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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내가 제일 잘하는 게 뭔지 알잖아? (89/173)

89화. 내가 제일 잘하는 게 뭔지 알잖아? 2022.05.07.

세이블이 데려온 검은 복면을 쓴 남자들은 나타났을 때 그랬듯 이번에도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버렸다. 오스널과 그의 호위들을 데리고서. 그들이 누군인지, 어디로 사라진 건지, 오스널을 어떻게 하려는 건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굳이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하리라. 다이아몬드를 소중히 주머니에 집어넣은 뒤, 말 안장에 오르는데 문득 세이블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16550631001633.jpg ‘전부 죽일게요. 이럴 때를 대비해 특별히 고용한 자들이 있으니 금방 끝날 거예요.’

  말도 안 되는 통행세를 뜯어 내려던 도적들 앞에서 그녀는 그렇게 소곤거렸다. 검은 복면을 쓴 남자들은 아마 그때 얘기한 사람들일 거다.

16550631001641.jpg ‘……안 그러길 잘했지.’

나는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세이블이 도적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했다면, 오늘 같은 계획은 꾸미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를 내내 미행했던 오스널이라면 그 광경도 분명 목격했을 거고, 그렇다면 이렇게 무방비하게 행동하지 않았을 테니까.

16550631001633.jpg “가실까요?”

그때 곁에서 옥구슬이 쟁반에 굴러가는 듯 예쁘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을 보니 세이블이 날 향해 생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16550631001633.jpg “그날 밤, 오스널이 무사히 도망쳐서 다행이에요.”

16550631001641.jpg “…….”

16550631001633.jpg “어쩜 그 사람은 그걸로 행운을 다 써 버린 건지도 모르겠네요.”

뭐? 행운? 가만히 얘기를 듣자 하니 좀 빈정이 상했다. 그건 행운이 아니라 내 덕이지! 나에게서 나침반을 뺏어 간 오스널이 우리 대신 보물을 찾을 수 있게끔 그를 무사히 탈출시켜 준 내 덕! 나중에 알게 된 건데, 그날 밤 야영지에서는 내가 사라진 뒤 큰 소동이 일어났다고 했다. 나를 찾아야 한다며 무작정 자리를 박차고 나선 펠리어트를 위너드가 말렸지만 조금도 먹히지 않았고, 조용히 채비하는 레어넌 역시 세이블이 붙잡았지만 그 또한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두 남자는 일사천리로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고, 오래 걸리지 않아 수상한 발자국을 발견하고는 곧장 말을 몰고 달려 나가 버렸다고. 물론 위너드와 세이블도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해 보려고 열심히 쫓아가는데, 와중에 어떻게 알았는지 시엘로 단장을 비롯해 용병들이 그들의 뒤를 따랐단다. 특히 어떤 한 용병이 유독 바람처럼 말을 몰아 어느새 두 사람을 제치고 심지어는 앞서가던 펠리어트와 레어넌까지 가볍게 따라잡았다나 뭐라나. ……아무래도 그때가 안경으로 본, 누군가가 세이블 곁을 바람처럼 지나치던 광경인가 보다. 흩날리던 은빛 머리칼이 아직도 생생했다.

16550631001641.jpg ‘차라리 세이블이 고용한 사람들에게 잡힌 게 오스널에게도 훨씬 다행스러운 일일 거야.’

