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앞으로 그대의 이름을 기억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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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앞으로 그대의 이름을 기억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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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앞으로 그대의 이름을 기억하지
2022.06.11.
“일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금빛 휘장이 드리워진 집무실 안에 노기 띤 호통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색색의 보석을 박아 무척이나 화려한 보석 왕관은 햇빛을 받아 머리 위에서 찬란하게 빛났으나, 그와 달리 남자의 낯빛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대책을 내놓는 이가 단 하나도 없다니. 허어…….”
황제의 탄식을 들은 이들이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돌처럼 굳어 신발 끝만 바라보고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황실의 재무를 관리하는 행정관들이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랬다간 정말 불호령이 떨어질 테니까.
“소, 송구하옵니다. 폐하!”
행정관 중 가장 오래 일을 한 자가 더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열었다.
“반드시 해결책을 강구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 그리해야지.”
황제의 입에서 서슬 퍼런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것을 내놓아야 할 테니.”
그 말에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살얼음판 같은 회의를 끝내고 밖으로 나온 행정관들의 입에서는 커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불평하진 못했다. 황제에게서 또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르니.
“……도매상들을 불러 모으게.”
빠르게 걸음을 움직여 복도를 벗어나고 나서야 비로소 재무 대신인 브라운베르크 백작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의 곁을 따르던 다른 행정관이 파리한 안색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수도는 물론, 다른 도시들도 이미…….”
“변방 마을엔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아주 작은 마을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사람을 보내게.”
뾰족한 수가 없는 그들로서는 혹시라도 설탕을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야 했다.
사실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인데도, 그런 부분에까지 일말의 희망을 걸어 볼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다들 여전히 불안한 얼굴이었다.
황실의 살림을 담당하는 행정관들로서는 이번 사태에 다소 억울한 감이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황실은 전년도 예산에 비례해 반드시 일정량 이상의 곡식이나 식량을 비축해야 한다’는 법이 존재했었다.
혹시라도 찾아올지 모를 대흉년이나, 자연재해에 대비하기 위해서 말이다.
한데 그 법을 직접 철폐한 게 현 황제였다.
그는 보유하고 있던 식량들을 전부 전장으로 가져가도록 명했고, 그곳에서 남김없이 소비해 버렸다. 당연히 곳간에 남아 있는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행정관들의 골머리를 더욱 아프게 한 것은 몇몇 대영주들의 행태였다.
황실을 향한 민심이 점점 나빠져 간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설탕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에 협조하지 않았다.
분명 서신을 보낼 때만 해도 물심양면으로 협력하겠다고 해 놓고, 실제 행동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그들은 자체적으로 비축해 놓고 있던 설탕을 황실 몰래 직접 풀어 버렸다.
황실의 명을 따라야 함이 마땅하지만, 당장 눈앞의 고통받는 영지민을 보고 있자니 어쩔 수가 없었다는 변명이 뒤따랐다.
하지만 뒤로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너무나도 명확했다.
설탕이 귀해진 만큼 값은 천정부지로 솟았다. 영주들은 앉은 자리에서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심지어 황실에서도 구하지 못하는 것을 영지민에게 제공해 주었다는 생색까지 낼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인 셈이었다.
영주들은 무슨 벌이든 달게 받겠다며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지만, 행정관들은 황제에게 이를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말한다고 해도 마땅히 벌을 주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영지민을 위해 행동했다는 명분을 뒤집어쓴 영주에게 벌을 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는 황제의 위엄에 먹칠하는 일이었으므로.
황실 곳간 관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작 설탕을 내놓으라며 대영주들에게 윽박지르는 황제.
안 그래도 아슬아슬한 황실의 권위가 땅으로 곤두박질칠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 되도록 만들 만한 세력이 도처에 깔려 있었다.
태양은 언제나 고고한 빛을 내뿜으며 떠 있어야지만 태양 아니던가?
하나같이 뿌리 깊은 친황실파 가문 출신인 재무 관리 행정관들은, 이러한 부분까지 모두 떠안은 채 일을 진행해야 했다.
신경 쓸 점이 많은 만큼, 황제가 만족할 만한 대책이 빠르게 나오지 않는 건 당연했고.
입술을 꾹 깨문 브라운베르크 백작이 깊게 주름진 미간을 문지르던 그때였다.
“백작님.”
그의 곁으로 전담 시종이 다가왔다.
“왜 그러지?”
“아우레아의 메이레드 백작 영애로부터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황실에 설탕을 제공하고 싶다는 짧은 메모가 봉투 겉면에 함께 붙어 있는데…….”
그 말에 브라운베르크 백작이 흰 눈썹을 위로 치켜떴다.
“어서 이리 줘 보게.”
