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세상에서 가장 절망스럽고, 비참하며, 후회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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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세상에서 가장 절망스럽고, 비참하며, 후회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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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세상에서 가장 절망스럽고, 비참하며, 후회스러운
2022.06.04.
내부를 싹 뜯어고친 공작저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구석구석 화려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안락하고 편안했다.
어찌나 변했는지, 내가 2년 동안 지냈던 곳과 같은 저택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용병을 구하기 위해 하룻밤 신세 진 적이 있으니 공작저로 돌아온 게 처음은 아니지만, 워낙에 늦은 밤에 도착한 터라 변한 저택을 느긋하게 구경할 시간도 없었다.
심지어는 아침이 밝자마자 시엘로 단장을 만나기 위해서 걸음을 재촉했으니까.
그래도 복도를 포함해 저택이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때 내가 본 건 빙산의 일각이었나 보다.
펠리어트가 안내해 준 다이닝 룸은 원래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조차 안 날 정도로 몹시 변해 있었다.
따뜻한 파스텔톤 색감의 커튼과 아기자기한 장식이 알맞게 배치되었고, 정중앙엔 새하얀 러너가 깔린 테이블이 자리했다.
테이블 위로는 손잡이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와 루비가 박힌 아름다운 은촛대와 예쁜 생화가 꽂힌 화병들이 놓였다.
엠마가 좋아하던, 심하게 번쩍거리는 금색 장식들은 온데간데없었고 안목이 좋은 디자이너가 하나하나 고른 듯한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다.
“여기 앉아.”
펠리어트는 하인을 물리더니 섬세한 장식이 세공된 의자를 직접 빼 주었다.
그가 밀어 주는 의자에 앉으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너무 예쁘다.”
마치 수도의 근사한 레스토랑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자 펠리어트가 낮게 웃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하지만 정말 놀라운 건 그 후부터였다.
“와!”
하인들이 큰 접시를 들고 하나둘 들어올 때마다 입에선 연신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접시 위로는 통통한 새우와 팔뚝만 한 바닷가재, 그리고 커다란 게가 먹음직스럽게 쌓여 있었다.
막 조리했는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보니 나도 모르게 입에 침이 고였다.
“고용인들에게 듣기론 당신이 저택에 있을 때 이 음식들만 나오면…….”
“맛있겠다……!”
그가 말문을 연 동시에 내 입에서 차마 억누르지 못한 감탄사가 튀어나와 버렸다. 거의 본능적으로 던진 말이라 이제 와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펠리어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곧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꼭 지금처럼 좋아했다고 하더군.”
아차, 이건 좀 너무 없어 보였나?
나는 그림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마주 본 채 멋쩍게 웃었다.
“당신이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어.”
그 말에 더 민망해져서 그만큼 더 웃어 버렸다.
물론 유독 좋아한 건 사실이었다.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북부에서는 해산물을 좀처럼 보기가 어려우니까.
가끔 생선이 나오긴 했지만 전부 염장한 것밖에 없었고.
이런 갑각류는 해안가에 사는 귀족들이 방문 선물로 들고 와 줄 때나 구경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공작저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엠마에게 잘 보이려 몇 번씩 얼음을 갈아 채우며 쉬지 않고 달려왔다고 생색내듯 으스댔었다.
그러고 보니 펠리어트는 이걸 어떻게 가져온 걸까? 게다가 대체 언제부터 준비하라 지시한 거지?
내가 의문을 품는 사이 그는 직접 내 접시 위로 먹기 편하게 한입 크기로 잘린 바닷가재를 가지런히 놓아 주었다.
“어서 먹어.”
“고, 고마워.”
별것 아닌 행동인데도 어쩐지 쑥스러웠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들어 애꿎은 접시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통통한 붉은 살을 보니 절로 식욕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말랑하면서도 부드러운 살을 입에 넣고 조심스레 오물거리자, 은은한 단맛과 감칠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내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던 펠리어트는, 이윽고 게와 새우 접시를 앞으로 끌어왔다.
띵동!
「‘집착광공 함 잡숴 봐’ 님이 10만 주를 구매합니다!」
「내 사랑 펠리어트, 비닐장갑 끼면 사형.」
……그는 비닐장갑은커녕, 이번에도 내 접시에 게살을 착착 예쁘게 놓아 주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많이 먹어.”
난 괜찮으니 너도 어서 먹으라고 사양을…….
“응!”
……하긴 개뿔.
내 손과 입은 머리를 배반하고 바쁘게 움직였다.
우와, 맛있다. 솔직히 너무 맛있어!
거절하기에는 너무나도 맛있는 음식이잖아.
“대체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했어?”
그는 대답 대신 미소 띤 얼굴로 그저 와인만 한 모금 마실 뿐이었다.
띵동!
「‘집착광공 함 잡숴 봐’ 님이 또다시 10만 주를 구매합니다!」
「와인과 생수만 먹고 사는 우리 펠리어트! 나중에 새우 머리 구워 달라고 하면 사형!」
……거, 진짜로 사형시킬 마음도 없는 분들이.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접시에 놓인 게살을 포크로 찍어 입에 집어넣는 일에 열중했다.
