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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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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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깨달음
2022.05.25.
대륙 최고의 검사라 불리는 레어넌은 별명과 달리 손이 굉장히 예뻤다. 생김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손짓 또한 무척이나 세심하고 꼼꼼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손바닥은 온통 굳은살투성이였지만.
“다 되었습니다.”
위너드에게 맡겼다가 끝끝내 다시 풀려 버린 붕대는 그의 손을 거치니 원래의 모양을 되찾았다.
어찌나 완벽한 솜씨였는지, 처음 의사가 해 줬던 것보다 훨씬 나을 정도였다.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앉은 레어넌에게 로렐라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레어넌은 잠시 생각하다 덧붙였다.
“괜찮으시다면, 매일 와서 봐 드리겠습니다.”
농담처럼 들리도록 가볍게 말했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을 불쑥 입에 담은 이유는 안도와 반가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단둘이서 만난 건 퍽 오랜만이었고, 걱정과는 달리 그녀의 안색이 무척이나 밝았으므로.
로렐라는 당황한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얼굴을 보니 그의 머릿속에 익숙한 표정과 말투가 떠올랐다.
‘단장님께 그런 폐를 끼칠 순 없어요.’
늘 그렇듯 마구 손사래를 치거나,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겠지.
“그러면 사흘에 한 번씩은 어떨까요.”
평소처럼 양 뺨을 사랑스럽게 붉히면서…….
“네?”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한 레어넌이 다시 한번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의사가 그러는데…….”
그녀는 수줍게 눈을 내리깐 채 말을 이었다.
“너무 자주 갈아도 좋지 않다고…….”
“…….”
혹시 하는 마음에 레어넌은 다시 확인했다.
“정말로, 제가 와서 봐 드려도 괜찮습니까?”
특별히 의심이 많거나,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방금 했던 말이 공치사였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그녀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으니까.
여태 로렐라에게 해 주고 싶었던 일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대부분 수줍게 웃는 얼굴로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었다.
그래서……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단장님만 괜찮으시다면, 부탁드리고 싶어요. 단장님이 묶어 주시니까 움직이는 게 엄청 편하거든요.”
로렐라는 붕대를 감은 팔을 보란 듯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본 레어넌이 작게 웃었다.
어릴 때부터 기사들과 함께 지내 왔던 그는 붕대를 감는 일쯤은 눈감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고작 이런 일에 신기해하고 기뻐하는 그녀가 얼마나 예뻐 보이는지 모른다.
“안 그래도 의사에게 방문을 요청할까 하고 고민하던 차였는데…….”
“이런 간단한 일에 의사를 부를 필요가 뭐 있습니까.”
베르하르트 가문에는 상주 의사가 두어 명 있었지만, 메이레드 백작가는 아니었다.
그녀를 위해 가문의 의사를 불러 줄 수도 있겠으나 레어넌으로서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가 와서 봐 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어요.”
이번에도 로렐라는 주저하긴커녕, 자신의 제안을 솔직하고 순수하게 받아들여 주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던 레어넌은, 하마터면 제가 더 감사하다고 화답할 뻔했다.
* * *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요. 제가 오고 싶다고 했는걸요.”
로렐라는 바람에 흩날리는 탐스러운 머릿결을 손으로 정리하고는 레어넌을 향해 안심하라는 듯 활짝 웃어 보였다.
두 사람은 아우레아에 인접한 베렌이라는 소도시에 와 있었다. 아우레아만큼 번화하진 않지만, 유서 깊고 아주 아름다운 신전이 있는 곳이었다.
차만 마시고 일어서려던 레어넌의 계획이 이렇게 달라진 것은, 오늘까지 베렌에서 축제가 있어 길에 사람이 많다는 말에 로렐라가 눈을 빛냈기 때문이었다.
‘와, 축제라니! 가 보고 싶어요!’
‘하지만 아직 팔이 다 낫지 않았는데…….’
‘아프긴커녕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뭘. 여기서 마차로 30분 거리라면서요. 게다가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니……!’
함께 가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갈 기세였다. 결국 레어넌은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동행했다.
“끝나기 전이라서 정말 다행이에요.”
땅거미가 어둑어둑 지는 시간, 횃불을 걸어 놓은 수많은 천막을 바라보며 로렐라가 기쁘다는 듯 웃었다.
축제 마지막 날이니만큼, 거리엔 사람이 몹시 많았다. 사람들끼리 정신없이 부딪히는 상황에서도 로렐라만큼은 예외였다. 다친 팔은 물론, 누구도 그녀의 몸에 손가락 하나 스치지 않았다.
대륙 최고의 기사가 완벽하게 에스코트해 주는 덕분이었다.
