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연기가…… 아닌가? (86/173)


86화. 연기가…… 아닌가?
2022.04.27.


고원의 아침은 변함없이 건조하고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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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서둘러라!”

시엘로 단장의 호령 한 번에, 천막을 걷어 내던 용병들의 손길이 더욱 분주해졌다.

내 시선은 그 많은 사람 중에서도 딱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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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이라고?’

실소가 터졌다.

다른 곳도 아닌 시엘로 용병단에 가짜 이름까지 쓰며 위장 입단을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실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만큼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용병단이 절대 아닐 텐데.

하지만 카셀은 진짜 용병단의 막내처럼 그 누구보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천을 말고 각종 장비를 챙기는 손길 또한 무척이나 능숙하고 야무졌다.

자켈 부단장은 그의 곁에 서서 흐뭇한 얼굴로 쉴 새 없이 이것저것 지시했다. 카셀이 마음에 드는지 중간중간 호쾌하게 등을 두드려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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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기……!’

……쟤, ‘검은 뱀 길드’ 길드장인데!

광경을 지켜보는 내 뒷덜미에서 땀이 날 지경이었지만, 뭐라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먼지가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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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취!”

황급히 입을 손으로 막았지만 갑작스럽게 터진 재채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카셀이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후드에 가려 보이는 건 입술뿐이었지만, 그 입술이 예쁜 호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가는 것만큼은 똑똑히 보였다.

마치 어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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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멋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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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반했어.’

 
그때의 목소리가 마치 마법처럼 귓가에 생생히 들려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자켈 부단장 또한 시선을 느낀 건지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당황해서 나침반을 들여다보는 척하며 급히 뒤로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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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자 미처 보지 못한 누군가의 단단한 가슴팍에 이마와 코가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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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쿠, 조심해…… 아니, 조심하세요.”

바로 위너드였다.

그는 눈만 내놓은 복면 차림이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꽁꽁 감싸고 있는 모습이라 갑갑해 보이기도 하고, 좀 측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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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갑하지? 조금만 참아.”

나는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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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카셀이 따라온 것도 모자라, 심지어 단장님까지 합류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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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괜찮아.”

한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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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다들 나름대로 활약해 주고 있고.”

위너드는 눈을 접어 웃으며 시원스레 고갯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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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켈 씨. 좋은 아침입니다.”

그때 시엘로 단장이 위너드 곁으로 다가와 친근하게 어깨동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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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컨디션은 어떠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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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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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다행이네요.”

두 사람은 사이좋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말에 안장을 얹으러 가 버렸다.

뭐지……?

나는 어리둥절한 상태로 그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한껏 툴툴대며 불평할 거라 생각했는데, 저 태연자약한 태도는 뭘까. 평소 성격 같으면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모습을 감추고도 남을 사람인데.

혹시 주식이 팔려서 기분이 좋은 건가? 그보다 용병단장과는 언제 또 저렇게 친해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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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취!”

하지만 생각을 이어 나갈 틈도 없이 또다시 재채기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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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인가요? 미리 약이라도 먹어 두세요.”

때마침 곁을 지나가던 세이블이 미간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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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중요한 때에 저한테까지 옮으면 곤란하니까요.”

걱정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매정한 잔소리가 쏟아졌다.

* * *

손안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시선을 내리자 아니나 다를까, 나침반 바늘이 영롱한 빛으로 물들었다. 다음 길로 안내하겠다는 신호였다.

빛은 세 차례 점멸했고, 그 직후 바늘이 핑그르르 어지럽게 돌았다.

이윽고 멈춘 곳은 동쪽이었다.

우리는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말머리를 틀었다. 그 순간에도 나침반의 바늘은 어지럽게 돌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고원에 처음 들어섰을 땐 줄곧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나침반이 움직이는 간격도 짧아졌다.

내가 나침반을 확인하는 사이에도 맹수며 사령들은 끊임없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일행의 발걸음은 더뎌지긴커녕, 오히려 처음보다 속도가 붙었다.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희망 덕분이기도 했지만, 레어넌을 필두로 한 성기사단원들이 사령들을 모조리 제압해 주어 용병들이 맹수를 사냥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심지어 모두 잘 먹고 잘 쉬기까지 해서 힘이 넘쳤다. 부상자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심각한 상처를 입은 자도 없었다.

사령들과 맹수가 그들의 손에 쓰러지는 동안에도 나침반의 바늘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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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거의 다 온 것 같군요.”

내 곁에 바짝 달라붙어 말을 몰던 세이블이, 눈앞의 너른 평야를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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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끝이 보이네요.”

동시에 고삐를 쥔 내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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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게는 또 다른 일의 시작일 뿐이지.’

마음을 다잡으며 주먹에 힘을 꽉 쥔 그때였다.

귓가에 바람을 가르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맹수 떼며 사령이며 가리지 않고 신들린 듯 검을 휘두르는 위너드에게서 난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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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백만 주가 내 손에……!”