“그러고 보니 당신과 상의할 일이 하나 있어.”
“사이? 그그 믄드?”
“어머니가 제네토로 가겠다고 하시더군.”
그 말에 입에 남아 있던 것들이 죄다 꿀꺽,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제네토라고 하면…….”
“그래. 최북단에 있는 곳.”
그의 말대로 대륙 최북단에 있는 제네토는 얼음과 눈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땅이다. 엠마 체임버스가 대체 왜 거기에 가겠다고 하는 거지? 추위라면 질색하면서.
“당신 오빠 역시 제발 그쪽으로 보내 달라고 애원했고.”
그 순간 펠리어트의 눈빛이 오싹하게 빛났다.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은 팔을 보고 그제야 척박한 땅으로 자진해서 가겠다는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완전히 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나도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으니까.
한밤중에 도망가려다 걸려서 그대로 갇혔던 기억이 떠올랐다.
문 너머에서 날 지켜보던 싸늘한 눈빛도.
그래. 저 살벌한 눈빛을 보며 평생 감시당하느니, 차라리 눈과 얼음밖에 없는 땅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겠지.
아니, 그 사람들이 뭐 그렇게까지 잘못했다고…….
무섭도록 표정을 굳힌 펠리어트를 보니 괜한 측은지심마저 들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그건…….”
나는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원하는 대로 하게 해 주면 되지 않을까?”
내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펠리어트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좋아, 참고하도록 하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조용히 작별 인사를 건넸다.
잘 가라.
이제 이번 생에 다시 볼 일은 없겠구나.
* * *
쌓여 있던 음식들이 줄어들자 맹렬하게 움직이던 로렐라의 손도 차츰 느려지기 시작했다.
펠리어트는 그 모습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작고 귀여운 동물처럼 제가 접시 위에 놓아 주는 대로 열심히 쏙쏙 잘도 집어 먹던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싶었는데.
“더 먹지 그래.”
“아, 아냐. 정말 배불러!”
몇 번이고 권해 봤지만 로렐라는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먹음직스러운 게살이 가득 담긴 접시를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면서도 쉬이 손을 뻗지 못하는 걸 보니, 정말로 배가 부른 모양이었다.
춥지 않도록 벽난로 불을 유지하라고 지시한 탓인지, 그녀의 양 뺨이 무척 발그스레했다.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간 뺨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무언가가 불쑥 나타났다.
포크에 찍힌 통통한 게살이었다.
“너무 나만 먹어서…….”
의아하게 바라보자 로렐라가 쑥스러운지 시선을 피하고 중얼거렸다.
펠리어트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가까이 당겼다. 그러고는 그대로 받아먹었다.
“아…….”
그러자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렐라의 얼굴이, 아니 목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펠리어트는 표정을 숨기고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맛있지?”
어떻게든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모면하고 싶은지 그녀가 살짝 시선을 돌렸다.
“어서 당신도 먹어.”
마음대로 빠져나가게 둘 순 없지.
“그래, 맛있군.”
펠리어트는 턱을 괸 채 로렐라 곁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그녀를 향해 짓궂게 웃으며 깨끗하게 비운 입을 살짝 벌렸다.
“아.”
“어……?”
포크를 쥔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긴커녕, 여전히 입술을 벌린 채 로렐라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당황한 눈빛이 오롯이 자신만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좋았다. 이대로 시간을 멈추고 싶을 정도로.
“아니, 손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로렐라는 말을 하다 말고 문득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앞 접시에 수북이 쌓여 있는, 다 먹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음식을 직접 덜어 준 사람이 누구인지 떠올린 모양이었다.
결국 그녀는 마지못해 포크로 음식을 콕 찍었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붉은 얼굴로, 그의 입속에 그것을 쏙 넣어 주었다.
비로소 펠리어트의 입술이 위로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영지를 내내 돌아다니는 그녀를 기다리느라 그 역시 온종일 식사를 걸렀고, 지금도 거의 먹은 것이 없지만 어찌 된 일인지 몹시 배가 불렀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나지막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모습에, 로렐라가 바로 반응했다.
“일부러 그런 거지! 날 놀리려고!”
“아니.”
“아니긴 뭐가 아니야?”
현관에서보다 배는 더 성난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걸 통제하느라 바쁜 나머지 아무런 반응하지 못하자, 로렐라는 결국 제풀에 지친 듯했다.
“참나. 두고 보자.”
그녀는 마치 다짐하듯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또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겨우 진정되어 가던 심장이 또다시 요동쳤다.
펠리어트는 혹시라도 로렐라가 이 소리를 들을까 봐 가슴께를 꾹 눌렀다.
“로렐라.”
그는 충동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왜?”
아직도 앙금이 좀 남았는지 살짝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디 내게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
“기회라니 무슨…….”
“내가 없었던 2년 동안, 당신이 겪었던 모든 일을 만회할 기회.”
로렐라의 얼굴에 떠올랐던 웃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펠리어트는 멈출 수 없었다.
“물론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 그 대신, 당신에게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주고 싶어.”