덕분에 그녀는 아무런 불편함 없이 축제 구경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와아! 저기 보세요, 단장님!”
로렐라가 눈을 빛내며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들의 앞에는 고풍스럽고 위엄 있는 신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베렌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 신전의 커다란 벽면에는 빛으로 새겨진 말, 사슴, 고래 등 다양한 동물 장식이 있었다.
신전의 사제들이 신성력으로 만든 일시적인 장식인데, 베렌의 축제를 ‘빛의 축제’라 불리게 만든 가장 큰 이유였다.
“너무 아름다워요……!”
환한 불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옆얼굴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레어넌은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녀는 언제나 아름다웠지만, 오늘따라 어쩐지…… 좀 색다른 느낌이다.
왜일까.
함께 고원을 갔다 왔기 때문인가?
아니, 그런 이유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히 무언가가 달라진 것 같은데.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거리는 얼굴은 물론이고, 눈빛 또한 어딘가 모르게 미묘하게 변한 느낌…….
순간 로렐라가 그를 갑자기 휙, 돌아보았다.
당황하고만 레어넌은 본의 아니게 어색한 몸짓으로 시선을 피해 버렸다.
“단장님.”
“……네.”
그것도 모자라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는 민망함에 두 눈을 꽉 감았다 떴다.
“실은 단장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요.”
“제게요?”
“네.”
“가을에 제국 사절단이 구성된다고 들었어요.”
“아, 맞습니다.”
제국 사절단은 황제와 함께 외국을 순방하는 것은 물론, 때론 황제를 대신해 중요 외교 안건을 처리하기도 하는 중요한 단체였다.
전통적으로 사절단은 황실의 대사제와 성기사단장, 그리고 황제가 선임하는 세 명의 귀족들로 구성되었다.
레어넌 역시 황제의 부름을 받아 간 오찬에서 내용을 전해 들었다.
임명된 후에는 꽤 자주 자리를 비워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라, 언젠간 그녀에게 먼저 말을 하려고 했었는데…… 이 얘긴 갑자기 왜 묻는 것일까.
그는 조용히 로렐라를 바라보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마지막 남은 한 자리를 두고 황제 폐하가 고심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이미 어느 정도 유력한 후보를 정해 두셨겠죠.”
그녀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다시금 가지런히 뒤로 넘기면서 생긋 미소 지었다.
“하지만 아직 정식 발표가 난 건 아니죠.”
“그건…….”
“그 사람이 누군지, 단장님께서는 알고 계실 거란 생각이 들어요. 황제 폐하의 측근이시니까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레어넌 대신, 로렐라가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
“저는 그 자리에 제 이름을 올릴 생각이에요.”
그때였다.
커다란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색색의 빛이 번쩍였다. 빛으로 만들어 낸 수많은 동물이 하나씩 터지면서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답게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그 후보를 제치고…… 말입니까?”
“네.”
레어넌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고원으로 가셨던 거군요. 황실의 보물을 찾아, 그것을 폐하께 진상하려고…….”
그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로렐라가 지금까지 왜 그런 무모한 행동을 했는지, 모든 것을 말이다.
“겨우 보물을 진상하는 걸로는 부족하겠죠. 저 역시 공을 세운다고 해서 사절단 일원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들의 환호성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래서 미리 염두에 두고 있던 후보 대신, 저를 임명하겠다고 결심하실 만한 사건을 하나 만들어 보려고 해요. 보물은 그 결심을 굳혀 줄 계기가 될 거고요.”
커다란 소리가 들리며 빛이 번쩍일 때마다 로렐라의 동그란 이마가, 예쁘게 뻗은 콧날 위가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빛났다.
레어넌은 그 모습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혹시…… 황후 폐하 때문입니까?”
그는 한참이나 그녀의 미소 띤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심히 물었다.
“당신이 그런 결심을 하게 된 이유 말입니다.”
길게 말하지 않아도, 레어넌의 말에는 황실 오찬 때 있었던 일을 알고 있단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굳이 따져 묻지 않은 건 오히려 그것이 그녀의 자존심을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랬죠.”
“…….”
“감히 날 무시해? 두고 보자. 내 앞에서 두 번 다시 입도 벙긋하지 못하게 해 줄 테니, 하고요.”
“로렐라…….”
“아니, 멜로즈 부인과 황후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다 못해 아예 땅에 처박아 버려……!”
“자, 잠깐.”
누가 들을까 등골이 오싹해진 레어넌은 불끈 쥔 주먹을 부르르 떠는 그녀를 황급히 말렸다.
“분한 마음이 드셨던 거군요. 저 역시 충분히 이해합니다.”
