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빨리 좀 데려와!
(87/173)
87화. 빨리 좀 데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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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빨리 좀 데려와!
2022.04.30.
다음 날 아침.
건조하고 따가운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습관처럼 목에 스카프를 둘러매던 나는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앗!”
따가워!
목 옆에 살짝 나 있는 상처 때문이었다.
깊진 않지만, 그래도 어쨌든 칼에 베인 상처 아닌가. 천이 스칠 때마다 따끔거리는 아픔이 몰려와 몹시 거슬렸다.
덕분에 나침반에 대한 정보를 자연스럽게 흘렸을 뿐만 아니라, 사이가 틀어진 것처럼 보이는 데도 성공한 듯하지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진짜 피를 보게 만들어?!
갑자기 예정에도 없던 단검을 꺼낼 때까지만 해도 솔직히 설마설마했는데!
“연기……였다고?”
심지어 내 목을 봐주던 위너드마저 눈살을 찡그리며 되물었을 정도였다.
역시 이거 진심이 실렸던 거 아니야?
조용히 타오르는 분노를 삭이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세이블이 나를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것도 아니고 왜 니가 노려봐, 어?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노골적으로 다리를 절뚝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정강이에 멍이 들다 못해 아주 심하게 부어올라서 말이죠.”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이 세이블의 다리로 향했다. 시선을 눈치챈 그녀가 일부러 들으란 듯 싸늘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죠.”
세이블은 이 말만 남긴 채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황당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아프게 찬 것도 사실이라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안색이 좋지 않군. 어디 아픈가?”
“로렐라, 일정이 너무 무리한 건 아닙니까?”
그녀를 불러 세우기도 전, 펠리어트와 레어넌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곁에 있던 위너드가 후드 앞섶을 두 손으로 여민 채 저 멀리 달아났다.
나는 얼른 앞으로 나서서 그런 위너드의 뒷모습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 두 남자의 시선을 냉큼 차단했다.
“괜찮아. 아프긴커녕 기운이 넘치는데, 뭐. 걱정해 줘서 고마워.”
펠리어트와 시선을 맞추며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이번에는 레어넌 단장님을 향해 생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단장님이 사령들을 책임져 주신 덕분에 오히려 전보다 수월해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펠리어트가 낮게 헛기침하고 동시에 레어넌은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때 ‘딱’ 하고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순간 엄습한 불안한 기분에 슬쩍 고개를 돌려 보고는, 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눈에 들어온 건 나무에 기대고 이쪽을 바라보는 용병단의 막내. 아니, 카셀이었다.
무언가를 우물거리는 입술 사이로 커다란 풍선이 부풀었다가 다시 딱, 소리와 함께 터졌다.
반쯤 벗겨진 후드 아래로는 붉은 눈이 살벌하게 빛나고 있었다.
레어넌 단장이 뒤돌면, 바로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쟤는 또 왜 저래. 저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다, 단장님! 제 말 안장 좀 봐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로렐라.”
“내가 봐주도록 하지.”
“오, 그래! 당신도 봐주면 좋고!”
나는 얼른 두 사람을 데리고 급히 자리를 떴다.
목의 상처고 뭐고, 지끈거리는 두통이 몰려왔다.
이러다 피 말라 죽겠네!
* * *
땅을 불사를 기세로 타오르던 해는, 우리가 고원을 한참 헤매던 와중 서쪽으로 넘어갔다.
오늘도 결국 보물의 위치는 찾지 못했다.
안 그래도 신경 써야 할 게 많은데, 나와 세이블은 물론 용병들도 슬슬 지쳐 가는 것이 보여 마음이 초조했다.
해가 떨어지니 삽시간에 추위가 찾아왔다.
불침번을 제외한 모두가 깊은 잠에 빠진 시간. 나는 몰래 무리를 빠져나왔다.
‘조심하세요. 오스널의 호위는 검술 실력이 무척이나 뛰어나고, 마법을 다룰 줄 아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세이블의 짧은 경고가 머릿속에 스치자, 나도 모르게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부디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하지만 솔직히 그보다 더 큰 바람이 있다면…….
제발, 제발 빨리 좀 나타나라!
마음속으로 애타게 외치며 일부러 하늘도 한 번 바라보았다가, 팔을 쭉 뻗기를 반복했다.
잠이 오지 않아 근처를 홀로 서성이는 사람처럼.
무방비해 보이도록 밑동만 남아 있는 나무그루터기에 멍하니 걸터앉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발밑으로 스멀스멀 연기가 밀려왔다. 누가 봐도 수상한 보랏빛 연기였다.
“……앗!”
입에서 반가운 탄성이 터진 것도 잠시.
나는 당황한 척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연기가 더욱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마치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다는 듯.
아무래도 호위 중 마법을 다룰 줄 안다는 자가 근처에 있나 본데.
근데 어떻게 해야 하지? 이게 대체 뭔데?
침착하자, 로렐라. 그러니까 이럴 때는 보통…….
