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고생 많았어2022.06.01.
“하마터면 내 계획이 전부 수포가 될 뻔했잖아……!”
로렐라는 연신 씩씩댔다.
“안 된다고 그렇게 말렸는데 고원에도 따라오질 않나!”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펠리어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흥분해 마구잡이로 힐난을 내뱉던 그녀가 순간 다친 팔로 머리를 쓸어 넘겼기 때문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움직인 듯한데, 로렐라는 아파 보이긴커녕 자신이 그랬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을 만큼은 회복한 모양이었다.
‘다행이군.’
펠리어트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가느다란 그녀의 팔에 화살이 박힌 것이 눈에 들어온 순간부터, 차갑게 얼어붙었던 마음이 비로소 녹아내렸다. 로렐라는 괜찮다고 했지만, 새파랗게 질려 있던 안색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내 곁에 있었음에도 미리 막지 못한 스스로를 용서하기 힘들었다. 범인이 누가 되었든 간에, 반드시 잡아내 대가를 치르게 만들겠다. ……그게 설령 황제라 하더라도. 펠리어트는 진심이었다. 그래서 레어넌 베르하르트가 정식으로 조사하겠다며 화살을 가져갔을 때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황제의 명을 직접 받는 레어넌이 공정과 절차에 갇혀 화살 하나에 매달리는 동안 자신은 서부에 사람을 보내 직접 알아볼 생각이었으니까. 범인의 윤곽은 이미 충분히 나와 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의 매서운 명령을 받은 정예 기사단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움직였다. 로렐라가 북쪽에 직접 찾아오지만 않았더라도, 지금쯤 범인을 잡아 성벽 밖에 걸어 놨을 텐데…….
“붉은 늑대라니, 기가 막혀서. 사람이 왜 이렇게 무모해?”
그때, 주위를 초조하게 맴돌던 부관이 조심히 곁으로 다가왔다.
“이러지 마시고 두 분 모두 안으로 들어가시죠. 네?”
다른 고용인들 역시 기다렸다는 듯 입을 모았다.
“마, 맞습니다! 바람이 찬데, 이러다 감기라도 걸리실까 걱정입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어떻게 하면 그녀의 기분을 풀어 줄 수 있을까 고민한 것도 잠시.
“하아…….”
결국 로렐라가 한숨을 내쉬더니 마지못해 고용인들의 말을 들어 주었다. 물론 마지막까지 펠리어트를 흘기는 걸 잊지 않았지만. 그도 피식 웃어 버렸다. 모두가 안절부절못하면서도 간절하게 말리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저택에서. 아니, 온 대륙을 통틀어 자신을 이렇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로렐라 한 사람뿐이다. 그러다 보니 펠리어트와 가깝지 않은 수하들은 처음 보는 상황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저들끼리 수군대고 있었다. 부관이나 그의 측근 고용인들로선 그다지 보여 주고 싶은 장면은 아니겠지. 하지만 펠리어트는 오히려 그 사실이 무척 기분 좋았다.
“들어가서 마저 이야기하지.”
펠리어트는 현관으로 향하는 계단에 올라서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연신 입술을 삐죽대던 로렐라도 마지못해 그 손을 맞잡았다. 그의 입가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 * * 공작저에서 지낼 때 로렐라를 가장 괴롭게 했던 건, 다름 아닌 날씨였다. 북부는 한 달 남짓한 아주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늘 서늘하고 추운 날씨가 이어졌다. 뼛속까지 몰아치는 한기는 잠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하게 할 때가 많았다. 엠마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벽난로를 켜 따뜻했지만, 로렐라에겐 아니었다. 그녀는 북부의 매서운 추위를 최소한의 장작으로 버티곤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늘 싸늘했던 공작저가 오늘만큼은 온기로 가득했다. 아직 본격적인 추위가 들이닥치기도 전인데 저택 곳곳에 벽난로를 지폈기 때문이었다. 혹여 로렐라가 추위라도 느낄까 염려한 펠리어트의 지시에 고용인들은 발 빠르게 움직여 주었다.
“……원당을 전부 사들이고 싶다고?”
숄을 두른 채 응접실의 커다란 벽난로 가까이에 앉은 로렐라와는 달리, 펠리어트는 춥지도 않은지 벽난로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것도 영지민의 집을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말인가?”
“응.”
로렐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덧붙였다.
“원래 가격보다 더 비싸게 살게. 부수입치곤 꽤 짭짤할 테니, 사람들도 분명 두 팔 벌려 환영할 거야. 하지만…….”
