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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왜 네 명인 건데?! (93/173)


93화. 왜 네 명인 건데?!
2022.05.21.


커튼 사이를 뚫고 들어온 눈부신 아침 햇살이 고풍스러운 집무실 안으로 스며들었다.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은 천천히 움직여, 찬란한 금발 위를 뒤덮었다. 아름다운 금색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더 화려하게 빛났다.

레어넌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커튼을 치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는 손을 들어 미간을 꾹꾹 주무르듯 눌렀다.

짙은 피로가 몰려왔다. 벌써 며칠째 밤을 샌 탓인지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의 부관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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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님, 괜찮으십니까?”

부관은 레어넌의 안색을 보자마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얼굴에 도무지 감추지 못한 피로가 가득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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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며칠째 쉬시지도 못하고 몰두하셨잖습니까. 그러니 오늘은 좀 들어가 쉬시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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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괜찮다.”

레어넌은 부관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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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내가 지시한 건 어떻게 되고 있지?”

부관은 곧장 품에서 두툼한 서류 하나를 꺼내 레어넌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마치 훔쳐 듣는 사람이라도 있는 양 은밀히 목소리를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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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본 결과, 제국 서부에서만 자생하는 나무로 만든 화살대였습니다. 다른 나무보다 훨씬 가벼우면서도 튼튼해 서부 장인들이 독점하고 있다고 하니, 근방 귀족 중 누군가가 주문한 화살일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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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라…….”

아름다운 벽안이 냉철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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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무로 화살대를 만드는 장인들의 고객 명부를 입수해야겠군. 바로 출발할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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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입니다, 단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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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서부 쪽에 업무 일정을 미리 잡아 줘. 이 일이 공공연하게 소문이 나서 좋을 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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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받들겠습니다!”

부하가 절도 있게 인사를 건넨 그때였다. 밖에서 집무실 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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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단장님! 실례합니다……!”

어쩐지 다급함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레어넌이 고갯짓하자 부관이 재빠르게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 앞에는 헐레벌떡 달려왔는지 마구 숨을 몰아쉬고 있는 기사단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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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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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죄송합니다. 그게…… 단장님을 뵙길 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뵙기를 원하는 사람들?

레어넌은 눈썹 한쪽을 올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복도를 지나, 밖으로 나가자 그의 눈앞에 실로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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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여기 거래 장부입니다! 이걸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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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그저 화살촉을 납품한 죄밖엔 없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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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얼마든지 협조하겠습니다. 그러니 목숨만은……!”

웬 처음 보는 남자들이 기사단 정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부짖고 있었다. 모두 두꺼운 서류를 쥔 채였다.

뭐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레어넌에게 단원이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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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에서 왔답니다. 귀족들을 상대로 화살을 만들어 납품하는 자들이라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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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레어넌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고원에서 돌아오자마자 로렐라에게 활을 쏜 범인을 잡기 위해 바로 조사에 착수했지만, 그건 매우 은밀하게 이뤄졌다.

귀족 영애가 화살에 맞았다는 이야기가 밖으로 퍼졌다간 로렐라에 대해 호사가들이 무슨 이야기를 떠들지 모른다는 걱정도 있었지만, 정말 중요한 건 다른 이유였다.

이 일을 멋대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분명 생겨날 테니까.

서부와 사이가 좋지 않은 북부 귀족들은 물론, 가문 대 가문으로 세세히 들어가면 각종 알력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니 당사자인 로렐라와는 아무 상관 없이 자기들 입맛대로 사건을 확대해석하고, 여론을 조장하려들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렇게 되면 기껏 평화를 되찾은 제국에 다시 시끄러운 분란이 일 테고, 그 중심엔 당연히 로렐라의 이름이 있을 것이다.

레어넌은 그것만큼은 막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성기사단이 움직이는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지 않게끔 신임하는 몇몇 부하들에게만 지시해 조사를 진행했다. 단단히 일러두었으니 외부로 소문이 퍼질 여지조차 없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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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데려와.”

레어넌은 혼란은 잠시 접어두고 단호히 명령했다. 무릎 꿇은 남자들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 단원들의 눈이 너무 많았으니까.

그들은 기사단원의 뒤를 따라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안도의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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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살았다, 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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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마……!”