“아아……! 어지러워…….”
기절이겠지!
나는 신음하며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땅 위에 누워 눈을 감았다.
물론 정신은 여전히 말짱했지만.
이 보랏빛 연기가 뭔진 몰라도 어차피 내게는 듣지 않을 것이다. 마법사가 있단 얘길 듣고 여기에 오기 전 미리 보호 마법 약을 마셔 두었으니까.
카셀이 준, 어떤 마법이든 무력화시킨다는 말도 안 될 정도로 편리한 약이었다. 진짜로 아무렇지 않은 걸 보니 효과도 뛰어났다.
일부러 유인하긴 했지만, 어떤 방법을 쓸지 몰라 최대한 많은 대비를 해 둔 건데 과연 정답인 듯했다.
내 명연기에 속았는지 곧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걸음은 코앞에서 멈췄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목에 걸고 있던 나침반 줄이 끊어지는 소리인 듯했다.
내 상태를 확인하려는지 툭툭, 팔을 치는 손길이 느껴지더니 머리 위에서 낯선 음성이 들렸다.
“좋아, 완전히 정신을 잃었군. 데려가.”
역시 기절하길 잘했…… 응? 뭐라고?
“굳이 그럴 필요 있습니까? 그냥 여기서 협박해서 나침반 보는 방법을 불게 하면 그만인데요.”
그래, 그래! 그냥 여기서 물어봐! 순순히 알려 줄게!
“마법으로 기껏 재워 놓고 뭐 하러. 그리고 여긴 놈들이 있는 곳과 너무 가까워. 여자가 소리라도 지르면 금세 구하러 올 거다.”
대장인 듯한 남자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처에 있는 일행을 믿고 시간을 끌 수도 있다. 하지만 무리에서 떨어져 납치되었다는 걸 알면, 약은 꾀는 부리지 못하겠지.”
아니, 난 진짜로 그럴 생각 없다니까?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고. 이거 미치겠네.
‘오스널은 매사에 예민하고, 조심스러워요. 그의 호위대장은 그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데다가, 본인조차 그런 편이죠.’
세이블은 누가 오스널의 곁을 지키고 있는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근데 이렇게까지 조심스러울 줄은 몰랐단 말이야……!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몸이 번쩍 들렸다.
‘어어?’
얘들이 기어코 귀찮은 짓을 하네.
슬그머니 실눈을 뜨자 날 들쳐 메고 가는 남자의 등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가죽끈이 보였다.
끈에는 여러 가지가 달려 있었는데, 맨 아래쪽에 있는 커다란 검집이 가장 눈에 띄었다.
그리고 손 근처에 닿는 이건…….
나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여 작은 단검 고리에 묶인 끈을 풀어 냈다. 그러고는 혹시라도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며 조심스레 소매 안쪽에 단검을 숨겼다.
잠이 안 와 근처를 산책하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옷차림을 가볍게 한 건데, 납치당할 줄은 몰랐다. 곤경에서 벗어날 때를 위해서라도 뭐든 무기가 필요했다.
그들은 수풀 뒤에 숨겨 놓았던 말 위에 나를 싣고 어디론가 급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야영지의 모닥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점점 멀어져만 갔다.
‘괜찮겠지?’
여전히 실눈을 뜬 채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마음속에 근심이 차올랐다.
대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더욱 그랬다.
물론 오스널이 날 쉽사리 해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줄곧 우리를 미행해 왔으니, 내 곁에 용병단 말고도 펠리어트 공작과 레어넌 기사단장이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날 안전하게 다시 데려다주는 친절함 같은 걸 기대할 수는 없다.
아마 그들의 볼일이 끝나면 이 위험한 고원 한복판에 홀로 덩그러니 버려질 것이다.
게다가 걱정되는 건 그뿐이 아니었다.
내가 없어졌다는 걸 행여 누군가 알게 되면, 그게 모두의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일 거다.
과연 그때 시엘로 단장은 물론이고 펠리어트와 레어넌, 그리고 카셀이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까?
……이러다 오스널의 계획은 물론 내 계획도 모두 틀어져 버리는 거 아니야?
아니, 그 자리에서 협박했어도 순순히 불었을 텐데. 굳이 납치하다니.
이 똥 멍청이들아!
설마 멀리 가지는 않겠지. 제발 그래야 하는데.
살짝 눈을 뜨고 보니 주변이 어두웠다. 시간은 아직 충분하다.
모두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을 테니, 내가 없어졌다는 걸 곧바로 들키진 않을 것이다.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카셀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일단 용병단 막내 노릇을 자처하고 있으니 섣불리 개인행동을 하긴 어렵겠지.
그래, 지금은 그 사실에 희망을 걸어 보자.
게다가 낮에 세이블뿐만 아니라 위너드에게도 오스널을 유인해 나침반을 빼앗긴 척 건네주겠단 계획을 미리 귀띔해 놓았다.
물론 위너드는 마뜩잖아 했지만.
