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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저 영애의 이름이 뭐였더라 (101/173)


101화. 저 영애의 이름이 뭐였더라
2022.06.18.



“폐하께선 아직 아무런 말씀도 없으신가?”

한 남자가 황궁 동쪽에 있는 커다란 방 안을 초조하게 서성거렸다.

작은 키를 감추기 위해 늘 쓰고 다니는 커다란 실크해트와 그 아래 쫙 찢어진 눈매, 그리고 그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위로 한껏 고불고불하게 말린 콧수염까지.

그는 멜로즈 백작 부인의 숙부이자, 가장 유력한 사절단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세르하드 후작이었다.

질책하는 듯 힐난이 섞인 어조에도 멜로즈 백작 부인은 표정 하나 변화 없이 답했다.


“네.”

“아니. 금방 결정될 거라고 하더니, 이리 더뎌서야……!”

그리고 새초롬하게 눈을 내리깔며 차를 홀짝였다. 이어진 말엔 대답할 필요를 못 느낀 탓이었다.

얼핏 들으면 혼잣말 같지만, 사실은 멜로즈 백작 부인을 질책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황궁의 시계는 참 느리게도 가는군.”

후작의 입에서는 노골적인 불만이 연이어 터졌다. 누가 들으면 불경하다고 생각할 만한 이야기가 섞여 있었는데도 멜로즈는 굳이 그것을 막지 않았다.

어차피 이 방 주위에는 아무도 얼씬하지 않으니까.

황궁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방이 존재했고, 그만큼 실제로 사용하지 않는 공간도 다수 있었다.

그들이 자리한 방도 그런 방 중 하나였다.

본궁에 있긴 하지만 무척이나 구석진 곳이었고, 다른 접견실이나 주요한 시설과도 동떨어져 황실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았다. 오죽하면 자주 오가는 귀족들조차 있는 줄도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재무대신인 브라운베르크 백작이나 아주 어렸을 때부터 황궁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던 레어넌 기사단장은 알고 있을지 몰라도, 그들에겐 고작 이런 구석진 방을 이용할 이유도, 관심 가질 이유도 없다.

하지만 멜로즈 백작 부인은 달랐다.

아무도 쓰지 않는 공간이라고는 해도, 황궁에 자리한 공간을 마음껏 쓸 수 있다는 게 그녀에게는 일종의 특권처럼 느껴졌다.

사용하는 이가 거의 없어 자신의 전용 접견실처럼 보이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불만 섞인 눈빛을 띠고는 있지만, 결국 아무런 토도 달지 못하고 순순히 이곳에 차를 준비해 주는 시녀장의 얼굴을 보는 것도 상당한 쾌감을 주었다.

황실에 수십 년을 몸담은 사람답게 시녀장은 일 처리가 야무지고 꼼꼼하기로 유명했다. 워낙 황궁 살림을 깔끔하게 잘하니 황후조차 그녀를 몹시 아꼈다.

그런 시녀장조차 자신에게 아무 말도 못 하다니!

자신이 황후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사적인 만남이나, 남들이 들어선 안 되는 이야기를 나눠야 할 때면 종종 이 방을 사용했다.


“근래 설탕이 품귀 현상을 빚은 일 때문에 황제 폐하께서 고민이 깊으셨답니다. 다른 일을 고려하실 수 없을 정도로요.”

찻잔을 내려놓은 멜로즈 백작 부인이 후작을 달래기 위해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다행히도 곧 해결될 것 같다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요. 숙부님.”

“고작 그런 일 때문에 이 중요한 결정을 늦추시다니.”

하지만 그의 심기는 여전히 불편해 보였다.

그 마음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후보는 세르하드 후작만이 아니니까.

멜로즈의 말대로 황제에게는 제국 내에서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우선 과제였다. ‘설탕’은 없으면 다른 걸 쓰면 되는 물건도 아니었으니 종일 이것에 매달리는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사절단을 꾸리는 일은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사안. 황제가 선뜻 결정을 내릴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세르하드 후작은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굴었다.

그저 결과가 미뤄질 때마다 다른 후보와 자기를 비교해서 저울질하느라 늦어지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장에 그 막대한 돈을 쏟아붓는 게 아니었거늘!”

급기야 그는 울분까지 터뜨렸다.

아무리 하녀들조차 한두 번 쓸고 닦는 게 전부인 곳이라고는 해도, 큰 소리를 내어서 좋을 게 없었다.