시종에게서 거의 뺏다시피 편지를 가져간 백작이 봉투를 거칠게 찢었다. 그리고 펼쳐 든 종이를 재빠르게 읽어 내려가던 그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어서 이 영애를 황궁으로 불러오게나!”
하지만 백작은 급히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아니, 내가 직접 모시러 가겠네!”
* * *
따듯함이 물씬 느껴지는 말린 장밋빛의 방 안에는 차분하면서도 은은한 광택이 돋보이는 흰색 티 테이블이 있었다.
방 자체는 소박했으나 천장에는 에메랄드로 장식한 커다란 샹들리에가 있어, 화려한 느낌을 자아냈다.
이 아름다운 공간은 브라운베르크 백작이 주로 사용하는 개인 접견실이었다.
“하하핫!”
최근 들어 아주 작은 미소조차 지을 일 없었던 브라운베르크 백작의 입에서, 오랜만에 화통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심지어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평소의 그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정말이지 한 수 배웠소. 사탕무로 만들어 낸 설탕이라…….”
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보통은 사탕수수로 설탕을 만들기에 그동안 거기에만 얽매여 있었다. 한데 눈앞의 여인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 난관을 타계했다.
“사탕수수 설탕보다 질이 떨어진다고는 하지만, 사탕무로도 훌륭한 설탕을 만들 수 있지. 왜 여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훌륭하군요.”
그러자 붉은 머리 영애가 살짝 웃으며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추운 기후를 잘 견디는 작물이니 북부에서 구해 온 것도 그래, 그러고 보면 사탕무는 북쪽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이지. 추운 기후를 잘 견디니까.”
“백작님께서는 농작물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이래 봬도 수도에서 좀 떨어진 곳에 농경지를 하나 관리하고 있다오. 은퇴한 뒤 거기 있는 작은 별장에서 여생을 보내는 게 내 오랜 꿈이지.”
“브라운베르크 백작 가문이 소유한 비옥한 토지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 땅에서 나는 과일들이 얼마나 신선하고 맛있는지도요. 제 동업자인 제빵사는 늘 최상급 사과를 써서 애플파이를 만드는데, 그 사과가 바로 백작님의 땅에서 나는 사과랍니다.”
“호오, 그랬군. 괜찮다면 나도 맛볼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사실 안 그래도…….”
그녀는 살짝 뜸을 들이더니 이내 뺨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백작님의 서신을 받자마자 오늘 약속 시간에 맞출 수 있게끔 미리 주문을 넣어 놨답니다. 갓 만든 파이를 꼭 맛보여 드리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그만…….”
“아니, 그럼 여기까지 가지고 왔단 말입니까?”
“네. 타고 온 마차에 실어 놓았습니다. 주위 분들께도 골고루 나눠 드릴 수 있도록 많이 준비했으니, 부디 사양 마시고 받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브라운베르크 백작은 점점 더 이 영애가 마음에 들었다.
나이로만 봤을 때는 자신의 손녀딸뻘인데, 반짝거리는 기지가 대단했다.
그는 다시 한번 크게 웃더니, 문득 뒤쪽에 놓인 커다란 시계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백작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녀가 긴장한 듯 입술을 살짝 물었다. 그런데도 눈빛만은 설레는지 반짝이고 있었다.
“황제 폐하를 알현할 시간이오, 메이레드 영애.”
백작이 손을 내밀자, 그녀가 그걸 조심스레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네에.”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보니 설렘보다는 긴장감이 더 큰 듯했다.
평소 그다지 황제를 알현할 기회가 없는 지방 귀족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굳어 있지 않아도 괜찮다오.”
백작은 그녀를 알현실로 직접 에스코트하며, 마치 손녀를 대하듯 다정히 달래 주었다.
“황제 폐하도 틀림없이 기뻐하실 테니까.”
“감사합니다.”
한결 안심되는지 영애가 활짝 웃었다.
곱게 손질한 붉은 머리가 아름답게 흔들렸다.
* * *
“고개를 들도록.”
황제가 근엄하게 명령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굽힌 허리를 쉽사리 펴지 않았다.
“괜찮으니 편히 있게.”
다시 한번 권하고 나서야 비로소 로렐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대가 이번에 황실을 위해 대량의 설탕을 지원했다고?”
“그렇사옵니다, 폐하.”
“개인이 비축한 것 치곤 상당히 많은 양이던데. 어떻게 그토록 많은 설탕을 보유할 수 있었던 거지?”
“그게…….”
로렐라는 목을 한 번 가다듬고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제 동업자는 아우레아에서 아주 오랫동안 빵집을 운영해 왔습니다. 발이 넓어 소식을 빠르게 접하는 사람이기도 하지요. 그 사람이 제게 귀띔해 주었습니다. 흉년에 수해까지 겹쳤으니, 이 악재가 쉽게 끝나진 않을 거라고요.”