살았다고? 그보다, 악마라니. 대체 누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레어넌의 머릿속에는 끊임없는 의문이 샘솟았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낼 수는 없어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들에게 단호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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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이곳에서 거짓을 고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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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나지막한, 그러나 뼈 있는 경고에 그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마구 손을 내저었다. 그러더니 뭐라 묻기도 전에 품에 안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위로 척척 올려놓았다.

레어넌이 턱짓하자 수하가 서류의 내용을 살폈다. 모두 고객 명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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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가 시작됐다는 걸 알 리가 없는데, 이걸 미리 들고 왔다고?’

오히려 의문은 커져만 갔다.

심지어 그들이 가지고 온 건, 뭐가 필요한지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조사에 필요한 ‘귀족 고객’의 명부였다. 장인들에겐 목숨과도 같은 물건인지라, 이렇게 함부로 가지고 올 것이 아닌데도.

그뿐만 아니라 화살의 상태를 직접 살펴 가며 적극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기억을 되살려 뭐 하나라도 더 증언하려 애쓰는 등 최선을 다해 레어넌을 도왔다.

혹시나 누군가가 자신의 눈과 귀를 가리려 작정한 것일까 봐 쉽사리 의심을 풀지 않던 레어넌도 결국엔 그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범인의 정체는 오래 지나지 않아 곧 밝혀질 듯하지만…….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증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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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누가 당신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지시한 겁니까?”

성기사단에서 이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는 물음에, 장인들 전부 ‘누군가’가 알려 줬다고 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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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마라는 게, 누구죠?”

그러나 몇 번이고 물어도 그때마다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 * *

자신의 침실에서 누군가를 맞닥뜨린 로렐라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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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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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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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것도 두 번씩이나, 연달아서.

그녀는 신기한지 남자를 가운데 두고 빙빙 맴돌았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눈동자는 그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힘준 듯한 그의 옷에서.

결국 위너드는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헛기침하며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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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어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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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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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이렇게 차려입었어?”

로렐라가 뒷짐을 진 채 눈을 빛내며 그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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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망토까지는 너무 과했나.’

위너드는 뒤늦은 후회를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화려한 정복과 맞춘, 금사가 아름답게 수 놓인 보랏빛 망토를 구겨 쥐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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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일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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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차. 정곡을 찔린 탓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고 말았다.

그러자 순간 로렐라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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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팔이나 줘. 저택에서도 꾸준히 치료해야 한다고 의사가 그랬으니까.”

죽을힘을 다해 평정을 유지하느라 조금 퉁명스레 대꾸한 게 마음에 걸렸지만, 다행스럽게도 로렐라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침대에 나란히 앉아 통 넓은 소매를 걷어 올리자 하얀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가느다란 팔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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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너드는 붕대를 살살 풀어 내린 뒤, 드러난 환부에 조심스레 연고를 발라 주었다.

사실 치료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간단한 처치였다.

달리 할 것도 없이 연고만 바르면 되는 거였으니까. 이제 다시 붕대를 원래대로 감기만 하면 끝이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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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귓가에 웃음소리가 나지막이 스민 순간, 그의 손이 멈칫했다.

동시에 붕대가 또다시 힘없이 풀렸다.

이걸로 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위너드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며 다 풀린 붕대를 재빨리 둘둘 감았다.

어쩐지 마음대로 쉽게 되질 않았다. 겨우겨우 감은 붕대는 처음 로렐라가 하고 있던 것과는 달리 엉망진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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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내자한테도 못 하는 게 있었네.”

팔을 맡긴 채 얌전히 앉아 있던 로렐라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또다시 장난스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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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이건 조이한테 부탁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짓궂게 놀리는 듯한 말투도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위너드는 왜인지 초조해지는 마음을 좀처럼 억누를 수가 없었다.

미친 듯이 뛰는 제 심장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조마조마했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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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무 말이 없어?”

윤기 흐르는 붉은 머리가 눈앞에서 살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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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

그는 슬쩍 시선을 돌리며 낮게 헛기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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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건 보통 시종들이 해 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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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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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니야.”