멜로즈는 그를 달랠 요량으로 차분히 말을 이었다.


“숙부님, 제가 요즘 황궁의 여러 사람을 만나는 건 알고 계시지요? 만나는 분마다 입을 모아 유력한 후보는 숙부님밖에 없다고 하세요. 그러니 부디 걱정을 내려놓으시죠.”

그제야 정신 사납게 방을 서성이던 후작이 조용히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게다가 전쟁 이후 삐꺽거리던 메비앙 가문과 센우드 가문의 사이가 최근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는 걸, 황제 폐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래?”

그 말에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던 후작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 말이 사실이냐?”

“네. 황실은 소문이 빠른 곳이니까요.”

메비앙과 센우드 가문은 세르하드 후작과 사절단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라이벌이었다. 그가 이렇게 관심을 갖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메비앙 가문을 사절단으로 임명하면 센우드 가문의 반발이 있을 테고, 센우드 가문을 임명하면 메비앙이 가만있지 않겠죠. 그러니 마음을 편히 먹으세요, 숙부님.”

“흐음…….”

후작은 콧수염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곧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고 보니 내주에 황궁에서 가면무도회가 열리지 않느냐?”

“그렇지요.”

“메비앙과 센우드 가문에서도 참석할 것이라 들었다. 무도회를 계기로 다시 화해하길 바라는 몇몇 측근들이 가주들을 설득했다더군.”

세르하드 후작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한쪽으로 올라갔다.


“그때 그 둘을 다시 싸움 붙이면 어떻겠느냐?”

“……이간질을 하자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지. 황제 앞에서 내가 잘났다, 네가 못났다 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꼴이 얼마나 추하겠느냐.”

“…….”

“그러다 완전히 이성을 잃고 주먹다짐이라도 해 주면 더욱 좋고.”

확실히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두 후보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거였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 이번 무도회 때, 중재해 주는 척하며 조롱의 의미가 담긴 선물을 슬쩍 건네주기만 해도, 불이 붙은 것처럼 터질 테지.”

“설마 그걸 제가 하라는 말씀은 아니시죠?”

“당연히 아니지. 하급 귀족 하나를 섭외해 무도회에 초대하려무나. 특히 이런 황궁 무도회에 자신의 힘만으로 올 수 없는 사람이면 더 좋고. 눈에 불을 밝히고 참석하려 들 테니.”

잠시 생각에 잠겼던 후작이 다시금 눈을 빛냈다.


“신분을 밝힐 순 없지만, 누구보다 두 가문의 화해를 바라는 익명의 고위 귀족인 것처럼 접근하면 어떠냐? 권력에 줄을 댈 수 있게 해 주든, 돈을 주든 크게 사례하겠으니 도와달라고 말이야. 설령 선물의 내용물을 몰랐다고 해도…….”

“어쨌거나 대가를 받기로 했다는 게 알려지면 입장이 곤란하겠군요.”

“그래. 나중에 내막을 알게 되어도 너와 내가 찍어 누르면 그만이야. 황제의 사절단과 황후의 의전장인 우리에게 감히 맞설 수는 없겠지.”

“흐음.”

멜로즈는 눈을 내리깐 채, 잔에 남은 차를 천천히 한 모금 머금었다.

그리고 세르하드 후작을 배웅하러 나선 길. 그녀는 문 앞에 서서 멀리 사라지는 후작의 마차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마치 무언가 걸린 듯 명치 부근이 조금 답답했다. 후작의 불안이 전염된 탓이었다.

자신의 친척인 세르하드 후작이 사절단의 일원이 되는 것은 멜로즈 또한 바라 마지않는 일이었다.

황후의 의전장과 사절단의 일원이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라면, 황실 내에서 세력을 형성하기에 훨씬 수월할 테니까.

그걸 위해 후작가에서는 물론, 멜로즈 본인도 꽤 많은 돈을 황실에…… 아니, 전장으로 보내지 않았나.

게다가 세르하드 후작은 그녀를 몹시 의지하니, 잘만 하면 사절단의 일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처리하는 일도 가능할 터였다.


‘하급 귀족 하나를 섭외해 무도회에 초대하려무나. 특히 이런 황궁 무도회에 자신의 힘만으로 올 수 없는 사람이면 더 좋고. 눈에 불을 밝히고 참석하려 들 테니.’

 
후작의 말을 곱씹던 멜로즈 백작 부인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갔다.

