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내가 미쳤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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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내가 미쳤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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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내가 미쳤나 봐
2022.05.18.
세이블은 조용히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는 로렐라 메이레드와, 소파에 앉아 석상처럼 굳어 있는 그녀의 안내자가 눈에 들어왔다.
머릿속에서 기묘한 울림이 멈추질 않았다.
세이블은 혼란스러웠던 시선을 로렐라에게 다시금 고정했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새빨간 노을 속에서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고 누구보다 자신만만했으며, 한결같이 반짝이는 눈빛을 띠고 있었다.
마치 사로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다.
만약 자신이 ‘그들’ 중 하나였다면, 단숨에 매료되어 그녀의 주식을 샀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만큼.
그때,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리고 있던 롯지가 다급히 세이블의 발치에 무릎을 꿇더니 애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세이블 님! 빨리 약속을 철회하세요, 네?!”
비록 로렐라가 먼저 필요 없다고 말했다 해도, 세이블 본인의 입으로 정확히 하는 것이 더 안전할 거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어서요! 로렐라 님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요!”
롯지가 연신 채근했지만, 세이블은 그저 은은한 미소만 띤 채 차를 홀짝였다.
그녀의 안내자는 라이벌인 로렐라에게 주식을 넘겨주면 안 된다고 했다. 주식을 넘기겠다고 약속한 이후에도 어떻게든 세이블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었다.
‘라이벌이라.’
하지만…….
‘나와 그녀를 라이벌이라 할 수 있을까?’
바로 용병을 구해 고원으로 향한 행동력부터 도적들과 오스널을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게 만든 기지, 그리고 부상을 감내했던 용기까지.
그저 복수만을 위해 움직였던 자신과는 달리, 로렐라는 이미 외적으로도 그리고 내적으로도 훌륭한 주인공 그 자체였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오늘 그녀의 당당한 모습은, 아마 평생 뇌리에 남을 것이다.
세이블은 찻잔을 잔 받침 위로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놓인 아름다운 장미 화병을 응시하며 조용히 물었다.
“로렐라 님, 마지막으로 여쭙겠습니다.”
“…….”
“정말 없던 일로 해도 괜찮으시겠어요?”
“……헛.”
순간 로렐라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혹시 고민하는 걸까.’
그래, 그럴 수도 있다.
비록 말은 그렇게 했어도 누구보다 주식에 진심인 로렐라 메이레드라면 충분히 아까워할 수 있는 일…….
“흐어엇!”
……뭐지?
순간 이상함을 느낀 세이블은 고개를 위로 들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건, 주먹을 불끈 쥔 채 허공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탄성을 지르고 있는 로렐라였다.
“와, 씨. 미쳤다! 500만 주!”
“…….”
“시, 신기록……!”
세이블뿐만 아니라, 롯지도 어느새 황당함이 역력한 눈으로 로렐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그녀에겐 어떠한 말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흥분했는지는,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세이블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찻잔을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사람의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 * *
“차 잘 마셨어요.”
깨끗하게 찻잔을 비운 세이블이 언제나 그렇듯 흠잡을 데 없는 우아한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
“더 이상 폐를 끼칠 순 없으니 일어나 보겠습니다.”
나는 그녀를 배웅하려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걸음을 맞춰 나란히 복도를 걷다가,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세이블, 만약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이야기해. 알았지?”
뭐든 도와줄 테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세이블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무감하고 냉정한 눈빛이었다.
그걸 보니 그녀의 대답을 듣지 않아도 이미 알 것 같았다.
“글쎄요. 더 이상 도움받을 일은 없을 것 같군요.”
역시, 이것 봐.
함께 생사까지 넘나들었는데도 여전히 차갑기만 한 저 말투……. 하여튼 쌀쌀맞다니까.
“하지만 만약 필요하다면, 로렐라 님께 가장 먼저 부탁드릴지도 모르겠어요.”
응?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아니, 의심스러운 건 내 두 눈도 마찬가지였다.
세이블의 입가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진짜 친구를 바라보듯, 몹시 친근한 눈빛과 함께.
“앞으로 3주 정도면 될 겁니다.”
곧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간 세이블이 결연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3주 후에는…… 모든 게 바뀌어 있을 거예요.”
3주라. 너무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내게도 딱 적당한 시간이었다.
좋아. 그럼 나도 거기에 맞춰 일을 진행해야겠지.
“찾아낸 황궁의 보물을 어떻게 이용하시려는 건지는 몰라도…….”
세이블이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릴리 후작가의 새 가주가 로렐라 님의 뒷배가 되어 드리겠어요.”
그 누구보다도 든든한 응원군의 목소리였다.
* * *
현관으로 나가자 눈에 익은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세이블을 위해 내가 준비한 마차였다.
나는 마부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오르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차창을 사이에 둔 채 세이블과 짧게 눈빛을 교환하자마자 마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가 저 멀리 대문 밖으로 사라질 때 즈음, 나는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급히 들어갔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내가 주식을 받지 않겠다고 말한 후부터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나와 세이블을 지켜보고만 있었던 위너드가.
문을 열고 응접실로 들어서니 다 마신 찻잔을 치우고 있는 조이가 보였다.
“어머, 아가씨.”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눈웃음을 지었다.
“혹시 뭐 두고 가신 거라도 있으세요?”
위너드는 여전히 소파에 우두커니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다. 조이는 그가 보이지 않는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얼른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부탁했다.