황급히 말을 얼버무리는 모습이 이상했던지, 로렐라가 걱정스레 미간을 찌푸렸다. 또다시 요동치는 심장 박동에 위너드는 아프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정신 좀 차리라고,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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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식은 많이 팔고 볼 일이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렐라는 까르르 웃으며 종알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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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만 주 팔았다고 이렇게 대우가 달라질 줄이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이렇게 손수 붕대까지 갈아 주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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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위너드가 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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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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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오로지 결과만 중시하는 이 냉혹한 세상.”

그녀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표정엔 장난기가 가득했지만, 위너드의 눈엔 그런 건 보이지도 않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억울함이 그의 마음속에 차올랐다.

하루가 멀다고 나타나 그녀의 상태를 살피고, 연고를 발라 주고, 서툰 솜씨로나마 직접 붕대를 감아 준 건, 당연하게도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누구보다 그녀를 걱정하고 있으니까.

다친 곳이 빨리 낫기를 바라니까!

그런데 네게 잘해 주는 게 그저, 주식을 많이 팔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고작 그런 이미지였어?!

할 말이 태산 같았지만, 위너드는 단 한 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그저 땅이 꺼지라고 한숨만 내쉬었다.

……그런 이미지겠지.

가슴에 손을 얹고 그렇게 보이지 않을 거라 할 수는 없었다. 그래, 그렇긴 한데!

주식을 팔라고 잔소리를 했던 것도 엄연히 로렐라를 위한 일이었으니, 억울한 마음이 안 들 수가 없었다.

그녀가 소멸하지 않으려면 주식을 팔아야만 하니까, 그걸 위해서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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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런데 그때, 로렐라가 갑자기 외마디 탄성을 내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시선이 벽에 걸린 시계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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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위너드가 매어 주던 붕대는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풀어졌다. 형편없이 둘둘 감기만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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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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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니. 레어넌 단장님이 오실 시간이잖아.”

구겨진 치맛자락을 펴고 삐뚤어진 리본까지 갈무리한 그녀가 그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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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서신을 받았거든. 걱정되니 만나러 오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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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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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어차피 내가 말 안 해 줘도 다 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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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지만…….”

애매한 대답에 위너드의 표정을 의아한 듯 유심히 바라보던 로렐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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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럼 잘 가, 안녕!”

잔혹하리만치 밝은 인사를 남긴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람처럼 달려 나가 버렸다.

덕분에 위너드는 순식간에 혼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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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이걸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짜증스럽게 머리를 넘기는 손길과 더불어 입에선 애달픈 한숨이 쏟아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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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말씀하신 대로 응접실로 모셨어요. 차도 금방 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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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고마워, 조이.”

언제나 그렇듯 바지런하고 성실한 그녀에게 상냥한 미소로 화답하며 한 가지 부탁을 곁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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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혹시 모르니 내 차는 진통제 성분이 든 걸로 준비해 주지 않을래?”

괜찮을 거라곤 생각하지만, 그래도 고원에서의 사건 이후 처음으로 레어넌을 만나는 자리였다.

직접 화살을 빼 줄 때는 물론, 피투성이였던 상처를 지혈해 줄 때도 일말의 동요가 없었던 그의 눈빛이, 의사에게 치료를 받고 난 후에야 비로소 무너지듯 흔들렸던 것이 떠올랐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그를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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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죠, 아가씨. 바로 가져다드릴게요.”

조이는 그 말을 남긴 채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나는 응접실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중간 정도까지 왔을 때, 또다시 발이 우뚝 멈췄다.

레어넌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얼른 가야 하는데…….

난간을 잡고 있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갑자기 주식이 팔리면서 눈앞에 나타난 시스템 창 때문이었다.

「‘일처다부제’님이 40만 주를 구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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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화면 속 글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초면이지만 언니 정말 최고예요. 너무 좋아요.」

그래, 좋아해 줘서 고마워요.

고맙긴 한데…….

「‘일처다부제’님이 애걸복걸하며 또다시 40만 주를 추가 구매합니다.」

「언니, 그냥 네 명이랑 다 같이 살아 주시면 안 될까요? 네?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다, 다 같이 살라뇨!

……그보다 어째서 네 명인데요?

펠리어트, 레어넌, 카셀……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대체 누구냐고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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