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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미안합니다! (104/173)


104화. 미안합니다!
2022.06.29.



 


“화해란 게 별건가요.”

의심 반, 불쾌감 반으로 가득 찬 노신사들의 눈빛에도 로렐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두 가문 사이에 중단된 거래를 재개한다면 그게 바로 화해죠.”

제법 험악한 분위기였는데도 그녀의 입에는 아름다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먼저 화를 낸 것은 메비앙 남작이었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저자와 다시 거래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거요!”

“내가 할 말을. 메비앙 가문과 손을 잡는 일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절대로 없어!”

“음, 두 분 다 속단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나요?”

강경한 두 사람의 태도에 로렐라가 고개를 작게 저었다.


“나중에 말을 번복하면, 부끄러우실 텐데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당당한 건지, 두 노신사는 너무 황당해 말문이 막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로렐라 메이레드의 행동은 분명 선을 넘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 무도회에서 상황도 모르고 두 사람을 중재하려 들었으니, 좋은 이야기가 나올 리도 없었다.

어쩌면 온 사교계가 그녀를 손가락질하는 일로 번질 수도 있는데도 로렐라는 자신 있다는 듯 미소 지었다.

아니, 실제로도 그녀는 자신 있었다.

이기지 못하면 죽는, 서로의 목숨이 걸려 있는 라이벌인 세이블과도 지금 같은 사이가 되지 않았나? 달빛 아래서 소름 끼치게 웃던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그러니 세상에 ‘절대’라는 건 절대로 없다니까.

로렐라는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센우드 백작님. 메비앙가와 정말로 거래를 끊게 되면, 와인 숙성에 큰 차질이 생길 텐데요. 특히 올해 수확한 포도의 품질이 몹시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훌륭한 와인으로 빚어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망쳐 버릴 셈이세요?”

“그건 다른 거래처를 찾으면 되는 일이오. 오크통을 만드는 곳이 메비앙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메비앙가처럼 질 좋은 참나무로 만드는 곳은 찾기 어렵죠. 그래서 대대로 메비앙가와 거래해 온 거 아닌가요?”

무언가를 반박하려는 듯 달싹이던 백작의 입술이 순간 그대로 굳었다.

로렐라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메비앙 남작을 향해서였다.


“남작님께선 새 거래처를 찾으셨다고 들으셨습니다. 제국에서 가장 큰 무기상이라지요?”

“그렇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그들이 내년에도 같은 양을 발주하겠다고 했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그건…….”

메비앙 남작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혹시 다른 말을 하지는 않던가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전처럼 많은 양을 발주할 수는 없을 텐데요.”

로렐라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애꿎은 크라바트만 만지작거리는 메비앙 남작을 향해 능청스럽게 두 눈을 깜빡였다.


“물론 제 짐작일 뿐이지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에 기반한 추측이었다.

그 무기상은 레어넌 기사단장도 잘 알고 있는 자였기에 로렐라도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전쟁 중 파손된 창과 활, 그리고 검 따위를 새로 만들기 위해 성기사단에서도 대량의 의뢰를 했단다.

하지만 이제 전쟁은 끝났다.

내년에도 같은 양의 무기를 주문할 거냐는 물음에 잠시 생각하던 레어넌은 즉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기사단은 계속해서 훈련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무기가 손상되는 일도 있겠지만, 그래 봤자 전쟁 때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라고.

즉, 무기상이 메비앙 가문의 큰 거래처가 된 건 단기적인 효과로 그칠 수밖에 없단 소리였다.


“센우드 백작님, 그리고 메비앙 남작님.”

로렐라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두 사람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제가 긴 시간 사교계에 있었던 건 아니지만, 두 분의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가문을 이끄는 가주로서의 능력은 실로 존경스러울 정도라고요.”

“…….”

“그런 분들께서 단지 일시적인 불화가 생겼다는 이유로, 가문에 큰 손해를 끼칠 일을 계속 고집하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녀는 일부러 말을 멈추고 뜸을 들였다.

그러자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격하게 반발하던 처음과는 달리, 로렐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확실히 두 분의 거래에는 약간의 안전장치가 필요해 보이긴 합니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안전장치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센우드 백작이었다.


“제가 두 분의 중간 다리가 되어 드리겠어요.”

로렐라는 멍하게 자신을 보는 두 사람 앞에 돌돌 말린 문서를 내밀어 보였다.


