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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지금 뭐라는 겁니까? (103/173)


103화. 지금 뭐라는 겁니까?
2022.06.25.



 
황궁의 가면무도회는 해가 진 뒤에 열리는 게 오랜 전통이었다.

마치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화려한 보석 가면들과, 그에 맞춘 아름다운 의상을 돋보이게 하려면 낮보다는 밤이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전쟁 동안에는 이런 사치스러운 연회가 모두 중지되었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어졌다. 아니, 제국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오히려 권장되었다.

오랜만에 열리는 성대한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열과 성을 다해 치장했다. 전쟁 직후였던 승전 기념 무도회에 참석할 때보다 공들여 꾸민 이들도 많았다.

덕분에 아름다운 가면을 쓴 채 등장하는 사람마다 화려하기 그지없어서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들뜬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듯, 황궁의 성벽에도 은은한 빛을 발하는 수많은 램프가 걸려 있었다.

탑 아래에도 원래 매달려 있던 황실의 국기 대신 중간중간 보석을 박아 놓은 길고 투명한 천이 달렸다.

긴 천이 바람에 흔들릴 때면, 밤안개 같기도 하고 달무리 같기도 한 희끄무레한 너울 사이로 색색의 빛이 반짝거렸다.

그 신비로운 분위기 덕분에 연회가 시작되기도 전인데 사람들의 기대감은 잔뜩 부풀어 올랐다.


“어서 오십시오.”

마차에 내려 사람들을 따라 입구 쪽으로 걷자 평소보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문지기가 다가왔다.


“실례지만 초대장을 먼저 보여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여기 있어요.”

나는 미소와 함께 그에게 초대장을 보여 주었다. 혹시 위조된 것은 아닌지 꼼꼼히 확인한 문지기는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렐라 메이레드 님.”

그를 지나쳐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니, 황실의 시종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에스코트해 주었다.


“황궁은 늘 아름다운 곳이지만, 오늘은 더더욱 근사하네요.”

“감사합니다, 로렐라 님. 오늘 연회도 맘껏 즐겨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연회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누군가가 불쑥 앞을 가로막았다.


“멈추십시오. 로렐라 님은 이제부터 저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마치 협박과도 같은 말투였지만 목소리에는 장난기와 더불어 다정함이 한껏 스며 있었다. 앞을 막아선 이 역시 가면을 썼으나, 차마 숨길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등 뒤에서 흔들리는, 하나로 묶은 금발이었다.


“어머나, 지금 황궁 한복판에서 절 납치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자 분위기를 살피던 시종이 이내 눈치껏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평소 같으면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함께 왔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내가 부탁한 것을 미리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나는 레어넌과 나란히 황궁의 복도를 걸었다.

복도 구석구석에도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장식이 놓여 있었다. 귀하디귀한 파란 장미와 보석이 박힌 티아라를 쓴 커다란 여신상이 특히 눈에 띄었다.

덕분에 내내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대단하네요. 너무 아름다워요.”

“글쎄요……. 제 눈에는 별로 들어오지 않는군요. 솔직히 말해, 제가 가면무도회를 싫어해서 그런 듯도 합니다.”

‘그날’ 이후 레어넌은 꽤 싫다는 표현을 자주 했다. 내 심장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 말만 들으면 두근거렸고.


“왜, 왜…… 가면무도회를 싫어하세요?”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까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한 채 물었지만, 대답을 듣자마자 입에서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왜 그러시죠?”

레어넌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없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도 아닌데.”

멍하니 입술을 벌린 나와는 달리, 화려한 가면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에는 여전히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놀리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는지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워, 원래 레어넌이 이런 캐릭터였나? 아니면, 변한……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좀, 변한 게 맞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싫기는커녕…… 문득문득 생각난다는 게 문제다. 특히나 홀로 있을 때면 더더욱.

계속 허둥지둥 갈팡질팡하는 새, 어느덧 회장 근처에 도착했다.


“저기 있군요.”

레어넌이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머리가 희끗희끗한 한 노신사가 보였다. 바로 메비앙 가문의 가주, 라이언 메비앙 남작이었다.

그리고 그와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노골적으로 남작을 노려보고 있는 남자 또한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이 콜먼 센우드 백작이겠죠?”

“그렇습니다.”

나는 짧은 시간 동안 사교계를 통해 모은 각종 정보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메비앙 가문과 센우드 가문은 사실 예전에는 무척 사이좋은 비즈니스 파트너였다고 한다.

제국에서도 이름날 만큼 훌륭한 와인을 생산해 내는 와이너리를 소유한 센우드 가문과 참나무로 가득한 영지에서 질 좋은 와인 숙성 통을 만드는 메비앙 가문이 대대로 거래해 온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한 이후부터, 둘의 사이는 삐걱대기 시작했다. 귀족들이 파티나 연회를 자제하면서 센우드의 와인 판매량이 형편없이 줄어든 것이다.