나와 세이블을 스쳐 지나가는 복면 속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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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게 왜 네 건데.

어이없는 나머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힘이 넘치는 위너드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세이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빛에도 황당함을 비롯해 여러 가지 감정들이 복잡하게 서려 있었다.

안내자에 대한 부끄러움은 어째서 나의 몫인 걸까.

나는 괜히 헛기침해 목을 가다듬고는 화제를 바꾸고자 세이블에게 은밀히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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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지금도 우리 뒤를 쫓아오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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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렇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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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슬슬 그 쓰레기 새끼의 낯짝 좀 봐 보실까?”

내 말에 세이블이 고삐를 잡아당기려던 손을 멈칫했다.

아차, 날 때부터 고귀한 귀족이었던 친구한테는 좀 격한 표현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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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오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군요.”

그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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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셰릴 백작의 사냥 대회에서 본의 아니게 ‘그들’의 대화를 몰래 엿들었거든.”

나는 일부러 ‘그들’이란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물론 그러지 않아도 세이블은 누구를 말하는 건지 알아차렸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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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고원에 숨겨진 릴리 가문의 가보를 찾아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는 거지? 하지만 마엘라 고원은 저주받아 아주 위험한 곳이라고. 하필 그런 델 가야 한다니.’

 
세이블의 예전 약혼자라는 오스널이 친절하게도 다 떠벌려 준 덕분에 상황을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자신의 새 연인이자, 릴리 가문의 실세를 꿈꾸는 세이블의 이복 여동생이 앞에 있는데도, 불만스럽다는 듯 짜증 냈던 목소리도 아직 생생했다.

시엘로 단장의 보고에 따르면 우리를 미행 중인 사람은 아주 유능한 호위를 대동했다고 한다.

평범한 사람이 그만큼의 돈을 지불하고 이런 위험한 땅에 발을 들일 이유가 없다. 고원에 원하는 것이 있지 않고서야.

그만한 재력이 있고, 고원에도 볼일이 있는 사람. 그것도 모자라 멀리서 우리를 미행할 만한 사람.

세이블의 이복동생과 손잡은 전 약혼자, 오스널 말고 그런 사람이 또 있겠는가.

출발하기 전까지 세이블이 그토록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조심했었는데, 대체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따라왔는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가 입 다물고 미행만 하는 이유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가보가 고원에 있다는 정보 정도는 오스널도 알고 있었으니, 세이블이 고원에 나타났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오스널은 자신이 위험을 감수하기보단 그녀를 감시하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 보물을 가로챌 생각인 거다. 그러지 않고선 그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한 일에도 눈앞에서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던 놈이 진짜로 위험한 일에 몸을 던질 리가 있나. 오히려 왜 자기가 이런 일을 떠맡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겠지.

수백 종의 로판을 읽은 나로선 오스널이 어떤 놈인지 그의 가정환경까지 궁예 해서 줄줄이 읊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내 손바닥 안이다, 이거야.

세이블을 배신하고 동생으로 갈아탄 것만 봐도 놈이 세이블에게 어떤 짓까지 했고 나중엔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대충 짐작 가능한 마당인데.

어휴,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

세이블은 이 상황을 어떻게 역으로 이용할지 궁리 중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전생에 열혈 독자였던 내가 거들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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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회귀 복수물 여주는 꼭 처음에 그런 쓰레기를 진심으로 사랑하더라.’

왜일까? 세이블처럼 똑똑한 여자라면 사랑에 빠지긴커녕, 보자마자 그놈이 쓰레기라는 걸 알았을 텐데…….

음. 혹시 그녀도 나처럼 클리셰의 희생양인 건가?

독자 시절부터 쭈욱 가지고 있었던 소박한 의문을 잠시 곱씹던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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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쓰레기라고 부르는 건 처음 듣는데, 어쩐지 마음에 쏙 드네요.”

침묵하던 세이블이 갑자기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독자였던 내게는 익숙한 단어지만, 세이블에게는 꽤 신선한 욕(?)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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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대화만 듣고도 그 사람이 쓰레기라고 확신할 수 있다니……. 참 대단한 능력인데요?”

그녀가 이렇게 웃는 건 처음 봤다.

어쩐지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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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별거 아니야. 로판 독자 3년이면 결말까지 줄줄 읊을 수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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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세이블은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하지만 나는 진지한 얼굴로 얼른 화제를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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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의 분리수거까지 빠르게 끝내 보자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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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가다가 갑자기 서쪽으로 말머리를 돌리더니, 이번엔 또 얼마 못 가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튼다고?”

세이블의 족적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던 남자는 짜증스러운 손길로 잿빛 머리카락을 넘겼다.

잘생겼지만 어딘가 모르게 간사한 느낌을 주는 남자는, 로렐라의 예상대로 세이블의 전 약혼자 오스널이었다.

그는 세이블 일행이 머물고 있는 야영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서서 주변을 두리번댔다. 그녀가 도대체 왜 여기서 한참을 빙빙 돌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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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일관성이 없잖아.”