아무튼, 여차하면 그 두 사람이 어떻게든 잘 둘러대 주겠지.
위너드는 내가 어떤 상태인지 앉은 자리에서 훤히 볼 수 있는 사람이고, 세이블은 누구보다 눈치가 빠르니 어렵지 않게 적당한 핑계를 말해 줄 것이다.
믿는다, 내 라이벌. 그리고 안내자!
나는 땀이 배어 나온 손을 말아 쥔 채 두 사람에게 소리 없는 응원을 보내고는, 흔들리는 말 위에서 사지를 축 늘어뜨렸다.
* * *
그리 오래지 않아 말이 멈추고, 또다시 누군가가 나를 들쳐 멨다.
몸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슬쩍 실눈을 떠서 왠지 유적처럼 보이는 허물어진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까지 확인했다.
안으로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차가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어찌나 배려가 없는지,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지를 뻔했다.
“30분 후면 깨어날 겁니다.”
뭐? 30분이나 걸려?
거, 이러다 해 뜨겠네, 해 뜨겠어!
나는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좋아, 계획대로군. 그럼 잘 지키고 있어라. 나는 그분을 모셔올 테니.”
아니, 미리 기다리고 있으면 좀 좋아?
그래야 내가 얼른 눈을 뜨고는 ‘나침반을 보는 방법이요? 자,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하고 말해 줄 거 아니냐고!
두 남자는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며 문밖으로 나갔다. 멀어지는 발소리가 하나인 것을 보니, 다른 한 사람은 문 앞을 지키는 모양이었다.
끄응.
어쩔 수 없지. 급한 건 내 쪽이니, 일단 기다리는 수밖에.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며 모로 누워서 멍하니 벽을 바라보았다.
‘참, 그게 있었지.’
나는 조심스레 주머니를 뒤적여 작고 판판한 외눈 안경을 꺼냈다.
이 또한 내 가방에 들어 있던 마법 도구 중 하나인데, 어떻게 쓰는 거냐 하면……
‘이걸 눈에 가져다 대면, 나머지 한 알이 비추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이거지.’
다른 한 알은 세이블이 갖고 있으니 어떤 광경이 눈에 비칠지는 예상하고도 남았다.
보나 마나 아무도 없는 조용한 벌판이나 텐트 안이 보이겠지. 세이블은 야영지에서도 사람이 없는 곳에 혼자 있는 걸 좋아하니까.
그런 생각으로 동그랗고 판판한 유리알을 눈에 가져다 댄 그때였다.
……어?
혼자 쉬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누군가가 말을 타고 미친 듯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마구 들썩이는 등 뒤에서 단정하게 모아 묶은 금발이 물결치듯 흔들렸다.
뭐지? 내가 잘못 봤나?
나는 눈을 비비며 다시 한번 안경을 들여다보았다.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저건 레어넌 단장님의 뒷모습인데?
……게다가 그 옆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저 검은 망토도…… 눈에 너무나 익숙한 것이다.
아니야, 이건 꿈일 거야.
나는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안경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불쑥 앞으로 끼어들었다. 동시에 시야가 마구 흔들렸다. 하마터면 부딪힐 뻔해 세이블이 급히 고삐를 당긴 탓이었다.
……하지만 나는 보고 말았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화면 속에서, 순간 눈부신 은발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 것을.
그는 바람처럼 달려 순식간에 펠리어트와 레어넌을 따라잡았다. 바람에 펄럭이는 후드가 곧 벗겨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니, 벌써 눈치챘어?!
모조리 다 몰려오고 있잖아!
그 소리에 문밖을 지키던 남자가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왔다.
“이, 이런! 벌써 깨어나다니!”
남자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상황이 급해져 아까처럼 장단을 맞춰 줄 수가 없었다.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잠시 우왕좌왕하던 그는 결국 몹시 급하고 거친 발걸음으로 내게로 다가왔다. 동시에 나 역시 그를 향해 후다닥 달렸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내 행동을 오해한 그가 커다란 손으로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쇠를 덧댄 장화를 신은 발에 온 힘을 실어 그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다.
“으악!”
남자가 비명과 함께 무릎을 꿇은 틈을 놓치지 않고, 아까 훔쳤던 단검을 그의 목에 잽싸게 들이댔다.
“자, 잠깐.”
그는 고통에 눈물이 고인 와중에도, 냉큼 두 손을 들었다.
“잘못했습니다! 사…… 살려 주세요!”
“죽기 전에 빨리 데려와, 빨리!”
“제발 목숨만은……. 응?”
가파르게 숨을 몰아쉬며 말을 잇던 남자가 그대로 멈췄다.
“오스…… 아니, 네 윗사람 좀 빨리 불러오라고!”
남자는 두 눈을 말없이 끔뻑이다 멍하니 중얼거렸다.
“지금 뭐라고……?”
하지만 나는 말을 싹둑 자르고 발을 애타게 동동 구르며 재차 소리쳤다.
“아, 시간 없다고! 얼른 데려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