“……뭐, 그땐 그랬다는 이야기죠.”
로렐라는 열을 식히기 위해서인지 크게 심호흡한 뒤 다시금 그를 향해 엷게 미소 지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은 계기일 뿐이죠. 목표가 좀 달라졌거든요. 그보다 훨씬 더 높은…….”
“더 높은…… 목표요?”
그때였다.
쿠웅!
좀 더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 대화가 묻힐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엄청나게 환한 빛이 마치 꽃잎처럼 하늘에 흩날렸다. 빛으로 그린 그림 중에 가장 큰 고래가 사라지는 소리였다.
“흐아앙!”
동시에 어디선가 서러운 울음소리가 터졌다.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니, 한 꼬마가 서럽게 흐느끼고 있었다.
“내 풍선!”
소리에 놀랐는지, 아이가 풍선을 놓친 모양이었다. 파란색 풍선이 하늘 높이 두둥실 날아가고 있었다.
“내 풍선 사라졌어, 허엉!”
그러자 아이를 목말 태우고 있던, 아마도 누나인 듯한 소녀가 웃으며 자신이 들고 있던 풍선을 건네주었다.
“뚝 하고 누나 풍선 가져, 응?”
“이건 빨간색이잖아. 내 풍선은 고래처럼 파란색인데! 히잉…….”
하지만 꼬마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칭얼댔다.
“이따가 나가서 새 풍선 사 줄게.”
“고래처럼 파란색으로 사 줄 거야?”
“그럼.”
누나의 상냥한 달램에 그제야 꼬마의 눈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던 맑은 눈물이 멈췄다.
아이는 제 손에 들린 빨간색 풍선과 고래 장식이 있던 벽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누나, 근데 저 고래는 어디로 간 거야?”
“저기서 사람들을 다 즐겁게 해 줬으니까, 이제는 쓸모를 다 해서 소멸된 거야.”
“소멸이 뭔데?”
“사라지는 거.”
그 말에 또다시 꼬마가 울먹였다.
“그럼 이제…… 또 못 봐?”
그러자 누나가 재빨리 덧붙였다.
“괜찮아. 내년이면 다른 예쁜 그림이 나타나서 우릴 더 기쁘게 해 줄 테니까!”
“정말……?”
“정말이고말고. 마음에 드는 게 새로 나타나면 고래는 금방 잊을 수 있을 거야.”
그제야 아이는 마음이 나아졌는지, 빨간색 풍선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그 정다운 광경을 잔잔한 미소와 함께 바라보던 레어넌의 눈이 다시금 로렐라를 향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남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살짝 떨리는 입술과 심각한 기색이 스민 눈동자, 조금 찌푸린 미간 위를 따라 차례대로 시선을 옮기던 찰나였다.
“그 목표를 이루고 나면…….”
그녀의 입술이 조용히 움직였다.
“이유도 없이 사라져야만 했던 것들을 반드시 되돌려 놓겠어요.”
중얼거리듯이 말했으나 그 어느 때보다도 강인한 속삭임이었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혼잣말이었으나, 의문 따윈 품을 새가 없었다.
터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아름다운 색색의 빛을 오롯이 받으며 서 있는 로렐라에게 온통 시선을 빼앗긴 덕분이었다.
사방이 빛으로 가득한데도, 그녀가 가장 환히 빛나고 있었다.
마치 태양을 손에 들고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도 모자라 황홀하기까지 한 모습에 레어넌은 거세게 주먹을 쥐었다.
어느샌가 커져 버린 마음을 더 이상 외면할 수가 없었다.
“황제 폐하의 측근이 되어 사절단에 발탁되고 싶은 건…… 진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군요.”
찬란하게 빛나는 그녀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어쩌면…… 단장님이 지켜 오신 정의와는 전혀 다른 일이겠죠. 다른 사람의 자리를 빼앗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말을 마친 로렐라가 눈을 살포시 아래로 내리깔았다.
바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곧 다가올 계절에 숲을 뒤덮을 단풍처럼 붉어진 뺨이, 그리고 여전히 봄이 머물러 있는 듯한 연분홍빛 입술이 차례차례 두 눈에 들어온 순간.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당연히 도와드리겠습니다.”
레어넌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곁으로 성큼 다가섰다.
“좋아하니까요.”
“아, 정말 그래 주신다면 너무나도 기쁠…….”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인 것도 잠시.
“……네?”
로렐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바, 방금 뭐라고…….”
놀라움이 스민, 별처럼 빛나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저 또한 깨달았습니다.”
내내 가둬 놓았던 마음이 이젠 도무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 흐르고야 말았다.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여자의 부탁도 들어주지 못하는 정의 따위는 필요 없다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