“불화의 직접적인 원인은 거래 파기였지만, 그 전부터 크고 작은 문제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대금이 약속했던 날짜보다 늦게 지급되거나, 물품이 간혹 잘못 도착했다거나 하는 일들 말이에요.”

그 말대로 두 가문은 거래하는 동안 조금씩 삐걱거리는 부분이 존재했다. 말하자니 좀스러워 보이고, 말하지 않기에는 거슬리는 점들이 산재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질 좋은 오크통을 만들기 위해선 제대로 된 일손과 수고가 필요하니, 메비앙 남작님으로선 대금이 밀리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셨겠죠. 앞으로는 제가 중간에서 대금을 책임지겠습니다. 먼저 돈을 받으신 후에 제작하시면 될 테니 위험 부담은 훨씬 적어지겠죠?”

“그거야…….”

메비앙 남작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녀의 말대로 확실히 중간에 책임 져 줄 사람이 있다면, 그로서는 손해 볼 일이 없었다. 그러나 단박에 동조하기도 힘들었다. 미심쩍은 부분이 남아 있는 탓이었다.

오늘 처음 본 이 영애를 과연 믿어도 될까?

마치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로렐라가 재빨리 문서를 뒷장으로 넘겼다. 그러자 종이 위에 찍힌 두 개의 커다란 인장이 보였다.


“제 말만으로는 신뢰를 드리기 어렵겠죠. 솔직히 말해, 두 분이 처음 본 저를 어떻게 믿으시겠어요? 그래서 믿을 만한 분들의 보증을 받아 왔어요.”

“레어넌 베, 베르하르트 단장님과…….”

메비앙 남작이 인장을 알아보고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브라운베르크 백작님?!”

그 말에 아까부터 발코니에서 남몰래 귀를 기울이고 있던 황제의 눈 또한 몹시 크게 뜨였다.

레어넌 단장과 로렐라 영애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브라운베르크 백작까지?

내가 아는 백작은 이런 일에 쉽게 발을 들일 사람이 아닌데?


“두 분께서 동의하신다면, 브라운베르크 백작님께서 몸담고 계신 중앙 의회에 이 계약서를 정식으로 등록하려고 해요. 그러면 법적인 효력이 생기니, 여러분들은 물론 제게도 위험 부담이 줄어드는 셈이죠.”

황제는 그 순간 자신이 알고 있는 브라운베르크의 모습이, 그의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중계를 맡아 드리는 대신, 두 분께서는 제게 소정의 수수료를 지불해 주시면 됩니다. 안전을 위한 대가로요.”

“……수수료라. 그래, 결국 우리를 통해 장사하겠단 소리군.”

센우드 백작은 여전히 불쾌한 듯 뚱한 표정이었다.


“게다가 영애의 제안은 메비앙 가문에게만 유리한 것 아니오? 만약 내 돈을 전부 받고도, 차일피일 작업을 미룬다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거지?”

“아, 한 가지 오해하신 것 같은데…….”

로렐라는 얼른 백작을 향해 말했다.


“메비앙 남작께 드리는 대금은 모두 제 돈으로 할 예정입니다.”

“뭐, 뭐라고?”

“백작님께선 물건을 받고 모든 것이 이상 없다는 걸 확인하신 뒤에 제게 대금을 주시면 됩니다. 그전까진 돈을 쓰실 일이 없죠. 대금을 지불했는데 물건이 제대로 오지 않을까 걱정하실 필요도 없고요.”

그러나 센우드 백작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영애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진 모르겠지만, 한 가지 간과하신 것 같군요.”

“그게 뭔가요?”

“와인 숙성 통은 꽤나 비싸오.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이번 일이 발생한 건 내가 대금을 기한 내에 지불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그 정도로 적지 않은 금액이었단 소리요.”

그렇지.

황제는 저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맞장구를 쳤다.


“미안한 말이지만, 메이레드 백작가에서 그 큰 금액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군.”

로렐라 메이레드로서는 조금 기분이 상할 수도 있겠으나, 이런 커다란 거래의 중간 다리를 직접 맡기에는 자격이 많이 모자란 듯 보였다.

아무리 레어넌 기사단장과 브라운베르크 백작이 보증한다고 해도 말이다.

만약 토지라도 있다면 그걸 담보로 돈을 빌리거나, 아니면 봄에 영지민으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여 일을 진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메이레드 가문은 영지 같은 건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물론 사업을 벌여 적당히 품위를 유지할 정도의 생활은 가능할지 모르나, 이런 일에 큰돈을 쓸 만큼의 수준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사교계는 물론, 황실에까지 이름이 들려왔을 테니까.


