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내 진심은
(88/173)
88화. 내 진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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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내 진심은
2022.05.04.
오스널과 호위들은 고원 동쪽 끄트머리에서 나침반을 들고 헤매었다.
그곳은 여태 지나온 곳과는 달리 웬만한 마차보다 큰 붉은 바윗덩어리들이 마치 하늘에서 흩뿌려진 것처럼 여기저기 끝도 없이 박혀 있는 신기한 지형이었다.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수많은 바위 사이를 이리저리 열심히 누비고 또 누비길 반복하던 어느 순간.
나침반 위로 갑자기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 퍼졌다. 그뿐만 아니라 곧 폭발할 듯 뜨거운 열기까지 내뿜기 시작했다.
“이 주위를 파 보거라!”
오스널의 명령에 호위들이 즉시 삽을 꺼내들었다.
쉬지 않고 땅을 파 내려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이윽고 삽 끝에 단단한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삽 끝에 윗면이 평평한 돌이 걸립니다. 아무래도 상자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오스널 님!”
땀을 뻘뻘 흘리며 땅을 파헤치던 호위의 입에서 기쁨의 함성이 터졌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스널에게서도 드높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핫, 드디어 찾아냈구나!”
보물이 있는 장소에 가까워질수록 바늘이 더 빨리 회전하고, 빛이 강해질 거라던 로렐라 메이레드의 말은 사실이었다.
생각 외로 순순히 협조하기에 몹시 의심스러웠으나, 금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내심 이번 일이 세이블 릴리의 뜻대로 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 듯했다.
뭐, 그날 밤 두 사람이 그토록 격렬하게 다투었으니,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번 골탕 먹어 봐라 하는 심정이겠지.
로렐라 메이레드는 나침반을 깨끗하게 포기한 것은 물론, 그 사용 방법에 대해서까지 일사천리로 알려 주었다.
심지어 말은 또 어찌나 빠르던지, 여러 번 놓친 부분을 되물어야 할 정도였다.
그 외에도 다른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오스널에겐 로렐라 메이레드를 잡아 두고 느긋이 탐문할 여유가 없었다.
수하에게서 용병단 야영지의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소식이 들려온 탓이었다. 로렐라의 신변에 문제가 있음을 눈치챈 게 틀림없었다.
그는 꼬리를 잡히기 전에 나침반을 챙기고 재빠르게 도망쳤다.
용병단을 비롯해 펠리어트 공작과 레어넌 단장의 능력이라면 로렐라 메이레드의 위치를 찾는 건 순식간이겠지만 더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들이닥칠 때쯤엔 자신들은 이미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후일 테니까.
게다가 복면을 한 덕분에 로렐라는 그는 물론, 호위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심지어 말조차 별로 섞지 않아서 목소리를 알아들을 염려도 없었다. 그럴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오스널은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연신 히죽댔다.
호위들이 땅속에서 꺼내 올린 것은 조그마한, 그러나 제법 고급스러운 대리석 상자였다.
오랜 세월 땅속에서 잠들어 있었음에도 여전히 아름다움을 간직한 상자를 바라보던 오스널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끝까지 반신반의했으나 나침반은 진짜였다. 가보가 묻힌 곳을 알려 주는 나침반이라니.
로렐라 메이레드는 대체 어디서 이걸 손에 넣은 걸까?
하지만 의문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호위들이 꺼낸 상자 아래, 또 다른 상자가 묻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자가 더 있습니다!”
“뭐……?”
오스널은 자신의 발치에 놓인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기에 가보가 들어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뭔가가 또 있다고?
뭐든 간에 이런 곳에 묻혀 있었다면 예사롭지 않은 물건일 터.
오스널은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호위를 향해 다그치듯 소리쳤다.
“어서 꺼내 보아라!”
* * *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노을 아래 우뚝 선 붉은색 바위들이 마치 황금처럼 빛났다.
해가 지면서 추워진 탓에 바람이 아까보다 훨씬 더 차가웠지만, 그것으로도 식힐 수 없을 만큼 남자들의 등 뒤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으하하핫!”
오스널은 실성한 사람처럼 계속해서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가보에 이어 이런 생각지도 못한 횡재를 하다니!”
고원에서 보낸 이 며칠은 평생을 곱게만 자라 온 그에게 지옥 그 자체였다.
제대로 씻지도 못했고, 잠은 딱딱한 땅바닥에서 자야 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여기저기서 위험한 놈들이 수도 없이 튀어나왔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엄청난 포상이 뒤따라 준다면, 이 거지 같은 고원에서 며칠이 아니라 몇 달도 넘게 지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먼저 꺼낸 상자에는 서늘한 빛을 뿜어내는 단검이 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것이 릴리 가문의 가보인 듯했다.
그리고 아래에 있던 상자에는…… 온갖 보석이 그득했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아주 많은 양의 보석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펜던트였다.
금으로 만든 정교한 눈꽃 모양의 테두리 속에 박힌 다이아몬드는 크기도 굉장했지만, 더욱 놀라운 건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었다.
마치 스스로 빛을 내듯 시시각각 다른 색으로 반짝이는 아름다운 광채를 바라보며 오스널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평소 보석이라면 신물이 나도록 접해 웬만한 것들은 눈에 차지 않았는데 이건 달랐다.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 틀림없었다.
‘에어리스에게는 비밀로 해야겠어.’
그녀가 원한 건 어차피 가보뿐이었으니까.
게다가 이 가보를 찾은 사람도 저이지 않은가? 이걸 찾아준 이상, 릴리 가문은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든든한 뒷배가 되어 줄 것이다.
