손을 잡고 중앙자리에서 벗어나는 것도 모자라, 커다란 조각상이 놓인 구석으로 그를 허둥지둥 밀기 시작했다.
“왜, 왜 그래?”
“레어넌 단장님이 오셔서…….”
“뭐라고, 로렐라? 잘 안 들려.”
영문도 모른 채 조각상 뒤로 떠밀린 위너드가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으앗.”
레어넌이 오는지 보느라 뒤를 확인하던 순간, 그의 어깨를 밀던 손이 삐끗해 옆으로 빗겨 나갔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허공을 휘젓던 팔로 본의 아니게 위너드의 목을 감고 말았다. 동시에 위너드도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나를 단단한 손으로 받쳤다.
“조심……!”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따듯한 숨결이 입술을 간질였다. 말캉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 위를 미끄러지듯 스쳐 지나갔다.
순간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딸칵.
단단한 가면끼리 서로 부딪치는 소리만이 귓가에 들려왔을 뿐.
“헉.”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당황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미, 미안!”
나는 큰 소리를 냈다는 것도 잊고 다급히 위너드의 품에서 벗어났다.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도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파도처럼 빠르게 밀려오는 민망함,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재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까지.
아무 때나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안내자인 그를 피해 달아난다거나, 숨는 건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 순간만큼은 그 사실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굳은 채 서 있는 위너드를 놔두고 그대로 줄행랑쳤다.
* * *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소네아산 정상.
생명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그곳에, 한 남자가 마치 유령처럼 홀로 서 있었다.
대체 얼마나 있었던 건지 어깨와 머리 위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서 있기도 힘든 매서운 강추위였지만, 위너드로선 머리를 차갑게 식히기 위해 이만한 곳이 없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그의 머릿속에 가득 지펴진 열기는 좀처럼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위너드는 멍한 얼굴로 자신의 입술을 문질렀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끝에 온기가 감도는 기분이었다.
깃털처럼 가볍고 부드러웠던 입술이 닿았던 그 순간처럼.
「좋단다. 짜증 나게.」
「기껏 안내자로서 기회를 줬더니, 연애질이나 하고 앉았어?」
반투명한 창 위로는, 온갖 비난이 이어졌다.
그러나 호선을 그린 위너드의 입가는 좀처럼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미친놈아! 주인공 후보가 연애질에 빠져 희희낙락이라니!」
급기야는 험악한 욕설까지 쏟아졌다.
“아, 그게 언제 이야기야. 끝난 일이잖아.”
그러나 위너드는 위축되긴커녕,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그리고 여기 장르는 로맨스라니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목소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