진심이다. 냉혹하기로 유명한 북부 공작이나, 정의에 반하는 자에겐 누구보다 가혹한 성기사단장 그리고 제발 죽여 달라고 애원할 정도로 사람을 초주검으로 만드는 검은 뱀 길드의 길드장보단 그편이 훨씬 낫고말고. * * * 고원에서 벗어나는 길은, 과장을 좀 보태 마치 ‘말 타고 좀 멀리까지 산보를 나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말하자면, 그만큼 순탄하고 평안한 여정이었다는 거다. 물론 고원 깊숙이 들어온 탓에 다시 나갈 때도 며칠씩 야영해야 했지만, 처음처럼 힘들지는 않았다. 무리를 지어 서식하는 이리 떼들은 그간 다른 동족들이 당한 걸 전해 듣기라도 한 듯 어쩌다 우리와 마주쳐도 꼬리를 다리 사이에 말아 넣고 슬금슬금 도망치기 바빴다.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사령들도 마찬가지였다. 레어넌이 검을 휘두르기만 해도 앞다투어 땅 밑으로 기어들어 갔으니까. 비록 머리와 가슴은 없어도 상대와의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알아차릴 정도의 눈치는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는 그마저도 허용하지 않고 죄다 사라지게 했지만. 용병들은 무사히 임무를 마쳤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돌아가는 길 내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뿐만 아니라 위너드와 레어넌, 펠리어트도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한결 편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내 미간에는 여전히 깊게 팬 주름이 자리했다. 세이블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돌아가던 와중, 그녀가 심어 놓은 사람이 보낸 전서조가 날아왔다. 다리에 묶여 있던 쪽지엔 도저히 웃고 넘어갈 수 없는 정보가 담겨 있었다. 에어리스 릴리가 후작가에서 자취를 감추었단다. 심지어는 그녀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한다. 정보원조차 찾지 못해 애먹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내겐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그런’ 장면을 두 눈으로 직접 봤으니 피가 거꾸로 솟을 만도 하지. 패배를 인정하고 세이블을 피해 숨은 건 당연히 아닐 테고, 그렇다면 남은 건 뻔한 것 아닌가? 같은 곡인 것 같기도 하고, 완전히 다른 곡인 것 같기도 한 용병들의 콧노래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던 나는 슬쩍 말을 몰아 세이블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16550631001641.jpg “세이블. 내가 다시 한번 고민해 봤는데 말이야…….”

16550631001633.jpg “로렐라 님이 고민하실 문제가 아니에요.”

변함없이 차가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16550631001633.jpg “그 의견엔 찬성할 수 없다고 분명 여러 번 말씀드렸을 텐데요.”

거참, 칼 같구먼. 하지만 이건 ‘대어’를 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왕 칼을 뽑은 거, 오스널의 목만 치긴 아깝잖아!

16550631001641.jpg “세이블, 착각하는 모양인데…….”

16550631001633.jpg “…….”

16550631001641.jpg “말했잖아. 아무 대가도 없이 널 돕는 게 아니라고.”

16550631001633.jpg “뭘 얼마나 대단한 대가를 요구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그녀는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타이르듯 말을 이었다.

16550631001633.jpg “에어리스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자예요.”

16550631001641.jpg “물론 그렇겠지. 나도 잘 알고 있어.”

언니의 약혼자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뻔뻔하게 고개까지 들고 다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16550631001633.jpg “아뇨, 제가 말하는 것과 로렐라 님이 아는 것은 달라요.”

16550631001641.jpg “악녀라면 나도 일가견이 있…….”

16550631001633.jpg “그 애에게 사람 하나 죽이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닌 척하곤 있지만 악독하고 잔인하기 그지없죠.”

그 이야기 앞에선 나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녀의 우려도 이해는 됐다. 에어리스는 세이블이 주인공인 이야기 속에서 보스 몹이나 마찬가지니까. 아마 오스널과는 차원이 다르겠지. ……내가 알 수 없는 일을 아마 많이 겪었을 테고. 세이블은 더 이상 나와 말을 섞지 않겠다는 듯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16550631001633.jpg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

하지만 나는 그녀의 고요한 혼잣말을 놓치지 않았다. 재빨리 말의 고삐를 움직여 앞쪽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말머리를 돌려 뒤를 돌아보며 조용히, 그러나 한 자 한 자 힘주어 읊조렸다.

16550631001641.jpg “내가 제일 잘하는 게 뭔지 이젠 너도 잘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16550631001633.jpg “…….”