전쟁은 하루 이틀로 끝나지 않았다. 2년이라는 짧고도 긴 시간 속에서 센우드 가문은 갈수록 쇠락했고 결국 새로 구입한 숙성 통의 대금을 지불하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와인이 팔리지 않으면 곤란한 것은 메비앙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쉽게 해결되지 않으리라 생각한 메비앙 남작은 발 빠르게 다른 길을 모색했다.

그러다 운 좋게도 커다란 무기상과 인연이 닿아 그쪽과 거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에 필요한 창이나 활대를 만들려면 질 좋은 나무가 필요하니까.

활로가 트인 메비앙 가문은 곧장 센우드 가문과의 거래를 일방적으로 끊어 버렸다. 센우드 백작이 직접 찾아가 사정까지 해 보았지만 그들은 미리 주문을 넣어 놓았던 물량마저 취소했다.

메비앙 가문은 덕분에 전보다 더 큰돈을 벌게 되었지만, 센우드 가문에겐 뼈아픈 일이었다.

결국 센우드 백작은 어디를 가든 가문 대대로 내려져 오는 인연을 배신하고 이윤만을 좇아간 메비앙 남작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떠들고 다녔다.

그것도 모자라 없는 이야기까지 지어내고 사교 모임에서 마주칠 때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대니, 두 사람의 사이는 더 이상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보라, 지금도 마치 부모님의 원수라도 맞닥뜨린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연회 시작 전,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대기하시는 장소가 있습니다. 원래는 연회장에 붙어 있는 두 분의 휴게실로 모시는데 오늘은 왜인지 2층 발코니에 자리를 마련했다고 하더군요.”

레어넌은 내 귓가에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가면무도회니만큼 연회장 문이 아니라 발코니에서 등장하시면 모두가 즐거워할 거라는 조언이 있었다곤 하지만 의아한 일입니다. 발코니 좌우로 가림막을 치고도 정면만은 그대로 남겨 둔 것도 이상하고요.”

“그럼 장미 정원이 그대로 내려다보이겠네요.”

나는 조용히 그의 말을 받았다.


“……무도회 시작 전, 두 분을 모시고 와 달라고 부탁받은 곳 역시 장미 정원이에요.”

“역시 수상합니다. 화해를 바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해도,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의도한 장소인 건 분명한데, 황제 폐하의 눈이 닿는 곳에서 화해시킬 이유가……. 아.”

눈앞에 저절로 그림이 그려졌다.


“화해시키는 게 아니라 반대로 둘을 다투게 해 망신을 주려는 모양이네요. 그렇다면 이런 일을 벌일 만한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고요.”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낮게 가라앉았던 레어넌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걱정이 가득 깃들어 있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모든 진상을 알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당신이 괜한 일에 끼어들지 않아도…….”

“아니요.”

나는 그의 시선을 마주한 채 힘주어 고개를 저었다.


“황제 폐하가 지켜보고 계신다면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 잘된 일이죠.”

“하지만…….”

그러나 그는 여전히 불안하다는 표정이었다.


“걱정 마세요. 호락호락하게 이용당할 생각은 애초에 조금도 없으니까요.”

나는 그런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밝게 웃어 보였다.

* * *



“바람이 몹시 시원하군.”

“벌써 계절이 바뀌었군요. 시간이 참 너무나도 빨리 흐르는 듯합니다.”

“그러게 말이오.”

시종들이 이끄는 대로 2층의 발코니에 도착한 황제와 황후는,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평소와 다른 곳에 대기실이 마련된 터라, 음악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목소리가 쉼 없이 들려왔다. 오랜만에 열리는 연회의 기대감이 묻은 소리라 황제 부부는 그것이 매우 기꺼웠다.


“오늘 밤공기가 무척이나 좋군요. 춥지도 덥지도 않은 것이, 야외에 나와 있기에 매우 적격인 날씨입니다.”

“황송하옵니다, 황후 폐하.”

황후의 웃음 띤 눈짓에, 멜로즈 백작 부인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오늘 무도회를 위해 장미 정원도 한껏 꾸며 두었으니 만끽하실 수 있도록 2층으로 모셨는데, 마음에 드셨다면 다행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생각이오. 색다르기도 하고, 기분도 무척이나 좋군.”

“과찬이십니다, 황제 폐하.”

멜로즈는 내내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다소 비굴한 자세임에도 도무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 한껏 올라간 입꼬리가 그녀의 마음을 대변했다.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발코니에서 내려다보이는 장미 정원에는 커다란 아치가 하나 있었다. 바로 그곳으로, 로렐라 메이레드가 사냥감을 물어오기만 하면 된다.

센우드 백작과 메비앙 남작은 마주친 순간 기름 부은 장작처럼 화르륵 불타오를 것이 자명했다.