펠리어트는 팔짱을 낀 채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전에 먼저 영주님 허락부터 받아야겠지. 그게 순서니까.”
따뜻한 벽난로 불을 쬐며 조용히 얘기하던 로렐라가 생긋 웃으며 반쯤 내려간 숄을 다시 어깨 위로 올렸다. 그녀의 입가에 걸린 부드러운 미소를 본 펠리어트가 괜히 시선을 피했다. 겨우 웃는 얼굴을 봤을 뿐인데 심장이 제멋대로 뛰는 게 느껴졌다.
“만약 내가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당황한 펠리어트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툭 내뱉었다.
“그럼 최선을 다해 설득해야지. 그런데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
“어째서?”
“왜냐하면 당신은…….”
그녀가 눈이 멀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무뚝뚝하긴 해도, 영지민을 나쁘게 대할 영주는 아니니까.”
확신을 담은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거렸다. 그 순간 어디선가 두꺼운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녹아내리는 것도 같았다. 이상하게도 그녀가 웃는 모습만 보면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추운 겨울날 지핀 모닥불처럼. 대체 이게 어떤 감정인지, 흔한 말로는 도저히 정의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자신이 로렐라를 간절하게 원한다는 사실만큼은. 땅을 뒤덮던 얼음이 녹으면 나비가 찾아오고, 아름다운 붉은빛을 뽐내던 단풍잎이 떨어진 후엔 흰색 서리 옷을 입는 일이 되풀이되는 것처럼, 로렐라는 반드시 제 곁에 있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곳은 사시사철 차디찬 눈보라가 몰아치는 혹한의 땅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 * * 아름다운 주홍빛을 띠던 하늘은 순식간에 어둑해졌다. 해가 떨어지자 거리에는 인적이 뜸해졌고,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굴뚝 위로는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모두가 기다리던 가족과의 단란한 시간. 하지만 오늘만큼은 전례 없는 소란이 그 시간을 방해했다. 쿵! 쿵! 쿵! 여기저기서 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뿐만 아니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발소리와 개들이 컹컹대며 짖는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누, 누구십니까?”
사람들이 겁먹은 얼굴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이 이 집 주인인가?”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불청객의 행색을 살피던 남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검은 투구에 붉은 망토!
“흐어억!”
깜짝 놀란 남자가 비명과 함께 머리를 조아렸다. 펠리어트 공작님의 기사단이 어째서 나를!
“네, 접니다!”
남자의 머릿속으로 그간 저질렀던 소소한 잘못들이 숱하게 지나갔다. 허가받지 않은 땅에 몰래 무를 심은 일, 마구간 지붕을 규격보다 높게 지은 일, 심지어는 그 옛날에 공작님의 사유지에서 사과를 한 알 따먹은 것까지도.
“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지레짐작으로 겁에 질린 남자가 다짜고짜 땅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문틈으로 지켜보던 가족들이 깜짝 놀라 맨발로 뛰어나왔다.
“아버지!”
“여보!”
식솔들의 목소리에 남자는 더욱 애절하게 사정했다.
“원당을 사러 왔다.”
“제발 우리 가족만은……! 네?”
“한 자루당 금화 두 닢이다.”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 금화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멍하니 되묻던 그때였다.
“아니, 내가 못 살아. 여기서도 겁을 주고 계시네!”
후다닥 달려온 누군가가 기사의 등짝을 제법 매섭게 때렸다. 그녀의 어깨 위로 탐스러운 붉은 머리가 물결쳤다.
“그러면 안 된다고 말했잖아요! 소중한 판매자신데!”
“큭.”
낮게 신음한 기사가 그녀를 홱 돌아보았다. 으아아! 아, 아이도 있는데 설마 여기서 검으로 잔인하게……! 남자가 얼른 아들을 품에 안고 눈을 가린 그 순간.
“죄송합니다. 마니…….”
“또, 또!”
그녀가 허리에 양손을 올리더니 기사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렇게 몇 번이나 당부했는데, 마? 마아아아?”
“아, 죄송합니다.”
기사가 깜짝 놀라 황급히 사과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두 눈만 껌벅거리는데 붉은 머리 여자가 갑자기 그에게 다가왔다.
“히익.”
남자는 괴상한 신음을 내뱉으며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저앉은 그의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미안해요. 많이 놀라셨죠?”
그러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집에 보관하고 있는 원당이 있나요?”
“이, 있습니다!”