16550631001641.jpg “말했잖아. 날뛸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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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정적인 순간에 에어리스의 가면을 벗기는 건 세이블이어야만 했다. 그러니 나는 이번에도 약간 도와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내게도 조금 각오가 필요한 계획이긴 하지만. 그런데도 세이블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입술만 꼭 깨물 뿐. * * * 언제나 순진하게 데구르르 굴렸던 눈에는 시뻘건 핏발이 서 있었다. 맑게 갠 하늘보다 더 아름답다며 다들 칭송을 마지않던 연한 푸른빛 눈동자에도 살기가 번뜩였다. 가보를 빼앗겼을뿐더러, 손아귀에 넣었다고 믿었던 남자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배신했다. 에어리스의 잇새로 이를 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보낸 이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안경알은 들여다봐도 무언가 덮어 둔 듯 어둡고 까만 장면만을 보여 주었다. 간혹 움직일 때 빛이 새어 들어와 그 위에 검은 천을 씌웠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질 나쁜 장난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치워 두기엔 걸리는 것이 많았다. 세이블이 가보를 찾길 바라지 않는다면 꼭 들여다보라는 짧은 글귀 탓이었다. 에어리스는 초조한 마음에 내내 안경알을 들여다보았다. 간혹 검은 천이 벗겨져 수많은 용병과 드넓은 고원의 풍경이 보였다. 씻기 위해 샘에 들린 듯, 수면에 비친 얼굴을 보고 나서야 이걸 보낸 이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이복언니, 세이블 릴리. 도대체 왜 이걸 보냈는지 몰라도 최소한 좋은 의도로 보내지 않았음을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았지만 에어리스는 안경알을 손에서 뗄 수 없었다. 세이블이 용병을 모아 가보를 찾기 위해 고원을 돌아다니고 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애가 탔다. 그래서 행여 놓치는 게 있을까 봐 식사는 물론, 밤잠조차 잊은 채 줄곧 안경알을 들여다보았다. 기어코 그녀가 보게 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결말이었다. 오스널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세이블에게 가보를 내밀었다. 아주 뜨겁고 열렬한 눈빛으로. 소리까지 들리지는 않아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오스널은 그녀를 배신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세이블에게 자신이 찾은 가보를 내밀 리가 없다. 에어리스는 얼마 후에 열릴 원로회에서 세이블을 완전히 깔아뭉개고 곧바로 가문에서 추방할 계획을 짜 두었다. 이미 준비는 모두 끝났다. 무척 고단한 일이었으나, 그걸 위해 원로회의 중요인물까지 모두 포섭을 마쳤다. 그 뒤 패배감에 절어 괴로워하는 세이블의 모습을 한껏 비웃으며 숨통을 끊어 줄 생각이었는데…….

16550631001633.jpg ‘가보를 뺏기는 건 예상 밖의 일이지만, 계획을 수정할 정도는 아니야.’

애써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 봐도 맹렬하게 차오르는 분노가 에어리스의 두 눈을 멀게 했다. 도저히 씹어 삼킬 수도 없을 정도로 들끓는 감정에 오장육부가 다 뒤집혔고, 열이 오른 머리를 식히지 못해 이성이 마비되었다.

16550631001633.jpg “그냥 빨리 죽여 버려야 했어.”

그랬더라면 이런 기분을 맛볼 일도, 귀찮게 고원으로 직접 향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칼바람이 그녀의 뺨을 연신 할퀴고 지나갔다. 하지만 에어리스는 오히려 더욱 거세게 박차를 가했다. 릴리 가문의 가보인 검으로 언니의 심장을 직접 찌르고 싶었으나, 이제 그런 것 따윈 아무 상관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손쉽게 손에 넣은 그 여자를, 한시라도 빨리 눈앞에서 없애 버리고 싶은 마음뿐. 에어리스는 도저히 버티기 힘들 때를 제외하곤 잠자는 시간도 아끼며 말을 달렸다. 길은 각오했던 것보다 더 위험해 목숨이 위협받기도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아니, 세이블 릴리를 죽이겠다는 생각에 멈출 수 없었다. 에어리스는 말을 세웠다. 숨이 턱 끝까지 찼고 피로가 온몸을 짓눌렀지만 그녀는 환히 웃을 수 있었다. 신은 아직 자신의 편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빨리 찾을 수가 없지. 저 멀리서 모닥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내일이면 빠져나갈 수 있을 테니 그들에게도 오늘이 고원에서의 마지막 밤일 것이다. 피처럼 붉은 노을 아래 선 에어리스의 입가에 소름 끼치는 미소가 퍼졌다. * * * 에어리스는 은밀히 야영지 쪽으로 접근했다. 그러던 중, 느긋하게 걷고 있는 두 인영을 발견하고는 얼른 몸을 숨겼다. 둘 다 망토를 뒤집어써서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제법 차이가 나는 체격 덕분에 두 남녀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그녀가 숨은 곳을 지나쳐 한참을 걸어간 뒤에야 에어리스는 비로소 그들의 뒤를 밟았다. 두 사람은 어느 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고원 여기저기에는 크고 작은 샘들이 많이 있다고 듣긴 했는데, 지척의 샘에서는 희한하게도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여자는 주변을 살피더니 이내 조용히 입을 열고 남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누군가 엿듣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알지 못한 채.

