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싫습니다
(100/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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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싫습니다
2022.06.15.
알현을 끝마치고 나오는 길.
내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배어 있었다. 손에도 마찬가지로 식은땀이 가득했다.
황제를 일대일로 만나는 일이 처음이라 긴장한 것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나는 황제의 경계심을 풀어 주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내 존재를 각인시켜야만 했다.
그걸 위해 혼신의 연기를 펼쳤더니, 진이 다 빠져 버렸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성공한 것 같지?
황제와의 일을 곱씹으며 시종의 안내를 따라 기나긴 복도를 걸었다. 온몸을 누르던 긴장은 돌아봐도 알현실이 보이지 않을 때쯤 되어서야 차츰 사라졌다.
그제야 안도감이 들어 잠시 숨을 돌리던 그때.
“이제 나오셨군요.”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얼른 시선을 돌리자 익숙한 금빛 머리가 보였다.
“알현은 잘 마치셨습니까?”
애정이 듬뿍 담긴 다정한 미소와 티 없이 하얀 얼굴, 그리고 화창한 날의 하늘같은 푸른 두 눈이 차례차례 시야에 들어왔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니면, 어디가 이상합니까?”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이 있어도 고칠 수는 없는데……. 그래도 얘기해 주시면 고치려고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농담을 건네며 웃는 그는 마치 소년처럼 순수해 보였다.
“아, 아니요……!”
그제야 내가 넋을 놓고 레어넌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놀라서 그만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나는 허둥지둥하며 인사를 건넸다.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싶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자꾸만 ‘그때’가 생각나, 심장이 뛰었다.
“놀라셨습니까?”
“조금은요. 이런 곳에서 만나 뵐 줄 몰랐거든요.”
드레스 자락을 말아 쥐며 어떻게든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일이 있어 황궁에 잠깐 들렀는데, 가기 전 폐하께 인사를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폐하께 인사를요?”
“네. 안 그러면 나중에 또 서운하다고 하실 테니까요.”
레어넌의 얼굴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 말을 들으니 새삼 그가 얼마나 황제와 가까운 사이인지 느낄 수 있었다.
오늘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내가 거쳐야만 했던 복잡한 과정들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당장 인사를 드리는 건 조금 어려울 것 같군요.”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아까 나를 안내해 주었던 브라운베르크 백작이 알현실 쪽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브라운베르크 백작이 들어갔으니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두 분은 늘 말씀을 길게 나누시거든요.”
“그렇군요.”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나와 했던 이야기의 연장선이겠지.
황제 폐하를 알현한 것만으로 목적은 달성했다고 볼 수 있지만, 브라운베르크 백작이라는 사람을 알게 된 것도 내게 상당한 수확이었다.
재무대신인 그 역시, 성기사단의 단장 레어넌처럼 황제와 무척 가까운 사이니까.
“로렐라.”
다정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레어넌이 내게 시선을 맞춘 채 물었다.
“괜찮다면 저와 잠시 산책이라도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의 뺨 근처가 얼핏 붉어진 게 보였다.
“……바쁘지 않으시다면 말입니다.”
어쩐지 절실함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레어넌은 이 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산책로가 있다면서 나를 후원 쪽으로 이끌었다. 황궁 지리에 익숙한지 시종의 안내가 없는데도 그의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허락도 받지 않고 이렇게 황궁 안을 돌아다녀도 되는 걸까 하는 걱정이 잠시 들었으나, 후원으로 향하던 도중 마주친 시종장 덕분에 그것이 쓸데없는 기우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시종장은 매우 반색하며, 마침 최근에 예쁜 벤치를 새로 놓았으니 꼭 들러 보라는 조언까지 해 주었다.
후원으로 나가자 벌써 울긋불긋한 색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는 나무들이 보였다. 그 사이로는 잘 가꾸어진 화단이 보였다.
“조금만 더 가시면 됩니다.”
여기도 충분히 아름다운데, 그는 계속해서 나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꽃이 만발한 화단을 지나 더 걷자, 동그랗게 다듬어진 정원수들이 나타났다.
모두 내 키를 훌쩍 넘는 나무라 그 건너편에 뭐가 있는지는 전혀 보이질 않았다.
“여깁니다.”
레어넌이 기대해도 좋다는 듯 씩 웃었다.
옆쪽에 나 있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뒤로 돌아간 순간.
“와!”
나도 모르게 감탄이 터졌다.
아치형의 목조 다리가 놓인 커다란 연못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새파란 연못 주위로는 황금빛과 붉은색이 어우러진 마리골드 꽃이 가득했고, 그 뒤로는 새하얀 조각상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본궁과 멀어서 그런지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는 물론, 시종들도 여기까지는 잘 오지 않더군요.”
그 말에 나는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에 화려한 본궁의 꼭대기가 보였다. 확실히 꽤 많이 걸어야만 올 수 있는 곳이긴 하다.
“그거 정말 아까운 일이네요.”
이렇게 예쁜 곳을 멀다는 이유로 잘 오지 않는다니. 진심으로 안타까운 느낌마저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다리 건너편으로 시선을 옮기자, 레어넌이 자연스레 손을 내밀었다.