그 말에 호위들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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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심지어 지도도 제대로 보지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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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갈지 몰라 마냥 우왕좌왕하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오스널은 대답 대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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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상한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이블 릴리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고원에 들어왔을 리가 없다.

그건 그녀가 준비한 용병 숫자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남몰래 저렇게나 많은 용병을 모으다니. 에어리스가 봤다면 아마 입에 거품을 물었을 것이다.

아니, 솔직히 말해 오스널에게도 기함할 만한 일이었다. 감시를 붙여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다 지켜봤는데도, 이만한 준비를 했다는 건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토록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일을 추진시킨 세이블의 지독함에 소름까지 돋았다.

그런데 힘들게 모은 용병들을 데리고 정확한 지도도 없이 고원에 발을 들였다고?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혹시 한눈에 지도라고 알아보기 힘든 물건이거나, 따로 길을 안내해 주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는 건 아닐까?

오스널이 여러 가지 생각에 깊이 잠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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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옵니다.”

호위가 얼른 몸을 숙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육안으로는 아직 확인할 수 없는 거리임에도 유능한 호위는 인기척을 눈치챘다.

오스널은 바위 뒤에 몸을 웅크리고는 점점 가까워지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정확한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여자 둘이 옥신각신하는 소리였다.

이윽고 그들은 근처까지 다가왔다. 오스널은 조용히 바위 뒤로 고개를 내밀어 이곳까지 온 게 누구인지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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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침반을 네게 넘기라고? 웃기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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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길 만한 소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바로 세이블과 로렐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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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여자도 날 혼란스럽게 하는 주범이야.’

그는 분한 듯 고개를 가로젓는 로렐라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세이블은 고원에 오기 전, 로렐라 메이레드와 자주 만남을 가졌다. 그러니 준비를 도와준 것도 그녀일 확률이 높았다. 친분이 있단 얘기는 처음 듣는데, 대체 왜 도와준 건지도 의문이었다.

심지어 그것조차 그렇다 칠 수 있었다. 그런데 저 여자는 대체 왜 여기에 온 걸까. 그것도 펠리어트 공작과 레어넌 단장까지 데리고서.

사냥 대회 때 두 사람이 우승을 두고 다투긴 했었는데…… 아, 혹시 그 승부의 연장인가?

오스널은 머리가 복잡했지만 숨을 죽이고 대화를 엿들었다. 세이블과 로렐라는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듯 계속해서 다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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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건 처음부터 제가 주도한 일이었어요. 거기에 로렐라 님을 끼워 드린 것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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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봤자 나침반이 없으면 말짱 헛일이지. 잊지 마. 내가 없었더라면 그 나침반을 손에 넣지도 못했을 거라는 걸!”

나침반이라고?

오스널이 귀를 쫑긋 세웠다.

……그게 뭐지?

흥미로운 얘기였지만, 단박에 믿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는 의심이 한가득 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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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미행을 눈치채고 날 유인하려 하는 걸 수도 있지.’

바로 넘어갈 만큼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호위 하나 없이 이곳까지 온 그녀들을 지금 당장 붙잡아 협박하는 대신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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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그 이야길 우려먹을 생각이죠? 아, 물론 그거 말곤 가진 게 없으니 내세울 만한 게 딱히 없다는 건 잘 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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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로렐라가 씩씩거리며 보란 듯 세이블의 멱살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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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밖에 가진 게 없다니, 설마 지금 날 거지 취급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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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거지를 거지라고 하지, 뭐라고 할까요.”

순간 오스널의 입가엔 삐딱한 미소가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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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렇지.’

로렐라에 대해서는 몰라도, 그는 세이블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약혼자로서 오랜 시간 동안 그녀와 함께했으니까.

그가 아는 세이블은 결코 저런 식으로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더 우아하고 기품 있게, 흠 잡힐 일 없이 일을 처리했으면 모를까.

그녀들이 보여 준 싸움으로 오히려 명확해졌다. 이건 자신을 끌어들이려는 수작에 불과하다.

이런 어설픈 연기로 날 속이려 들다니. 되레 큰코다치게 만들어 주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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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아니…… 돈도 없는 주제에.”

한데 그때였다. 세이블이 갑자기 단검을 꺼내 들더니 로렐라의 목에 가져다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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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검이 닿자마자 로렐라가 외마디 비명을 내뱉고는 고통스러운 듯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고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천천히 목을 매만졌다.

……어?

오스널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아니, 손끝에 진짜로 피가 묻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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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미쳤나……!”

로렐라가 바락 소리치더니, 세이블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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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그러자 세이블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검을 놓쳤다.

그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세이블의 멱살을 콱 틀어쥔 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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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날 더러 거지라고 해?!”

로렐라가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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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 주식…… 아니, 내 돈이 더 많거든?!”

세이블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마구 켁켁댔지만, 그녀는 손을 풀지 않았다.

그 서슬 퍼런 기운에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호위들마저 헉, 하고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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