16550631001633.jpg “……계약 내용대로 해 주세요.”

16550631001633.jpg “알겠습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정 일색인 남자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고는 뒤를 돌려다 말고 잠시 멈칫하더니, 더욱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16550631001633.jpg “그자의 처리는…… 어떻게 할까요?”

16550631001633.jpg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그대로…… 아니.”

후드를 뒤집어쓴 여자의 입술 끝이 위로 씨익 말려 올라갔다.

16550631001633.jpg “……정신을 완전히 놓지 않을 정도로만.”

비록 얼굴은 절반 넘게 가린 상태였지만, 그녀의 새하얀 치아가 달빛 아래서 섬뜩하게 빛나는 것만큼은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에어리스는,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었다. ‘그자’를 ‘처리’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너무나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알았다는 짧은 말만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허연 김이 이리저리 춤을 추듯 움직였다. 홀로 남아 있던 여자는 샘 쪽을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다시 한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곧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망토를 벗어 발밑으로 풀썩 떨어뜨리자, 허리까지 오는 검은 생머리가 이리저리 나부꼈다. 그간의 환경 때문인지 평소보다 훨씬 거칠고 푸석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샘에 발을 담근 순간, 여자의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에어리스의 눈동자가 오싹하게 빛났다. 허리 위가 잠길 정도까지 걸어 들어간 그녀는 모든 긴장과 피로가 풀리는지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하지만 그도 잠시. 여자의 어깨가 들썩이는가 싶더니 이윽고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16550631001633.jpg “후훗.”

그 소리에 에어리스의 눈동자에는 새빨간 핏발이 섰다. 그래, 그 웃음이 네 생의 마지막이 될 거다. 그녀는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입술을 깨물며 등 뒤에 메고 있던 활과 화살을 재빨리 꺼내 들었다. 에어리스는 귀족 아가씨로선 흔치 않게도, 명사수로 소문이 나 있었다. 셰릴 백작의 사냥 대회에 매년 초대받았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움직이지도 않는 여자를 맞추는 일은 그녀에게 몹시 쉬웠다. 무방비하게 노출된 새하얀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고운 어깨를 타고 또르륵 흘러내리는 물방울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사방엔 적막뿐이었다. 에어리스가 조용히 집중했다. 복수의 신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샘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이 여전히 시야를 방해했지만, 등을 꿰뚫고 그대로 심장에까지 화살을 박아 넣기엔 충분했다. 활시위가 팽팽히 당겨졌다. 그녀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숨을 멈추고는 정확히 조준한 뒤 손을 놓았다. 쉬익! 화살이 어둠을 뚫고 맹렬하게 날아가던 그 순간.

1655063104519.jpg “……멈춰!”

큰 목소리가 적막을 깨고 울려 퍼졌다. 동시에 여자가 에어리스를 향해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촤악, 하고 물보라가 일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생각이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찰나 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광경은 더욱 믿을 수 없었다. 여자의 몸을 완전히 관통할 정도로 맹렬히 날아가던 화살이 공중에 딱 멈춰 있는 게 아닌가……? 심장을 꿰뚫기까지 얼마 남겨 두지도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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