“걱정하시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물론 메이레드 가문에 그런 돈은 없지요. 그래서…….”

로렐라가 수줍게 웃으며 또 다른 서류를 그들의 눈앞에 보여 주었다.


“상당한 거물께서 투자해 주기로 하셨답니다!”

“상당한 거물……?”

두 사람의 시선이 빠르게 서류 위를 훑었다. 종이의 하단에는 무척이나 눈에 익은 가문 인장이 찍혀 있었다.

로렐라는 보란 듯이 더 환하게 웃어 보였다.


“릴리 후작가의 실세! 세이블 릴리 님께서 이 사업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계시거든요.”

……세이블 릴리가?

저, 정말?

두 사람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눈으로 서류를 꼼꼼히 살폈다. 하지만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서류에 찍힌 건 릴리 후작가의 인장이 맞았다. 심지어 그 밑에는 친필 사인까지 있었다.

혹시 조작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스쳐 지나갔지만 곧 지워졌다. 황궁 한복판에서, 두 가문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바보는 없을 테니까.

게다가 이미 레어넌 베르하르트와 브라운베르크 백작까지 보증하지 않았나.


“그리고 수수료 말인데요. 금액을 책정하기에 앞서, 먼저 센우드 백작님께 한 가지 좋은 제안을 드릴까 하는데…….”

로렐라는 말을 하다 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반갑다는 듯 활짝 웃으며 누군가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 마침 저기 오시네요. 여기예요!”

모두의 시선이 그녀가 바라보는 곳으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인사를 드립니다.”

차분한 회색 망토를 두른 노신사와 그를 무척이나 닮은 한 젊은 청년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인사 나누세요. 노먼 미드레이 남작님과 에이든 미드레이 님이세요.”

“아, 예에…….”

이 사람들은 또 누구지?

센우드 백작의 살짝 찡그려진 눈매가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때, 노먼 미드레이가 눈을 빛내며 얼른 앞으로 나섰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센우드 백작님, 와이너리에서 폐기 처분되는 숙성 통을 저희에게 파시지 않겠습니까?”

“네?”

그 말에 센우드 백작은 또다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먼저 소개부터 올렸어야 하는데 무례를 저질러 죄송합니다. 저희는 아우레아 남쪽의 곡창 지대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그곳에서 나는 옥수수로 위스키를 만들어 수출하고 있지요.”

“아, 저도 들어 본 적 있습니다. 요즘 꽤 화제인……. 이런, 미처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센우드 백작은 미드레이 남작에게 비로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곧 재차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폐기 처분하는 통은 왜 사려고 하시는 겁니까?”

“외국에서 와인을 저장했던 통으로 2차 숙성을 거친 위스키가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답니다. 여태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주조 방식이라 반신반의했는데 시음을 해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무척이나 향이 풍부하고, 목 넘김이 아주 부드러워서 마시기 편하더군요.”

“호오, 그런…….”

“그동안은 전쟁 때문에 나라 밖의 유행을 좇아갈 정신이 없었고, 또 판로도 많이 줄어들었지만, 이제는 달라질 겁니다. 위스키 품질만큼은 자신 있으니 수출해 보려고 준비하고 있지요.”

“그렇죠. 그렇지요. 안 그래도 저 역시 수출용 와인을 생산해 볼까 계획 중이긴 합니다만…….”

센우드 백작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흥미를 보이자, 에이든이 재빠르게 본론을 꺼냈다.


“백작님, 숙성 통 하나당 금화 다섯 닢을 드리겠습니다. 어떠십니까? 물론 수거 및 운반 비용도 저희 쪽에서 전부 지불하겠습니다.”

센우드 가문의 와인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온 제국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그처럼 훌륭한 와인을 빚은 숙성 통의 가치는, 위스키 주조에서도 당연히 빛을 발할 것이다.

즉, 이 정도 투자를 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단 소리였다.


“네? 그, 그렇게나요?!”

센우드 백작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와이너리에 잔뜩 쌓여 있는, 버려야 할 통들이 대체 얼마나 되는지 간추려 보기 위함이었다. 못해도 수백 개는 넘는 듯했다.

무거운 통들을 폐기하려면 그걸 운반할 인부부터 짐수레까지 불러야 해 돈이 많이 드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쌓아 놓았다.