“다리를 건너 반대쪽으로도 가 보시겠습니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레어넌은 내가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지 어쩜 이렇게 잘 아는 걸까.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바닥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십시오.”
그가 내민 손을 맞잡은 채 아치형 다리에 올랐다.
중간쯤 다다랐을 때, 그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본 순간.
“일이 잘 풀려서 다행입니다.”
부드럽고도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폐하께 좋은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하셨군요.”
그 말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나름대로는요. 그런데 일이 잘 풀렸는지 어떻게 아셨어요?”
“표정이 한결 밝아지셨거든요. 눈빛도 편해졌고요.”
그 말에 살짝 놀란 나와는 달리, 레어넌은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조금 알아보았습니다. 폐하께서는 마지막 사절단 자리를 놓고 세 명의 후보 중에서 고민하고 계시더군요.”
“……네?”
아니,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씩이나 마음에 뒀다고?
나는 복잡한 마음은 잠시 내려놓고, 레어넌의 말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중 가장 유력한 후보는 세르하드 베르탱 후작입니다. 멜로즈 백작 부인의 친척이죠.”
머릿속 어딘가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멜로즈 백작 부인은 황후의 의전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오찬 모임 때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하아…….”
참아 보려고 했으나, 나도 모르게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다.
하지만…… 피할 수도 없는 일이겠지.
나는 레어넌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혹시 세르하드 후작님은 황후 폐하와도 관련이 있는 분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황후 폐하는 이번 일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 말에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다만 후작의 이름을 사절단으로 올리기 위해, 멜로즈 백작 부인이 물심양면으로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마도…….”
“자신이 의전장임을 이용해, 황후 폐하께도 부탁을 드릴 수도 있겠네요. 황후 폐하께서 의견을 드린다면, 황제 폐하의 마음이 기울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네, 그럴 수 있겠죠. 하지만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듯합니다. 황후 폐하께 말을 꺼내는 것은 그녀에게도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일일 테니까요.”
하긴. 나라도 그럴 것이다. 섣불리 말을 꺼냈다간, 오히려 본전도 못 찾을지 모르니까.
내가 느낀 황후의 인상은, 황제보다도 더욱 가차 없고 냉정한 사람이라는 거였다.
제아무리 측근이라고 해도 자신이 정한 선을 넘으려 하면 그 누구보다 무자비해지는 무서운 사람.
봄바람인 줄 알고 옷을 벗었다가, 매서운 추위에 혼쭐이 날지도 모르는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그건 그렇고…….
“단장님께서…… 정말 다 알아보신 건가요?”
그러자 레어넌이 선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근래 황궁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부 제게 들려오게끔 조치해 놓았습니다.”
조치라니.
당연히 본인이 이런 일에 관심이 있기 때문……은 아니겠지.
“도와드리겠다고 말씀드렸으니까요. 아니…….”
레어넌은 내 곁으로 가까이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 얼마든지 저를 이용하십시오.”
생각지도 못한 말만큼이나 강렬한 시선이 쏟아졌다. 변함없이 상냥하고 따듯한 애정 외에도 더욱 거세고 뜨거운 감정이 그의 눈동자 안에 담겨 있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아…….”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입술을 꼭 깨문 채 시선을 떨궜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아무렇지 않은 듯 감사하다고 인사를 건넬 수도 없었다.
“그럼 가실까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처함만 삼키고 있던 걸 눈치챘는지 레어넌이 다시 부드럽게 권유했다.
나는 내심 안도하며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걸어 다리 끝에 다다른 때였다.
물기가 있었는지, 미끄러운 바닥을 따라 하이힐이 앞으로 미끄러졌다.
“앗!”
비틀거린 동시에, 단단한 팔이 나를 받쳐 안았다.
“조심하십시오.”
“죄, 죄송해요.”
귓가에 쿵쿵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어넌의 손은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나를 꽉 붙잡고 있었다.
순간 예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산책이라도 하면 기분이 나아질 거라는 그의 권유에, 함께 갔던 호숫가에서 딴생각하며 걷다가 지금처럼 넘어질 뻔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어떻게 하면 주식을 팔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머릿속이 꽉 찼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펠리어트를 피해 도망치던 나를 구해 주고 안전한 쉼터까지 제공해 준 것도 모자라, 어떻게 하면 기분이 나아질지 함께 고민까지 해 준 사람.
……그저 처음 보는 낯선 여자일 뿐이었는데.
만약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일면도 없는 타인을 위해, 진심 어린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었을까?
수려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얼굴이 너무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여전히 그의 팔 안에 안겨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을 빼내며 말했다.
“폐하를 알현하면서 긴장했던 터라 그만 다리가 풀렸나 봐요.”
그런데…….
“저는 긴장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까?”
그의 팔이 더욱 단단히 나를 안았다.
“정신을 차려 보면 그대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다, 단장님…….”
“어떤 날은 꿈에서조차 당신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습니다.”
내 것인지, 그의 것인지 모를 박동 소리가 점점 거세어져 갔다.
이대로 있다간 심장이 버티지 못하고 터져 버릴지도 몰라.
“잠깐만…… 노, 놓아 주시면…….”
그러자 단호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싫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레어넌은 나를 세게 당겨 품에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