“조이, 차를 새로 내어 줄래? 다과도 곁들여서 말이야.”
“네?”
“계속 바빠서 그런가, 혼자서 좀 여유롭게 즐기고 싶어서. 손님도 돌아갔잖아.”
내 말에 조이는 이해했다는 듯 활짝 웃고는 알겠다는 말을 남긴 채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 위가 또다시 그득히 채워졌다.
나는 조이가 차를 가득 따라 준 찻잔을 위너드 앞으로 내밀었다. 따듯한 찻물에서 향기로운 장미 내음이 피어올랐다.
“저기…….”
“…….”
“위너드.”
몇 번 헛기침을 한 후에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러 봤지만,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도 그대로였다.
“많이…… 화났어?”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묻긴 했지만, 나도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이었다.
당연히 화가 났겠지.
아무런 상의도 없이 멋대로 100만 주를 포기해 버렸으니까.
특히나 위너드는 이번 일을 위해 누구보다 많은 애를 써 주지 않았나.
그 사막처럼 무덥고 건조한 고원에서 행여나 카셀이나 레어넌 단장님에게 얼굴을 들킬세라 온종일, 심지어는 잘 때조차 마음 편히 복면도 벗지 못했다.
어쩔 땐 능글맞고, 또 어쩔 땐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지만, 위너드는 누구보다 내가 주인공이 되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최대한 나를 도와준 거겠지.
그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지금 그가 어떤 기분일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차가 싸늘히 식어만 갔다.
‘어떻게 하지.’
늘 티격태격하던 사이였기에, 이런 분위기가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찻잔을, 쿠키를, 그리고 크림을 곁들인 과일 접시를 그의 앞으로 차례대로 슬쩍슬쩍 밀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데…….
“화나지 않았어.”
마침내 열린 입술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그리고 나 역시…… 옳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해.”
나는 얼른 고개를 들며 물었다.
“저, 정말이야?”
“그래. 나는, 그 무엇보다 네 선택과 의사를 존중해.”
여전히 눈을 맞춰 주지는 않지만, 그의 목소리만큼은 한결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너라면 그렇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그랬구나!”
나는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리며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내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의 굳은 표정을 보면서 죄인이 된 듯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함께 노력해 준 사람을 배신한 것 같아 한쪽 가슴이 따끔거렸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야 한결 마음이 놓였다.
위너드가 화를 내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줄곧 마음 한구석에서 믿고 있었던 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에.
그 어떤 연기도, 꾸밈도 없는 ‘로렐라 메이레드’를 알고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역시 위너드뿐이었다.
나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활짝 웃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난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주식에 기대지 않을 거야.”
“그래.”
그러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세이블의 주식을 받지 않은 것도 그런 각오를 다지기 위해서였고.”
“알고 있어.”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그의 입가에 그림 같은 미소가 천천히 번져 나갔다.
“그리고…….”
나는 먹음직스러운 쿠키를 재차 위너드의 앞으로 밀어 주며 얼른 덧붙였다.
“결과적으로 훨씬 더 많은 주식을 벌 수 있었잖아?”
비로소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잘했어.”
그는 한쪽 눈썹을 장난스럽게 올리며 평소처럼 받아쳐 주었다.
“그래야 내 주인공이지.”
왜인지…… 눈빛만큼은 여전히 좀 딱딱했지만.
하지만 익숙하고 편안한 말투에 완전히 안도한 나는, 의구심은 밀어 넣은 채 그를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
위너드가 날 이해해 주었다는 사실에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한 나는, 그의 옆쪽으로 조르르 달려가 앉았다. 그러고는 손을 덥석 잡으며 살갑게 눈웃음 지었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우리 둘이서 고원에 다녀온 회포를 풀어 보…….”
그때였다. 위너드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미안.”
“응?”
“급한 일이 생겨서 가 봐야겠어.”
또다시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바람이 일었다. 풀어 내린 머리가 휘날릴 정도로 거센 바람이었다.
“어. 그, 그래…….”
어느새 홀로 남은 방 안에 뒤늦은 대답만 조용히 울렸다.
* * *
로렐라의 저택에서 북쪽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진 아르실리아 해안에는 망치처럼 우뚝 튀어나온 지형이 하나 있었다.
바로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빌로그 곶이었다.
사시사철 두꺼운 얼음으로 뒤덮인 절벽은 하루에도 몇 번씩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때문에 사람이 절대로 접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는 놀랍게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무척이나 오래 서 있었는지, 그의 갈색 머리와 두툼한 털을 덧댄 망토 위에는 새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하…….”
남자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자,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이건 말도 안 돼.”
멍하게 중얼거린 남자가 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아니, 미친 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까지 거세게 내저어 봤지만, 머릿속에 들러붙은 목소리는 도저히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식을 팔아 주인공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주식이 팔리는 거야.’
아니, 그뿐만 아니라 노을을 받아 빛나던 그녀의 붉은 머리와 당당한 표정까지 전부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얼굴을 문지르던 손이 우뚝 멈췄다.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거세게 뛰었다. 얼음처럼 찬 칼바람에 식어 가던 그의 두 뺨에도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따위로는 식힐 수도 없을 만큼 뜨거운.
그동안 쭉 일부러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젠 그마저도 소용없게 되어 버렸다.
그래.
진짜로, 완벽하게 반한 거다.
“이건 정말…….”
그것도, 내 후보에게.
“……완전히 미친 거라고!”
마치 앓는 듯한 커다란 외침이 허공으로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