“흐음, 그래서 대비를 위해 설탕을 직접 만들기로 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폐하. 비록 작은 가게이긴 하지만, 설탕이 없으면 그대로 문을 닫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본인의 가게를 위해 쓰고 싶을 텐데, 왜 황실을 위해 애써 만든 소중한 설탕을 전부 내놓은 건가?”
그 말에 그녀가 두 눈을 한 번 천천히 깜빡였다.
루비처럼 아름다운 눈동자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사이,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이야기를 이어 갔다.
“제국의 일원으로서, 태양과도 같으신 황제 폐하께 충성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이 나라가 있어야 저도, 제 가게도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틀에 박힌 대답이었지만, 어쨌거나 정답이었다.
황제는 일부러 부드럽게 물었다.
“명색이 황제인데 그대의 소중한 자산을 대가 없이 받을 수는 없지. 그대는 무엇을 원하는가?”
그러자 그녀가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황제 폐하를 직접 알현한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대의 충성은 갸륵하나, 내 마음이 편하지 않군. 시중에서 거래되는 가격으로 쳐주지.”
퍽 인자하게 말했으나 황제의 속내는 달랐다.
이렇게 해야만 뒤탈이 없을 테니까.
거듭 손사래를 치는 여자의 반응도 그에겐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앞과 뒤가 다른 귀족들은 이미 지겹도록 접했으니까.
굳이 이름을 밝히고 가문의 이름으로 설탕을 지원한다는 건, 필시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 말에 로렐라가 살짝 입술을 깨무는 게 보였다.
“그렇다면…….”
아니나 다를까.
“한 가지 청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계속 묻는 말에만 대답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이오.”
“제가 드린 설탕으로 지금 상황은 진정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앞으로도 황실엔 비축분이 필요하시지 않겠습니까? 이런 사태가 또 발생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괜찮으시다면 제가 했던 방식 그대로, 계속 설탕을 만들어 주시길 청하고 싶습니다.”
“북부에서 사탕무를 사들여 서부의 공장에서 만들어 달라 이건가?”
“그렇습니다, 폐하.”
순간 황제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무래도 그녀는 이미 북쪽과 서쪽에서 각각 대가를 받기로 말을 맞춘 모양이었다.
장기적으로 양쪽에서 수익이 들어올 테니, 퍽 쏠쏠한 장사일 것이다.
꽤 머리를 굴린 흔적이 역력했다.
그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그리해 주겠노라고 말하려던 때였다.
“북부에서 원당을 사들일 때, 자루당 금화 두 개씩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녀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그 돈을 받고 기뻐하던 북부 영지민들의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그리고 서쪽의 공장 역시도…….”
그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황제가 그녀에게 눈짓했다. 계속해서 말해 보라는 뜻이었다.
“흉년으로 인해 줄곧 놀고 있던 공장을 돌리게 되어, 무척 즐겁게 일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주머니가 두둑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따라서 이 일을 계속할 수만 있다면, 모두가 폐하를 더욱 칭송할 것입니다.”
“흐음.”
황제는 어느새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걸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입에서도 거침없는 말이 이어졌다.
“두 영지는 여러 지리적 요건 때문에 교류조차 쉽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폐하께서 그들이 서로 교역할 수 있도록 물꼬를 터 주신다면…….”
“영지민의 삶이 윤택해지겠군.”
“그렇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사이가 좋지 않기로 유명하지만, 계속해서 교역하다 보면 그 해묵은 감정도 가라앉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 일은 황실의 오랜 숙원이었던 제국 대통합의 기반이 되겠지요.”
“명안이로군.”
황제의 입에서 흡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를 평가하던 시선도, 조소하듯 비웃던 기색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의 눈빛은 오랜 친우를 보듯, 아끼는 손녀를 보듯 다정함으로 가득했다.
“그래, 그게 선대의 숙원이자 내 오랜 염원이었지. 그대의 충언으로 다시 한번 깨닫게 됐군. 말해 보시게. 내 그대에게 어떤 상을 내려야 마땅한가?”
“상은…….”
그녀는 맑고 고운 눈으로 다시 한번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황제는 저도 모르게 권좌를 움켜쥐었다.
응당 자신의 것이어야 마땅한, 그야말로 티 한 점 없이 맑은 충의였다.
지긋지긋한 알력 싸움에 지칠 대로 지친 마음에 마치 한 줄기 상쾌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로렐라 메이레드.”
황제의 입에서 꾸미지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앞으로 그대의 이름을 꼭 기억하지.”
“감사합니다, 폐하.”
로렐라는 눈이 부시도록 환한 미소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