어리둥절한 남자 대신, 곁을 지키던 그의 아내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창고에 다섯 자루나 있어요!”
“좋아요!”
그녀는 양손으로 손뼉 치며 기쁘게 외쳤다.
“이 집이 신기록!”
그러고는 기사를 향해 고갯짓했다. 기사가 얼른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전부 파시지 않겠습니까?”
무자비함의 상징인 커다란 쇠 장갑 위에 금화 열 개가 들려 있었다.
“예? 예에…….”
홀린 듯이 손을 내밀자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남자의 두 손이 무거워졌다. 기사는 돈을 건네기가 무섭게 재빨리 움직여 창고에서 원당을 꺼내고 말에 싣기 시작했다.
“식사 시간에 실례했습니다.”
함께 온 여자는 부부를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고는 또 다른 기사가 끌고 온 말에 올라탔다. 말발굽 소리가 점차 멀어지더니 이내 골목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정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여보.”
“으, 응?”
남자와 마찬가지로 반쯤 넋이 나가 있던 그의 아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전 공작부인 말이에요. 그분이…… 붉은 머리에 붉은 눈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남자는 잠시 생각하다 거세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설마.”
“하지만 붉은 머리에 붉은 눈을 지닌 분이 그리 흔한 것도 아닌…….”
“아까 기사가 등짝 맞은 거 못 봤어?”
“아…….”
그 말에 아내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왜냐하면 전 공작부인께서는, 2년간 내내 저택에서 두문불출하셨을 정도로 소심한 분이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너무나도 잘못된 소문이지만 일반 서민들이 그것까지 알 턱이 없었다. 식사 시간에 불청객을 맞은 탓인지 아이가 곁에서 배가 고프다며 성화였지만, 부부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떠날 줄 몰랐다. * * *
“후후후, 좋아. 아주 좋아!”
현관 앞에 산더미처럼 그득히 쌓아 올린 자루들을 바라보며 나는 연신 웃음을 흘렸다. 내 예상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양이었다. 펠리어트가 자신을 호위하기 위해 함께 따라온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을 땐 깜짝 놀라 거절했지만, 솔직히 이번엔 그들의 활약이 컸다. 지레 겁을 먹은 영지민들이 앞다투어 원당을 팔아 주었으니까. 심지어는 부엌 찬장 속 단지에 보관 중이던 것까지 전부! 흐뭇한 기분으로 다시 한번 자루들을 세는데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나왔다. 가벼운 셔츠 차림의 펠리어트였다.
“대단한데.”
그는 산더미 같은 자루들을 바라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성공적인 수확이군.”
“그렇지?”
활짝 웃으면서 자랑하려던 찰나, 그가 다가와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자루는 나중에 세고 이제 그만 안으로 들어와. 저녁 식사 시간이 이미 한참 지났으니까.”
“응? 시, 식사?”
“당신 여기 와서 한 끼도 제대로 안 먹었잖아.”
음, 지금은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른 상태긴 한데.
“괜찮아. 아까 베티가 샌드위치 만들어 줘서 먹었…….”
“끼니 거르면 몸 상해.”
펠리어트는 제법 단호하게 내 말을 잘랐다. 누구보다 끼니를 제대로 안 챙길 것 같은 남자가 저런 말을 하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머뭇거린 것도 잠시, 나는 결국 펠리어트의 뒤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이윽고 도착한 다이닝 룸의 문을 열기도 전에, 펠리어트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저녁 메뉴는 당신이 좋아하는 거야.”
“내, 내가 좋아하는 거?”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하려던 때였다.
“그래, 일하느라 고생 많았으니까.”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쏟아졌다.
“어서 가자.”
그가 다시금 손을 내밀었고, 나는 홀린 사람처럼 맞잡았다.
무척이나 따듯한 온기가 손으로 스며들었다. 어디선가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겼다.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갈 정도로 맛있는 냄새였다. 복도 옆쪽에 설치된 커다란 화목 난로에서는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장작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하아.”
어쩐지 몸이 노곤해져 나도 모르게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게 힘들게 일하는 보람인가. 따듯한 집에 돌아오면 맛있는 요리가 차려져 있고, 다정하고 조신한 남편의 내조를 받으며……. 어?
“헉!”
나는 순간 머릿속을 스친 생각을 지우기 위해 고개를 크게 저었다. 펠리어트가 의아한 눈빛으로 돌아보았지만, 그마저도 신경 쓸 새가 없었다. 미쳤어. 지금 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거야!? 정신 차려! 로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