호위들이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긴 하지만, 그들을 입막음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심지어 여긴 고원이다. 주위에 보는 눈이 없는.
오스널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오스널 님, 괜찮으십니까?”
“……그래, 괜찮다.”
호위의 염려스러운 목소리에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서히 몸을 일으킨 그때였다.
“여기까지 오는 데 이렇게나 오래 걸리다니.”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스널은 굽혔던 무릎을 다 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가 움직일 걸 그랬네요. 그편이 배는 더 빨랐을 테니까.”
그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돌덩이처럼 딱딱해진 목을 억지로 움직였다.
붉은 바위 아래 서 있는 여자는, 허리까지 오는 새카만 흑발과 창백해 보일 정도로 흰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가녀린 체구. 입가에 걸린 미소는 영원히 깨지지 않는 얼음보다 차갑고 날카로웠다.
무감해 보이는 보랏빛 눈동자는 오싹하리만치 형형하게 빛났다.
“세, 세이블.”
오스널은 가보와 다이아몬드를 욕심스레 품에 안은 채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호위들은 그런 그를 보호하긴커녕 자리에 못 박힌 듯 꼼짝하지 않고 서 있기만 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난 건지 알 수 없는 낯선 괴한들이, 날카로운 검을 턱 아래에 가져다 댔기 때문이었다.
마치 그림자에서 돋아난 것처럼 새카만 복장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감춘 그들은 한눈에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이 음험한 분위기, 그리고 살기.
고원을 헤매는 동안 그녀와 내내 대동했던 용병들과는 결이 달랐다.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치던 오스널의 등에 단단한 무언가가 닿았다. 커다란 바위가 막고 있어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헉.”
그는 순간 놀라 손에서 둥근 다이아몬드를 놓치고 말았다.
데굴데굴 굴러간 보석은 세이블의 발끝에 닿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힐끔 내려다본 세이블은 이내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차 버렸다. 만약 모르는 사람이 보았더라면, 돌멩이를 걷어찼다고 착각할 정도로 무심한 동작이었다.
“잠깐……!”
오스널이 애타게 손을 뻗었지만, 이미 다이아몬드는 멀리 굴러간 뒤였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칭찬이라도 해 줄까요?”
세이블은 그림으로 그린 듯한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은 채 옛 약혼자의 곁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오스널의 눈빛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도대체 언제부터 뒤를 밟았던 걸까. 내가 여기 있는 건 언제 알았고. 설마…… 내가 어수룩해 보이던 로렐라 메이레드에게 속았단 말인가?
아니, 어쩌면 이 모든 게 처음부터 세이블의 계획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런 개 같은……!”
오스널의 입에서 참지 못하고 욕설이 터졌다.
“어머, 그새 품위를 잃으셨네요.”
세이블이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더니 곧 표정을 지우고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사랑했던 때와는 달리.”
순간 오스널의 두 눈이 반짝였다.
잘만 하면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이블!”
오스널은 마치 청혼했을 때처럼 그녀의 앞에서 잽싸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걸 너에게 바치마……!”
그는 반지라도 건네듯 가보를 두 손으로 소중히 내밀었다.
“그동안 숨겨 왔던, 나의 진심이야!”
“……진심이라고요?”
세이블이 놀란 듯 두 눈을 깜빡였다.
“그래, 나는 한시도 널 잊은 적이 없었어!”
그 모습에서 희망을 느낀 오스널은 더욱 뜨겁고 열렬한 목소리로 외쳤다.
“난 에어리스 따위 조금도 사랑하지 않아. 너도 잘 알잖아. 그 여자가 얼마나 가식적이고, 이기적인지!”
세이블은 가만히 서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핏 보면 마치 그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내 마음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동안 말할 기회가 없었을 뿐…….”
그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오스널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거리가 가까워지자 저도 모르게 눈가를 움찔거렸지만, 꿋꿋하게 자세를 유지했다.
오스널의 코앞까지 다가간 세이블은 살짝 허리를 굽힌 채 그가 내민 가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검을 살며시 쥔 순간, 오스널은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사랑해, 세이블. 내 사랑은 오로지 너뿐이다!”
* * *
바위 뒤에 서서 흙이 잔뜩 묻은 다이아몬드 위를 후후 불어 대던 나는 손바닥으로 팔을 문질렀다.
“와.”
닭살 돋아.
마치 발로 하는 것 같은 연기는 둘째치고 어쩜 대사도 저렇게 구릴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조용히 살피던 펠리어트와 레어넌은 물론이고, 심지어 시엘로 단장마저 속이 울렁거리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비록 눈밖에 보이진 않지만, 위너드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지척에 서 있는 카셀도 아마 마찬가지겠지.
나는 다시 다이아몬드를 천으로 닦는 일에 열중했다.
표면에 묻은 흙먼지를 다 닦아 내자, 안쪽에서 반짝반짝한 빛이 마치 춤을 추듯 퍼졌다.
오래도록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황홀한 광채였다.
얼핏 고개를 돌려 바라본 세이블의 목에서도 다이아몬드 못지않게 눈부신 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석양에 반사된 안경알이었다.
“후후…….”
나는 흐뭇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작게 웃었다.
세이블의 여동생인 에어리스 역시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잘 지켜보고 있겠지?
분명히 그럴 것이다.
전서조를 통해 반대쪽 안경알을 보내며 직접 꼼꼼히 써 내려간 사용 설명서를 함께 동봉해 주었으니까.
나는 시뻘건 노을이 일렁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했다.
신 님, 곧 한 놈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