오로지 그것만이, 어느새 내 삶의 가장 커다란 이유가 되어 버렸으니까.
“펠리어트, 나는…….”
“예전에 내게 주어졌던 당신과의 시간은 이틀도 채 되지 않았었지. 그러니 앞으로 남아 있는 나날들을 전부 나에게 줘.”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고백이 이어졌다.
“반드시 지금보다 더 많이 웃게 해 줄게.”
잠시 침묵을 지키던 로렐라가 이윽고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
“당신이 달라졌다는 거 잘 알아. 예전엔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꽤 대화가 잘 통하는 편이지.”
무감한 눈빛으로 주변을 쓱 훑는 파리한 옆모습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펠리어트는 차오르는 긴장감을 느끼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당신 말이 맞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어.”
“로렐라, 당신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결국 초조해진 그가 급히 말문을 열었다.
“그런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야.”
그녀의 다소 날카로운 말에 가로막히고 말았지만.
펠리어트는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목 부근의 옷깃을 헤집었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솔직히 말할게. 당신이 어머니와 오빠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도 모르게 그 일을 떠올렸어.”
“……그 일?”
“그래. 그 일을 아예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날이 올지 어떨지, 지금은 나도 확신할 수 없어.”
그게 대체 무어냐고 되물으려던 때였다.
“이혼해 달라고 얘기했을 때, 이 저택 어딘가에 갇혔었지. 기억나? 당신이 직접 가뒀잖아.”
거칠게 크라바트를 끌어 내리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지금까지 굳이 입에 담지도, 떠올리지도 않았지만…….”
여전히 고요하고 잔잔한 음색이 이어졌다.
“난 여전히 그 일을 잊을 순 없어.”
변함없이 맑고 곧은 시선이 어느새 그의 얼굴 위에 머물러 있었다.
“당신과의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건, 내가 그 기억을 떠올려도 아무렇지 않게 된 이후여야 하지 않을까.”
되묻는 듯한 로렐라의 목소리는 담담하기 그지없었으나, 그게 펠리어트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결국 펠리어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손아귀가 아프도록 주먹을 쥐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 * *
로렐라는 식사를 마친 뒤 바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서부의 공장을 수소문하고 그곳까지 원당을 보내려면 서둘러야 하는 탓이었다.
‘그런’ 대화가 오고 갔는데도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긴커녕,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심지어 잘 먹었다는 인사를 건네는 얼굴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펠리어트는 그녀를 붙잡지도 못한 채,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게 고작이었다.
늦은 밤. 공작가의 커다란 마차에 매달린 램프가 현관 앞을 밝혔다.
“여러 가지로 도와줘서 정말 고마웠어.”
“…….”
“그, 그럼 또…….”
마지막 인사를 건넬 때만큼은 그녀도 어색했는지 살짝 말을 더듬었다.
펠리어트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이 로렐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그녀가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조심하며 마차 안까지 에스코트해 주었다.
마차 문을 닫자 뒤에 나와 있던 고용인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마부가 능숙하게 말고삐를 당겼다. 마차는 빠른 속도로 달려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그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비로소 펠리어트는 몸을 돌렸다.
밤이 늦었는데도 그가 향한 곳은 침실이 아닌 서재였다.
우두커니 앉은 그의 얼굴 위로 램프 불빛이 일렁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적을 깨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그가 서재에 있을 때면 언제나 복도를 지키는 수하였다. 손에는 술과 술잔을 들고 있었다.
펠리어트가 가볍게 턱짓하자 그는 정중한 동작으로 테이블 위에 그것을 조심히 내려놓고는 빠르게 사라졌다.
또다시, 혼자였다.
천천히 손을 뻗어 잔에 술을 채우자, 진한 커피와 초콜릿 향, 그리고 오렌지 꽃 내음이 후각을 자극했다.
그러나 펠리어트는 그저 잔을 들고만 있을 뿐, 한 모금도 넘기지 못했다.
‘역시 일부러 그런 거지! 날 놀리려고!’
지그시 눈을 감으니 로렐라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울렸다.
‘참나. 두고 보자.’
사랑스러운 웃음소리 또한 내내 떠나지 않고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는 곧 싸늘한 검으로 변해 펠리어트의 심장에 날카롭게 박혔다.
‘이혼해 달라고 얘기했을 때, 이 저택 어딘가에 갇혔었지.’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쉰 펠리어트가 고개를 들었다.
감았던 두 눈을 천천히 뜨자, 장식장의 유리에 비친 낯선 남자가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절망스럽고, 비참하며, 후회로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가.
잔에 담긴 황금빛 액체가 거칠게 출렁이던 그 순간.
와장창!
쏜살같이 날아간 술잔에 유리창이 박살 났다.
사방에 독한 술 냄새가 가득 퍼져 나갔다.
“공작님!”
밖에서 소리를 들은 수하가 벌컥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
그러나 그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경악했다.
깨진 채 바닥을 뒹굴고 있는 술잔과 산산조각 난 장식장 유리 때문이 아니었다.
수하의 시선은 오로지 펠리어트에게 향해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마치 울고 있는 것처럼 일그러진 그의 얼굴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