당장 대금을 치르지 못할 정도로 자금 운용이 어려워진 터라, 그런 일에 돈을 낭비할 순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걸 그냥 처리해 주는 것도 아니고 돈까지 주고 사 가겠단다.

이건 고민하긴커녕, 제발 그렇게 해 달라고 손을 잡고 빌어도 모자랄 일 아닌가!


“거래하겠습니다!”

그래서 센우드 백작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처음 만난 미드레이 남작의 손을 진짜로 덥석 잡으면서.

예상대로의 반응에, 로렐라가 그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때였다.


“수수료 거 얼맙니까?!”

센우드 백작이 갑자기 그녀 쪽으로 홱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네?”

“팍팍 붙여요! 아끼지 말고!”

그 말에 메비앙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로렐라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동안 센우드 백작의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와이너리 사업은 가문의 대들보나 다름없었을 텐데, 숙성 통 값을 내지 못할 정도였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형편이 어려웠다는 증거니까.

어쩌면 그에겐 수수료를 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부담스러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미드웨이 가문과 연결을 시켜 준 것이었다.

당장 숨통이 트이고도 남을 돈이 눈앞에 굴러들어오면, 먼저 이성을 가지고 차분히 계산하기보다는 일단 조여 맸던 허리띠를 확 풀어 버리고 싶은 게 사람 심리니까.

그런 술이 외국에서 유행 중이라는 이야기를 가게의 손님으로부터 전해 듣고, 슬쩍 에이든 미드웨이에게 사업 제안을 해 본 것이 신의 한 수라면 한 수였다.


“자, 그럼 이제…….”

로렐라는 우두커니 서 있는 두 노신사를 번갈아 바라보며 예쁘게 웃었다.


“두 분 화해하신 거죠?”

“어, 그, 그게…….”

“그러니까…….”

두 사람은 아까 했던 말이 생각나는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뭐, 여기까지 했는데도 죽어도 화해 못 하시겠다면, 황……. 아니, 저도 어쩔 수 없고요.”

그녀는 황제 폐하가 와도 안 되겠네요, 라는 말을 하려다 급히 정정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분명 발코니 위의 상황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센우드 백작과 메비앙 남작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사과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방금까지 상대를 향해 퍼부었던 악담들이 떠올라 부끄러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로렐라는 보란 듯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어쩔 수 없군요. 그렇다면 그냥 다 없던 이야기로 하겠…….”

“어허! 자, 잠깐!”

“누가 안 한다고 그랬습니까, 누가!”

그녀가 몸을 돌리는 척하는 동시에 두 신사가 다급하게 손을 휘저었다.


“그동안 내가 어리석었소. 로렐라 영애 덕분에 겨우 깨달았군요. 정말 미안합니다!”

“저도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내가 미안하다니까요!”

“아니, 제가 더……!”

또다시 옥신각신하던 두 사람은 이내, 미드레이 일가와 로렐라를 앞다투어 모셨다. 안에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서 말이다.

한데 노먼 미드레이가 자못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메이레드 영애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 후에 다시 뵙는 걸로 하지요.”

이야기를 나눈다고?

……무슨 이야기?

로렐라가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연신 인사를 건네던 센우드 백작과 메비앙 남작이 자리를 뜨자마자 노먼 남작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으며 외쳤다.


“로렐라 영애!”

“네, 네?”

“내 이렇게 부탁드리겠소. 아들과 혼인해 주지 않겠습니까!”

“네!?”

 

 


“이야기는 모두 들었습니다. 지혜로울 뿐 아니라 그 험악한 분위기에서도 당당하기까지 하다니. 제 아들 녀석이 조금 모자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심성만은 착하답니다!”

“아, 아니 그…….”

로렐라는 황당함을 숨기지 못하고 에이든 미드레이를 바라보았다.

제 아버지의 급발진을 응당 막아야 하건만, 왜인지 그 또한 그저 모른 척 서 있는 게 아닌가?


“내 정신 좀 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내일 우리 저택에서 함께 식사라도 합시다! 아내도 분명 무척이나 좋아할 겁니다.”

“아, 아니 잠깐…… 진정하시고…….”

“진정할 게 따로 있지요!”

노먼 미드웨이의 외침은 화끈하고 직설적이었고, 눈동자 또한 노골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황제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저런 고얀!’

감히 누구를 넘보는 건가!

저런 인재라면 응당 황태자의 배필이 되어야 할…….

하지만 황제는 순간 생각을 멈추고는, 낭패 서린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아, 나는 아들이 없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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