이미 그들의 저택엔 이름 없이 모욕적인 선물을 보내두었다. 누가 보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서로가 보냈으리라 오해하고 있을 것이다.

행여 아직까진 반신반의하더라도 여기서 얼굴을 맞닥뜨리면 그렇게 믿게 될 테고, 그럼 애써 눌러 놓았던 화도 함께 터질 게 틀림없었다.

결국 황제가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 추하게 싸움질을 시작하겠지.

설령 뒤늦게 이성을 찾아도 그때는 이미 늦었으리라.

화살은 즉시 싸움의 원흉이 된 로렐라 메이레드에게도 날아가겠지만, 힘도 능력도 없는 그녀가 무얼 할 수 있겠는가?

내세울 수 있는 거라곤 기껏해야 레어넌 단장의 관심을 받았단 것뿐인데.

아니, 오히려 레어넌이 그 여자에게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도 멜로즈에겐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이 스캔들을 일부러 크게 부풀리면, 레어넌 단장의 명성에도 분명 금이 갈 테니까.

사교계에서 손가락질당할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을 참기 힘들어 애써 표정을 관리하던 그때였다.

누군가가 장미 정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은 물론, 근처에 달아 놓은 수많은 램프 덕분에 남자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가면까지 벗고 있어 더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센우드 백작이었다.


“음?”

아니나 다를까. 야경을 감상하고 있던 황제가 즉시 그쪽에 관심을 보였다.

멜로즈 부인은 묵묵히 서서 초조하게 손끝을 튕겼다.

행여나 길이 엇갈리거나, 메비앙 남작이 도착하기도 전에 센우드 백작이 자리를 떠 버릴까 봐.

하지만 역시 기우였던 모양이다.

곧이어 두 사람의 인영이 나타났다.

먼저 정원으로 들어선 건, 붉은 머리를 휘날리는 로렐라 메이레드였다. 그녀의 옆에는 메비앙 남작이 서 있었다.

그들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가면을 벗고 있었다.

발코니와 장미 정원의 거리는 멀지 않아 말소리까지 똑똑히 들려왔다.


“저 불쾌한 낯짝을 이런 데서 보게 되다니.”

센우드 백작이 메비앙 남작을 보자마자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됐다! 성공이다!

멜로즈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필이면 저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요?”

메비앙 남작도 곧장 날카롭게 반응했다.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따라오긴 했지만…… 메이레드 영애. 이게 지금 대체 무슨 수작입니까!”

그는 로렐라를 향해 가시 돋친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그래, 그랬군.”

그런데 그때, 센우드 백작이 뭔가를 알았다는 듯 크게 혀를 차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서로 한 패면서 연기는 그만두시지. 어쩐지 처음 보는 영애가 말을 걸기에 수상하다 싶었는데. 정말이지 온갖 수를 다 쓰는군.”

그는 씩씩대며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집에 말의 채찍과 고삐가 담겨 있는 상자를 보낸 게 당신들 짓이지?! 선대께서 말에서 낙마해 돌아가신 것을 조롱하려고 말이야!”

“그건 오히려 내가 할 말이오! 엊그제 익명으로 하얀 백합을 보내고도, 이리 뻔뻔하게 나오실 겁니까? 내게 백합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설마 모르지는 않으실 테고!”

황제의 미간에 그어진 주름이 점점 깊어졌다. 의자 손잡이를 꽉 틀어쥔 손등에도 힘줄이 불거져 있었다.

이 모든 걸 놓치지 않고 확인한 멜로즈는 기뻐서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였다.


“누군가가 두 분을 자극하려고 그런 짓을 벌인 모양이군요.”

그때, 줄곧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서 있던 로렐라 메이레드가 으르렁대는 두 사람 사이로 걸어 나왔다.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붉은 머리와 싱그럽게 웃고 있는 얼굴이 발코니에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저는 누구의 편도 아니에요. 다만, 제가 두 분을 일부러 이 자리에 모신 것이 맞습니다. 두 분께서 화해하시길 바라는 마음에요.”

차분한 그녀와는 달리, 두 노신사는 무척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 그게 무슨……! 메이레드 가문이 우리에 대해 뭘 안다고 나서는 거지?”

“화해는 무슨 화해! 당신이 누구의 편도 아니라는 걸 믿지도 못하겠고, 설령 그렇다 해도 이런 행동은 도가 지나치군요. 젊은 영애의 치기 어린 행동이겠거니 하고 봐주진 않을 겁니다.”

“진정하시고 제 말을 좀 들어 보세요.”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지금 진정하게 생겼소?”

“제 말대로 하시면, 곧 화해하게 되실 텐데도요?”

“뭐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두 신사는 경악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놀란 것은 멜로즈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지금 뭐라는 거야, 저 미친 여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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