물론, 무도회 초대장을 보내기만 해도 감격에 겨워할 귀족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당장 그녀만 해도, 힘없는 가문들의 이름을 열 개 정도는 쉬지 않고 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황제나 황후, 그리고 초대된 다른 손님들이 의아하게 생각할 만한 사람은 안 된다.

모두가 ‘저 사람은 아무리 봐도 여기 올 만한 사람이 아닌데’라고 여긴다면, 후작의 계획은 수포가 될 테니까.

황궁 무도회에 참석할 만큼 사교계에서 입지는 있지만, 이용당했다는 걸 알게 되어도 반발하지 못할 사람…….

과연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할까 고민을 거듭하던 찰나였다.

닫힌 문 너머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순간 저도 모르게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한 영애가 시종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멜로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이렇게 귀한 발걸음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뵙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애는 시종을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어깨 아래로 탐스러운 붉은 머리가 물결쳤다.


 


‘저 여자 이름이 그러니까…….’

“부디 조심히 가십시오, 로렐라 메이레드 님.”

마차에 오르는 것까지 에스코트해 준 시종에게서 낯익은 이름이 들렸다.

그래, 로렐라 메이레드.

오찬회의 티타임 때, 가여울 정도로 황후에게 무시당했던 영애였다. 황궁에 볼일 따위는 없을 텐데, 대체 왜 왔을까?

하지만 오래 의아해할 필요도 없었다. 오늘 레어넌 기사단장이 황궁에 온다는 소식을 그녀도 아침에 하녀를 통해 들은 덕분이었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다. 레어넌은 자주 황제의 부름을 받아 황궁에 드나들었으니까.


‘그가 데려온 게 틀림없어.’

오찬 때처럼 말이야.

그렇게 생각한 멜로즈는 기둥 뒤에서 몸을 내밀어,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시종을 급히 잡았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헉!”

시종이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내뱉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멜로즈 백작 부인?”

그러더니 가슴을 쓸어내리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저 영애가 여기서 뭘 하다 갔죠? 누구랑 같이 온 겁니까?”

그 말에 시종이 저 멀리 콩알처럼 작아진 마차를 흘끗 돌아보았다.

그는 황제의 명을 후원에 있던 레어넌 기사단장에게 전했었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지금 당장 알현실로 오라는 심플한 명령이었다.

난처한 표정이던 기사단장은 결국 시종에게 저 대신 그녀를 마차까지 잘 에스코트해 달라고 부탁했다.

잘 모시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영애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에는 걱정과 미안함이 가득 스며 있었다.

그런데…… 이건 왜 물어보시는 걸까?

시종은 의아했지만 솔직히 답했다.


“레어넌 단장님과 후원을 산책하고 돌아가시는 길입니다.”

‘그럼 그렇지.’

멜로즈 백작 부인의 입술 한쪽이 비스듬하게 들렸다.


“단장님은 어디 계시고요?”

“단장님께서는 폐하를 알현하러 가셨습니다.”

그러자 멜로즈는 알겠다는 말과 함께 시종을 뒤로하고 급히 걸음을 옮겼다.

발을 움직일 때마다 보랏빛 드레스의 고급스러운 치맛자락이 우아하게 퍼졌고 드레스에 맞춰 수정으로 만든 예쁜 나비 핀을 꽂은 머리가 등 뒤에서 살랑거렸다.

한참이나 서두르던 그녀의 발걸음이, 어느 커다란 기사 조각상 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후후…….”

소름 끼칠 만큼 낮고 작은 웃음소리가 터졌다.


“어쩜 그렇게까지 그 영애를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바꿔 말하면, 그만큼 존재감이 없고 신경 쓸 필요조차 없었던 인물이라는 뜻이지.

그야말로 이 계획에 써먹기 안성맞춤이다.

게다가…….


‘전시회 경비는 황궁의 일반 병사들에게 일임하시는 게 좋겠군요.’


‘전시회의 경비는 다른 분들이 충분히 대신할 수 있지만, 성기사단이 하는 일은 누구도 대신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던 레어넌 단장의 목소리가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귓가에 생생히 맴돌았다.

그가 어떤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는지도 또렷하게 기억났다.

그날 느꼈던 모멸감까지.

하지만 그는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인물이었고, 베르하르트 가문도 감히 자신이 대적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쭉 참고 지내 오긴 했지만…….


‘잘만 하면, 레어넌 기사단장에게도 망신을 줄 수 있겠네.’

멜로즈 백작 부인의 만면에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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